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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42)… 격론장이 된 4·3진상보고서 심의(2)

나종삼 전문위원 “제주출신 편향적 집필” 주장
2003년 3월 24일, 고건 총리가 주재하는 4‧3진상조사보고서 심의 소위원회에 당초 회의 참석 대상자가 아니었던 국방부 출신의 나종삼 전문위원이 출석했다는 것은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국방장관이 강력히 요청했고 총리실에서 수용했다는 걸 알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시 진상조사보고서 집필 업무를 총괄했던 나를 공격하고, 보고서 심의를 원천적으로 무력화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이나 그 심의 과정이 불신을 받는다면, 그 다음 상황은 어떤 파장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나는 문제가 간단치 않다고 생각하고, 회의 직전 박원순(현 서울시장) 기획단장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박 단장은 “알았다”면서 회의장에 들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회의 서두에 조영길 국방장관이 나서서 나종삼 전문위원이 발언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고건 총리가 이를 받아들였다. 나 위원은 보고서 집필 과정에서 수석전문위원인 내가 전횡을 일삼았고, 제주 출신 전문위원들 중심으로 편향적인 집필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자신이 수정의견을 제출했는데도 수석전문위원이 대부분 묵살했다고 토로했다. 회의장엔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때 박원순 기획단장이 나섰다. 그는 나 위원을 상대로 일문일답식으로 추궁해갔다.

 

“저의가 뭔가?” 박원순 단장 추궁에 당황
“진상조사와 보고서 심의를 위해 기획단 회의가 모두 12차례 열렸는데, 나 위원은 모두 참석했는가?”
“모두 참석했다”

 

“내가 회의를 주재하면서 기획단 단원이나 전문위원의 발언을 한번이라도 제지하거나 못하도록 한 바가 있는가?”
“없다”

 

“오늘과 같은 주장을 기획단 회의에서 제기한 바 있는가?”
“없다”

 

“그렇다면 기획단 회의에서는 한 번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다가 이렇게 뒤통수치듯이 발언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그리고 총리실은 기획단장인 나와 사전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내 소속인 전문위원을 임의로 출석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갑자기 불똥이 총리실 쪽으로 향하자 고건 총리가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나 위원이 나서서 해명하려 하자 오히려 고 총리가 “그만 됐다”면서 나 위원의 발언을 제지했다.

 

나 의원의 발언 기회를 적극 추천했던 조영길 국방장관도 더 이상 나서지 않았다. 비장의 카드로 생각해서 들이댄 것인데, 그동안 한 번도 공식적인 문제 제기를 하지 않다가 불쑥 이렇게 훼방을 놓는 저의가 무엇이냐고 따지는 기획단장의 반박에 할 말을 잃은 것이다. 나 위원의 발언 해프닝은 거기까지였다.

 

소위원회 회의는 주로 국방부와 한광덕 위원이 제기한 문제점, 수정 의견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일부 용어를 순화하는 작업도 진행됐다. 발발배경과 초토화작전이란 용어, 남로당 중앙당 지시 유무, 집단학살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의 책임 범위 등이 여전히 ‘뜨거운 감자’였다.

 

고건총리, 보고서 결론 직접 읽어가며 심의
고건 총리는 소위원회 제1차 회의에 이어 다음날 속개된 제2차 회의도 직접 주재했다. 두 차례 소위원회 회의에서도 결말이 나지 않자 3월 28일 소위원회 제3차 회의를 다시 소집했다.

 

고 총리는 참여정부 출범 초기여서 국정 업무가 매우 바쁜데도 4‧3진상조사보고서 심의에 전력투구하다시피 했다. 다음날인 3월 29일 4‧3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리는 것으로 위원들에게 통보돼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소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쟁점 사항이 조금씩 타결되기 시작했다. 총리의 중재에 양쪽이 조금씩 양보했기 때문이다. 고 총리는 “보고서 결론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면서 8쪽에 이르는 결론 부분은 직접 읽으며 축조심의를 시도했다.

 

고 총리가 의문사항에 대해 세밀한 질문을 하면 내가 답변하는 식이었다. 고 총리가 “4‧3 인명 피해를 2만 5,000~3만 명으로 추정한 근거가 무엇이냐”고 질문해서 내가 그동안의 인명 피해에 대한 조사 자료와 인구 변동 통계 등 다양한 자료를 설명했더니 “그러면 되겠다.”고 수긍해서 넘어갔다.

 

결론 부분에 “4‧3사건의 발발과 진압과정에서 미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표현이 나온다. 고 총리는 이에 대해 ‘미국’이란 표현이 너무 광범위한 의미이기 때문에 ‘미군정’으로 수정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내가 미군정 이후 대한민국 출범 후에는 군사고문단이 개입했다고 답변하자 “그러면 ‘미군정과 주한미군 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내용으로 수정하자”고 해서 그렇게 정리됐다.

 

소위원회 제3차 회의에는 국방장관을 대리해서 유보선 국방차관이 참석했다. 유 차관이 회의 막바지에 이르렀는데도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끝까지 우겼다.

 

‘초토화작전’이란 용어를 ‘토벌작전’으로 수정하고, 집단 인명피해 1차 책임을 “9연대 송요찬 연대장과 2연대 함병선 연대장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삭제해달라는 것이었다. 또다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초토화는 풀어쓰고 연대장 이름만 뻬고 조정
유보선 국방차관이 ‘초토화작전’이란 용어와 집단학살의 1차 책임이 실명까지 거론된 두 연대장에게 있다고 한 내용을 삭제해야 한다고 끝까지 우긴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 무렵 국방부는 4‧3진상조사보고서 문제로 장성 출신 모임인 성우회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성우회는 앞서 4‧3진상보고서가 “군경의 진압작전을 국가폭력으로 규정함으로써 국가의 정통성과 군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 있는 중대한 잘못을 내포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다각적인 보고서 통과 저지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날 회의에서 유 차관은 “4‧3사건 진압과정에서 초토화작전이란 용어를 사용한 바가 없고, 또 그 책임을 물어 선배들의 실명이 버젓이 나오는데 국방부가 어떻게 동의할 수 있겠느냐?”면서 자신들의 고충을 설명했다. 이에 반해 김삼웅 주필 등 민간인 위원들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수정해서는 안 된다고 맞섰다.

 

이때 ‘행정의 달인’이란 별칭이 있는 고건 총리가 또다시 중재에 나섰다. 고 총리는 “오늘 합의가 안 되면 내일 전체회의가 어렵기 때문에 중지를 모으자”고 설득했다. 그래서 양쪽이 한발씩 물러서게 됐다.

 

즉, 초토화작전과 관련해서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진압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하였다”는 표현으로 수정됐다. 초토화작전을 풀어쓴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결론 부분에서 “집단 인명피해 지휘체계를 볼 때, 중산간마을 초토화 등의 강경작전을 폈던 9연대장과 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는 문장으로 수정됐다. 즉 9연대장 송요찬과 2연대장 함병선의 이름은 뺐지만 그 내용은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사실상 8쪽에 이르는 결론 부분 앞쪽은 물론 본문에 강경진압작전을 편 9연대장과 2연대장의 실명이 무수히 나오기 때문에 조금만 눈여겨보면 그 연대장들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단지 한 문장 속에서만 그 이름이 가려졌을 뿐이었다.

 

‘초토화작전’이란 용어도 인용 부호 속에서 살려냈다. 즉 김정무 장군의 “그 때에 초토화작전이라는 말을 했는데, 싹 쓸어버린다는 말이었다.”는 증언을 소개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초토화작전 시기 9연대 군수참모였던,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는 김정무 장군의 이 귀중한 증언은 보고서(293쪽)에 그대로 실려 있다.

 

보고서 심의 회의는 중요한 고비를 넘기고 막바지로 가고 있었다. 고건 총리는 결론 부분 마지막 8쪽을 읽던 중 “1948년 제주섬은 전쟁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국제협약 등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기본원칙이 무시되었다”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평가 부분에 이르러 눈길을 멈췄다.

 

곧이어 “법을 지켜야할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들을 살상하기도 했다. 토벌대가 재판 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상한 점, 특히 어린이와 노인까지도 살해한 점은 중대한 인권유린이며 과오이다”는 표현이 나온다. 진상조사보고서의 핵심이랄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박원순, 사퇴 배수진 치고 평가부분 살려
기획단 회의에서도 이 부분이 논란거리였다. 그래서 당초 보고서 초안보다 다소 완화된 내용으로 수정됐다. 또한 기획단 회의에서 보고서 초안에 실렸던 ‘학살’이란 용어가 정부 보고서로서는 적절치 않다는 지적에 따라 ‘살상’ 등으로 정리됐지만 제노사이드(genocide)를 해석하면서 ‘집단학살’이란 용어를 그대로 살려온 터였다.

 

고건 총리는 “정부 보고서에 평가 부분까지 담아야할지 재논의를 해보자”고 말문을 열었다. 일순 긴장감이 돌았다. 잠시 침묵이 흘렸다. 그 침묵을 깨고 박원순 기획단장이 말문을 열었다.

 

“저는 진상보고서를 어떻게 하든 통과시켜야 한다는 총리님의 뜻을 존중해서 많은 것을 인내하며 양보했다고 생각합니다. 국방부 측의 무리한 요구가 있었지만 그 쪽도 어려운 입장이기 때문에 가급적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보고서 핵심 부분까지 수정한다고 하면 기획단 회의를 재소집해서 논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기획단장인 저로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가 담긴 박원순 단장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이에 민간인 위원들도 박 단장의 말을 거들었다. 회의 분위기는 다시 반전됐고, 논란이 될 뻔했던 평가 부분은 원문이 그대로 살아났다.

 

그날 소위원회 회의는 장장 3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이로써 총리가 직접 주재한 3차례의 소위원회는 모두 20여 건의 쟁점사항이나 용어를 수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막을 내렸다. 총리실은 다음날 열리는 4‧3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할 회의 자료를 준비하느라 밤샘 작업을 벌였다.

 

‘조건부 의결’ 시나리오 만든 총리실
그런데 나는 전체회의 당일인 3월 29일 새벽에 받아본 총리실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보고서와 관련해서 4‧3특별법 제3조제2항제1호로 의결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에 관한 사항’(제4호)이 아니었다. 바로 그 전 단계인 ‘관련자료의 수집 및 분석에 관한 사항’(제1호)이었던 것이다.

 

4‧3위원회 제7차 전체회의를 준비한 총리실 참모들이 진상조사보고서 의결조항이 아닌 ‘관련자료의 수집 및 분석에 관한 사항’ 의결로 시나리오를 짠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 시나리오는 6개월 동안 시한을 정해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타나면 보완할 수 있도록 하고, 따라서 그날 회의에서는 진상보고서 확정이 아닌 관련자료의 수집‧분석으로 의결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4‧3특별법 제3조에 ‘관련자료의 수집‧분석에 관한 사항’과 ‘진상조사보고서에 관한 사항’을 각각 위원회 의결사항으로 나열한 취지에도 부합된다는 설명까지 달고 있었다.

 

총리실도 국방부 못지않게 성우회 등 보수단체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보수단체들은 청와대 쪽에 이야기해봐야 말발이 안 통하자 비교적 온건 성향의 고건 총리실 쪽으로 보고서 통과 저지를 위한 화력을 쏟고 있었다.

 

나는 그런 처지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총리실의 시나리오는 정도(正道)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날 오전 10시부터 정부종합청사 총리실 대회의실에서 열린 이 회의에 초미의 관심이 모아졌다. 취재진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고건 총리는 회의 시작 전에 민간위원들을 집무실에 따로 불러 티타임을 갖자고 제안했다.

 

고 총리는 그 자리서 “두 가지는 확실하다. 하나는 4‧3사건이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로부터 발단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됐다는 사실”이라면서 이들 양민들의 명예회복이 필요하기 때문에 위원들 간에 원만한 합의를 도출해 줄 것을 당부했다.

 

“6개월내 새 자료 나오면 수정” 조건부 통과
예정시간보다 20분 늦게 시작된 회의에서는 여전히 주요 쟁점에 대한 논란이 재연됐다. 일부 용어를 놓고 위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신용하 위원 등에 의해 보고서를 채택하되 6개월간 유예기간을 두어 수정의견이 있으면 재논의하자는 조건부 의결안이 제안되자 “된다” “안 된다”는 논쟁으로 뜨겁게 이어졌다. 김삼웅‧박창욱‧서중석‧임문철 위원과 강금실 법무장관 등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논란이 거듭되자 고건 총리가 간곡하게 조건부 의결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해 줄 것을 요청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수그러지자 고 총리는 진상조사보고서 심의에 대한 보도자료 내용을 검토하자고 제안했다.

 

그 보도자료에 문제의 “‘관련자료의 수집‧분석에 관한 사항’으로 접수 의결”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런 내용에 일부 민간위원들의 문제 제기가 있었고, 결정적인 역할은 제주 출신 강금실 법무장관이 해냈다.

 

지난번 회의에 이어 이날도 4‧3특별법에 명시한 기한을 지켜야한다며 6개월 조건부 안에 반대 입장을 보였던 강 장관은 문제의 문구를 발견하곤 “그것은 결정적 오류”라면서 “4‧3특별법 제3조제2항제4호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에 관한 사항으로 의결해야 법 취지에 맞다”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이날 전체회의에서 논란 끝에 진상조사보고서 안이 의결됐다. 다만 “6개월 이내에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타나면 위원회의 추가심의를 거쳐 보고서를 수정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비록 조건부 의결이었지만 제주4·3사건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한 정부 보고서가 확정된 것이다. 그것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주4‧3에 대한 인식을 ‘폭동’에서 ‘인권유린’으로 바꾼 것을 의미한다.

 

정부 사과 등 7개항 대정부 건의안 채택
한편 이날 회의에서는 진상조사보고서 의결에 이어 이런 보고서의 결론을 토대로 4‧3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7개항의 대정부 건의안을 채택했다.

 

이 건의안은 필자가 외국 사례와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으면서 초안을 마련했고, 4‧3기획단 회의에서 확정한 것이었다. 기획단에서 확정할 때에는 보고서에 ‘제6장 건의’를 담는 것으로 편성했다.

 

“제주4‧3사건의 진상조사를 통하여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국가공권력에 의해서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무참히 살해되었고, 칠순 노인까지도 ‘도피자 가족’이란 이름아래 죽임을 당한 충격적인 사실도 확인되었다.”

 

 

‘건의’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날 회의에서 ‘건의’는 진상조사보고서에선 빼내되 별도의 대정부 건의안으로 채택하기로 조정되었다. 또한 건의 문장도 일부 수정되었다.

 

즉 건의 1의 ‘국가원수의 이름으로 사과’가 ‘정부의 사과’로, 건의 3의 ‘역사 교과서에 기술’을 ‘평화와 인권교육 등의 자료로 활용’으로, 건의 7의 ‘4‧3 인권평화재단 설립’ 문장은 삭제하되 ‘정부는 진상규명과 기념사업의 지속 지원’ 내용으로 수정되었다. 최종 확정된 7개항의 건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의 1 : 정부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 규명된 내용에 따라 제주도민, 그리고 4‧3사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여야 한다.

 

건의 2 : 정부는 4‧3사건 추모기념일을 지정하여 억울한 넋을 위무하고, 다시는 그런 불행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건의 3 : 정부는 진상조사보고서의 내용을 평화와 인권교육 등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여야 한다.

 

건의 4 : 정부는 추모공원인 ‘4‧3 평화공원’ 조성에 적극적으로 지원하여야 한다.

 

건의 5 : 정부는 생활이 어려운 4‧3사건 관련 유가족들에게 실질적인 생계비를 지원하여야 한다.

 

건의 6 : 정부는 집단 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사업을 지원해야 하며, 유해 발굴절차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존엄성과 독특한 문화적 가치관을 충분히 존중하여 시행하여야 한다.

 

건의 7 : 정부는 진상규명사업과 기념사업을 지속적으로 지원해 나가야 한다.

 

7개항의 건의안 중에도 ‘정부의 사과’가 맨 앞자리에 있었다. 이것은 ‘법률적 행위’였다. 즉, 4‧3특별법 제3조 4‧3위원회의 심의사항 중에는 ‘제주4‧3사건에 관한 정부의 입장표명 등에 관한 건의사항’도 있다.

 

그 법적인 근거에 의해 기획단에서 건의안을 제출했고, 총리가 위원장인 정부위원회에서 그 건의안을 채택한 것이다.

 

이런 건의에 따라 정부 차원의 4‧3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과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하는 다양한 사업의 추진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4‧3의 위상이 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43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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