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미 4.3성(성담) ▲ 4.3성 유적지 표지판 위미리는 4·3 당시 무장대로부터 두 차례의 습격이 있었다. ▲ 김승욱 4.3의 광풍이 절정으로 치닫던 1948년 11월 28일 새벽에 산속의 무장대는 평온했던 위미마을을 습격한다. 당시 폭도로 불리던 무장대는 군경의 토벌작전이 심해지면서 식량 등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겨울을 앞두고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위미마을을 습격하여 무차별적으로 가옥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이날 어린이를 포함한 위미리 주민 22명이 무장대에 의해 목숨을 잃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방화로 당시 위미리 가옥 350여채 중 10여호를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 집도 옷도 식량도 모두 불타버린 마을 주민들은 겨울을 앞두고 이루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마을 위 중산간 가까이에 있었던 대성동과 종남밭, 종정동, 웃뙤미, 망앞 등의 마을 주민들도 본 마을 석성 안으로 소개되었고 종남밭 주민들은 4.3이후에도 마을로 돌아가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북촌이 토벌대에 의해 엄청난 희생이
■조배머들 코지 조배낭(구실잣밤나무)이 있는 돌무더기(머들)가 바다로 돌출된 곳(코지)이라하여 이름이 조배머들코지다. ▲ 조배머들코지 한라산이 내뿜은 용암이 바다와 만나 생겨난 거칠은 바위들은 숱한 전설을 낳았다. 조배머들코지의 바위들은 1986년 위미항이 국가어항으로 지정되면서 개발의 시련으로 제 모습을 잃은 채 방치되거나 묻혀 있었다. 서귀포시가 2006년 지역 주민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배머들코지 복원계획을 수립하고 2011년에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주변엔 산책로와 경관 조명을 설치하여 올레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 머들코지 주변 연못 바다로 향했던 조배머들코지는 위미항개발에 따른 매립공사로 육지에 갇혀버렸다.이 마을 사람들은 그 아쉬움을 달래 듯 코지 주변에 물을 가두어 연못을 만들었다. 바닷물 대신 용천수로 채워진 이 연못은 맑아서 수생식물이 물속에서 푸르름을 머금고 있다. ▲ 거북바위 거북을 쏙 빼닮은 바위가 막 물에 들어가려는듯 물가에 서성인다. ▲ 해국 해국 무
예전부터 풍요로웠던 위미리 마을 안길은 걸으며 노란 감귤과 함께 농익어가는 제주의 가을 풍취를 만끽할 수 있는 길이다. ■위미리 ▲ 위미리 전경-출처 네이버 지도 위미리는 제주 대부분의 해안 마을이 그렇듯 해안변에서 중산간 지역까지 길게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북쪽에 큰동산, 족은동산, 쇠동산이 있는데 쇠동산의 지형 지세는 마치 소가 누워 있는 형태이고, 족은동산은 소의 꼬리와 닮았다고 하는 데서 쉐미, 뛔미, 뛔밋개등으로 불렸고, 한자로 우미촌(又尾村) 또는 우미포(又尾浦)로 표기하다가 위미(爲美)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해양성 온대 기류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온화한 기후로 감귤·원예 작물의 노지 재배가 가능하여 예전부터 풍요로운 곳이다. ■위미 동백나무군락 현병춘(1858~1933) 할머니는 17세때 시집을 와 어렵게 모은 돈으로 황무지(속칭 버둑)를 매입한다. 이 땅을 옥토로 개간하면서 주변에 한라산에서 채취한 동백씨를 심어 방풍수로 키운게 오늘의 동백나무 군락이다. 1982년에 도지정 기념물 39호로 지정되었다.
■ 헌마공신 김만일 제주출신의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면 김만덕을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남녀차별이 심했던 조선시대에 여성으로서 사업으로 대성하고 번돈을 백성들의 구휼에 희사했으니 그 은덕을 기려 마땅하다. 필자는 주저없이 헌마공신 김만일(1550~1632)을 제주출신의 대표 역사인물로 생각한다. 김만덕도 훌륭한 분이지만, 김만일은 그에 비해 역사의 평가나 후세의 인식이 너무 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분의 고향인 의귀리에 옷귀마테마타운을 만들고, 관련행사를 개최하고 있지만 아직은 홍보와 인식 부족인지 김만덕에 비해 아는 이가 많지 않은 듯 하다. 김만일은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인 김인찬 장군의 후손(8대손)이다. 김인찬의 아들 김검룡은 태종 때 제주의 행정을 총괄하는 도지관을 지내며 경주 김씨의 제주 입도조가 된다. 종달리에 묘가 있다. 김만일은 17세기 전후 격동의 조선사회에 크게 기여를 하지만, 역사적 평가는 박하다. 조선왕조실록에 선조부터 인조까지 김만일의 공에 대한 숱한 기록이 있으나, 중앙의 인물이 아닌 변방의 인물이니 후대 역사가들은 별로 다루지 않은 것이다. 제주에서조차 외국인인 하멜은 알아도 김만일을 모르는 이가
■조랑말 체험공원 ▲ 조랑말 체험공원 전시관 전시관은 쫄븐 갑마장길 나들이의 시작점이다. ▲ 전시관 내 전시물 이 곳에선 제주마와 관련된 여러 정보를 접할수 있다. 말을 이용한 농사관련 농기구부터 제주말에 관한 기록등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 쯤 들러 볼만하다. ▲ 제주마와 말테우리 상 ■행기머체 ▲ 행기머체 제주어로 '행기'는 놋그릇, '머체'는 돌무더기라고 한다. 놋그릇을 엎은 듯한 형상의 단일 바위체이다. '지하용암돔'이라 불리우는 크립토돔(cryptodome)은 지하의 마그마가 굳어져 외부에 노출된 것을 말하는데 세계적으로도 희귀하고 우리나라에선 제주에서만 발견된다고 한다. ▲ 김승욱 그 뜨거웠던 세월은 가버리고 차갑게 식은 거대한 돌덩어리가 되어 말없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이 말을 키우기 시작한 시절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가늠할 수 없는 세월동안 여기에 자리했을
"이번 코스는 가시리 녹산로 일대 '쫄븐 갑마장길'로서 예전에 말을 기르던 갑마장이 있던 지역으로 가시천과 따라비오름, 잣담(잣성)을 아우르는 길입니다." ■제주의 말이야기 우리나라의 재래마는 체구가 작았다. 체고가 3자(90cm)정도였고 주로 농경에 이용됐다. 토마, 향마, 국마 등으로 불렀다. 중국의 문헌에선 말을 타고도 과일나무 밑을 지난다고 해서 과하마(果下馬)라고 칭한 기록이 있다. 지금의 제주마는 체고(어깨높이)가 암말은 117cm, 숫말은 115.5cm 정도다. ▲ 몽골말 '달단마'라고도 불리는 몽골말은 키가 4자~4자반(120~135cm)이고, 서역의 대완마(대완-지금의 우즈베키스탄)는 6자~7자(180~200cm)로서 덩치가 크고 몸집이 날렵한 말이었다. ▲ 제주마-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몽골이 말 생산기지로서 탐라를 지배하는 100년간 재래마인 토마, 달단마, 대완마, 그리고 이들의 혼혈종인 조랑말이 혼재했다. 이들 말이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제주의 지형과
■영주산 ▲ 둠부리통 정의현성 북쪽 출입구를 나와 영주산으로 가다가 하나로 마트 뒷길에서 우연히 만난 물통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둠부리통이라는 다소 퉁명스런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세개의 물통으로 이뤄져 있는데 과거에 성 북쪽 주민들의 식수원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걷는 즐거움을 이런 우연에서 다시 느껴본다. ▲ 연자방아석 역시 하나로마트 주차장 뒷켠에서 우연히 본 연자방아 돌이다. 옛것인지 새로 깎은건지 알 수가 없다. 왜 이곳 한구석에 버려진듯 놓여 있는지. 견물생심을 뒤로하고 부지런히 영주산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천미천 천미천은 영주산 앞과 정의현성 사이를 휘돌아 감듯 내달리는 하천이다. 그러나 하천이라 하기엔 물이 없다. 최근 상류에 성읍저수지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가둔 탓일게다. 폭이 족히 30미터가 넘어보인다. 지금은 바닥을 편평하게 깎아 놓았다. 예전엔 어떤모습이었을지 상상을 해본다. ▲ 영주산 영주산은 해발 326.4m 비고 176m의 말굽형 화산체
■동문 ▲ 복원된 동문 동문은 성의 세개의 문 중 가장 늦게 복원되었다. 바닥에 남아있던 주춧돌을 토대로 복원했다. 성문은 잠겨져있고 누각은 찾는이 없이 한가롭다. ▲ 동문 밖에 마주한 4기의 돌하르방 ▲ 예전의 정의현성 돌하르방 출처 제주100년,제주도 예전의 사진을 보면 성굽길 어귀에 돌하르방이 2기씩 마주보고 서 있다. ▲ 성의 동측 출입로 남문과 서문과는 달리 성문을 통해 출입하지 않고 복원전 성곽을 헐고 낸 길로 출입한다. ▲ 느티나무와 어우러진 동문의 누각 ■한봉일 고택 ▲ 한봉일 고택의 이문간 19세기초에 지어진 한봉일 고택은 동문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곽을 끼고 있다. ▲ 한봉일 고택의 이문간과 안거리 밖거리 한봉일 고택은 개조를 거의 하지 않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제주 남쪽지역의 가옥구조와 배치를 잘 보여준다고 한다. 잘 관리되어 단정
■정의 향교 ▲ 정의향교로 난 올레 정의향교는 안내문에 따르면 1408년에 홍로현(현재 서귀포시 서흥동)에 처음 세워졌다가 1420년 고성리로 옮겨졌다. 1423년 정의현이 이 곳 성읍리(진사리)로 옮겨 오면서 서문 밖에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849년에 지금의 장소에 다시 옮겨 세워졌고 1967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 대성전 내삼문 ▲ 정의향교 대성전 대성전의 현판은 제주향교, 대정향교와 더불어 한석봉의 글씨체다. 전에 소개했던바와 같이 전국의 대부분의 대성전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체로 되어 있다. '대성전에는 모두 5성(五聖) 22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데 공자를 주향으로 좌우에는 4성위(四聖位)[안자·증자·자사·맹자]가, 동·서벽에는 송조4현[宋朝四賢, 주돈이·정호·정이·주희]과 동국(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주돈이와 정이 양위(兩位)는 1982년에 봉안한 것이며, 대정향교와 마찬가지로 소설위(小設位
■원님물 ▲ 원님물. 원님물은 남문에 들어서서 10여미터만 가면 길 우측에 있다. 남문통 관청물이라고도 불렀다. '원님물은 식수로 사용하던 물통이다. 생수량이 풍부하지는 않았으나 천천히 솟았다. 성읍 인근에서는 가장 깨끗한 물이었다. 양이 적었으므로 서민의 사용을 금하고 관아에서만 사용하였으므로 원님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비가 쏟아지면 흙탕물이 가득찼다가 2~3일 후에 다 빠져나간다. 남문 쪽에 있어서 남문물이라고도 하고, 관갯물(관가물), 원님물통이라고도 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고상은 초가가 바로 앞에 있다.' 출처-고영철의 역사교실 아무런 설명도 표식도 없으니 보는이들은 무심코 지나가기 일쑤이다. 안내표지판 설치가 필요해 보인다. ■고상은 가옥 대장간집으로도 불리던 곳이다. ㄱ자 형태의 가옥구조이며 과거 대장간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문화적 가치가 크다. 아직도 주민이 거주하며 내부가 현대식으로 개량되었다. ■ 고평오 고택 이문간이 뚜렷하다. 밖거리는 예전에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325평의 넓은 대지에 안거
"성읍리는 세종 5년 (1423)년에 정의현의 읍치(邑治)를 성산읍 고성에서 지금의 자리(예전의 진사리) 옮겨와 형성된 마을입니다. 복원된 대정현성과 제주특유의 초가로 이루어진 유명관광지이며 제주의 역사와 정취가 잘 묻어나 있는 곳입니다." ■정의현성(정의읍성) ▲ 정의현성 남문 및 돌하르방. 정의현성(정의읍성)은 태종 16년(1416년) 제주를 1목 2현(제주목, 정의현,대정현)을 둘 때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에 축성한 읍성(옛 정의현성)을 7년만에 이곳으로 옮겨와 축성한 읍성이다. 그 후 1914년까지 약 500년간 정의현의 읍치(邑治)로서 그 기능을 하였다. 1984년 국가중요 민속자료 188호로 지정된 이후 성곽등의 보수 및 복원작업을 진행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성안에는 성읍민속마을이 들어서 있으며 읍성의 규모는 동서 약350m, 남북300m, 둘레 약 1200m이다.(※읍치-조선시대 지방 고을의 중심 공간) ▲ 1914년 지적도에 색을 입혀 표시한 당시 성곽과 길 1914년 지적도에 의하면 당시 치성을 포함한 성곽의 형태가
■온평리 도대 ▲ 도대 조형과 안내판 유감이다. 원래 있던 도대는 도로개설로 사라지고 새로 조성한 첨성대 모양의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의 설명으로는 사다리꼴 모양의 도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엉뚱하게 짝퉁 첨성대가 서 있다. 또 도대의 '도'는 입구를 뜻하는 제주어라고 한다. 도대 또는 도다이는 등대(燈臺)를 일본어로 도다이(とうだい, 灯台·燈台)라 한것이 도대, 도댓불이 된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 안내판이 틀린건지 내가 틀린건지 헷갈린다. 안내판이 너무나 자신있게 설명하고 있어서이다. ■신비스러운 물 쉼터 공원 ▲ 신비스러운 물 쉼터 전경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던 용천수인 솔베기물을 신비스러운 물이라하여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 꽤나 신경을 써서 아기자기하게 공원을 꾸며놓아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좋은 쉼터가 되어주고 있다. 잠시 앉아서 바닷바람 내음속에 온평마을에 내리는 햇살을 쬐어 본다. ■온평리 환해장성 ▲ 환해장성 ▲ 김승욱 온평리는 제주의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