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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시평] 해방정국 '백색테러'의 영혼 ... 4.3의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서북청년단이 온 이후 섬주민들과 육지에서 온 사람들간의 감정은 격화되었다. ··· 주민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총칼에 개의치 않고 떨쳐 일어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원인 없이는 행동도 있을 수 없다.”(동아일보 1948년 11월11일자)

 

세상이 미친 듯이 돌아갈지라도 역사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신문은 그래서 기록으로 전하는 역사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더욱 그 역사를 다시 짚어야 한다.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지 모를 일이 지금 횡행하기에 그렇다. 느닷없이 제주4·3 75주기를 맞아 제주란 무대에 등장하겠다는 ‘서북청년단’의 소식을 접하고 나오는 소리다. 무수한 양민들이 하루 아침에 제주란 공간에서 사라져버린 그 참혹한 비극을 추념하겠다는 시기에 나오는 황당무계다. 추념공간 어귀에서 그들이 집회를 열겠다고 한다.

 

그들은 누구인가? 지금 현존하는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은 2014년 9월 결성된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의 성과다. 그해 11월 28일 서울청소년수련관에서 서북청년단을 재건했다. "김구는 김일성의 꼭두각시였고 건국을 방해했다.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원 안두희가 김구를 처단한 것은 의거"라는 주장을 한다.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과 맞고소판을 벌인 극우세력이다.

 

그들이 재건한 서북청년단은 그래서 역사가 있긴 있다. 해방정국에서 서북청년단은 월남한 이북 청년들이 모여 만든 반공단체다. 1946년 11월30일 서울에서 결성했다. 극우 반공단체로 출발한 그들은 처음 ‘서북청년회’란 이름을 썼다. 북한 사회개혁으로 기득권을 몽땅 잃어 분노에 차 있었다. 식민지 시대 정치·경제적 권리를 모두 빼앗긴채 남하한 지주 집안 출신의 청년들이 주축이었다. 대한혁신청년회·함북청년회·북선청년회(北鮮靑年會)·황해도회청년부·양호단(養虎團)·평안청년회(平安靑年會) 등이 모여 서울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창단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의 성향에 맞게 경찰의 좌익색출 업무를 돕는 조력자로 나섰다. 좌·우익 충돌이 있으면 언제나 우직 진영의 선봉을 맡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하지만 그 시절 이데올로기는 사실 핑계이거나 구실이었을 때가 많았다. 정적을 제거하거나 상대 정파를 배격·제거하는 도구적 수단이었고, 서북청년단 역시 철저히 자신들의 세력화만을 추구했다.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되거나 아니면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고 판단하면 '공산주의자'란 탈을 뒤집어 씌워 무조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백색테러를 서슴지 않았다. 미군정(美軍政)은 이러한 서북청년단의 성향을 이용했다. 미군정의 명령에 대항하는 곳에 이들을 보냈다. 이들이 대거 제주에서 만행을 저질렀다는 건 정부의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조금만 살펴보면 충분히 기술돼 있다. “애국심을 확인하겠다”며 태극기를 강매하는 등 갈취와 약탈·폭행이 일상화되는 무정부 상태나 다름 없었던 것이 당시 제주사회다. 어찌보면 그들로 인해 1948년 4·3사건은 도화선이 됐고, 기름에 불을 붙인 격이 됐다. 오욕의 역사다.

 

 

4·3은 미군정과 친일 경찰, 그리고 극우 청년단의 백색테러가 횡행하자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던 제주 안으로부터의 반격과 더불어 빚어진 내전적 충돌이었고, 수많은 양민의 희생으로 귀결된 사안이다. 당시의 국제정세에서 빚어진 냉전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제주란 국지적 공간에서 준내전적 참화로 귀결된 사건이다. 정부의 과잉진압과 그 결과로 무고한 백성들이 숨져간 비극의 현장이었고, 그 시절 책임이 심대한 극우청년단체가 바로 서북청년단이다.

 

그들이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을 다시 정리한다. 4·3특별법이 규정하고 있는 4·3사건의 정의다. 이 법의 제2조에서 규정하고 있다.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기념시위 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무장봉기) 및 1954년 9월 21일(한라산 금족령 해제시기)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정부는 2000년 1월 4·3특별법을 제정해 당시의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에 들어갔다. 2003년 3월 진상조사보고서를 세상에 내놨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결과다. 그해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에 와 국가원수인 대통령으로서 당시의 참상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인 2014년 3월엔 제주 차원에서 치러지던 위령제를 격상, 국가추념일로 지정했다.

 

그런데 지금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은 “4·3은 김일성이 주도한 공산폭동”이라고 말한다. 그 시절 제주도민의 공분을 샀던 단체의 후신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 시절 상처를 헤집는 집회를 추모공간 옆에서 열겠다고 한다. 어느 정당은 4.3사건을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라는 현수막으로 거리에 내걸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경찰청이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지목했던 인사의 아들은 고교 기숙사에서 제주출신 학생에게 “빨갱이 제주출신”이란 입방아를 올렸다. 그 낙인을 벗어나고자 그렇게 오랜 세월 매달려 온 제주인들의 통한을 권력사회에선 그렇게 또 짓밟고 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인간이라면 이래선 안된다.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게 있다. 이런 식의 주장을 들고 나오면 ‘한국판 나치(Nazi)의 후예들’이란 명성을 얻을 수도 있다. 그 말은 즉 세계사의 흐름에서 저만치 뒤떨어진 ‘정신착란자’란 오명이다. 이 말을 듣기 싫으면 여기서 멈추라. 제주는 이제 더 이상 당하고만 살지 않을 분위기다. [제이누리=양성철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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