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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46) ... 4·3성과에 대한 '보수'의 몽니

4‧3특별법부터 문제 삼기 시작
제주4‧3이 오늘의 위상을 갖게 되기까지 많은 수난과 시련, 도전과 응전이 있었다. 4‧3진영은 2000년 4‧3특별법 쟁취를 시작으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법정보고서를 통해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란 새로운 규정 획득, 대통령의 사과, 국가기념일 지정, 화해와 상생이란 슬로건 개척 등 수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반해 일부 보수단체들은 이런 변화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면서 극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수구적 냉전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력은 과거 ‘공산폭동’으로 규정되어 지하에 갇혀있던 4‧3이 새로운 햇살을 받고 재조명되는 데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온갖 훼방, 폄훼활동을 전개했다.

 

그 시발은 4‧3특별법의 제정부터였다. 극우 보수단체들은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목적인 4‧3특별법 제정자체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대 사건으로 간주했다.

 

2000년 4월 6일, 보수 인사와 예비역 장성 출신 등 15명이 제주4‧3특별법이 위헌이라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이들은 “제주4‧3사건은 공산무장반란인데, 4‧3특별법은 가해자인 공산무장 유격대를 피해자인 경찰‧양민들과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위령토록 규정, 헌법의 자유주의적 기본질서를 위반하고 평등권 등을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위헌심판을 청구한 것이다.

 

‘악몽’의 대상인 서청·학련 출신이 앞장
이들 청구인들 중에 눈길을 끄는 사람들이 있었다. 4‧3 당시 서북청년회(서청) 중앙회장을 맡았던 문봉제, 전국학생총연맹(학련) 중앙위원장이었던 이철승, 박진경 연대장의 양자 박익주 씨 등이었다.

 

4‧3 당시의 서청은 제주도민들에게는 ‘악몽’으로 각인되어 있다. 백색테러를 일삼았고, 부녀자 겁탈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심지어 당시 제주도내 유일한 신문사인 ‘제주신보사’를 접수, 서청 제주단장이 신문사 사장 노릇까지 하지 않았던가.

 

미군은 제주 진압작전에 서청을 이용했다. 이승만 정권도 그런 서청을 지원했다. 4‧3 당시 서청 중앙단장이었던 문봉제는 이승만 정권 시절 교통부장관을 지내는 등 영화를 누렸다.

 

그 당사자인 문봉제 씨가 4‧3특별법이 위헌이라고 헌법소원에 나선 것이다. 그는 4‧3 진상규명이 사회문제로 부각되던 1989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제주에서의 진압은 미군정 하의 군인과 경찰이 한 것”이라고 발뺌했다. 그리고 “제주에서의 서청의 공과는 공반과반(功半過半)”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국회의원 7선 출신인 이철승 씨는 1970년대 DJ‧YS와 더불어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벌였던 인물이다. 그가 4‧3 당시 중앙위원장을 맡았던 학련 역시 제주도에서는 그 잘못이 회자되는 집단이다.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 자격으로 헌소 청구인에 참여한 그는 이에 앞서 2000년 3월 20일 한나라당 서울 광진을 지구당 개편대회에 참석, “4‧3특별법은 4‧3폭동을 정당화‧합리화시키고 폭동 주동자들을 명예 회복시키려 하는 법”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독자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웬 4‧3특별법 비난?’이라고 의아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발언은 바로 이 지역구에 출마한 민주당 추미애 의원을 겨냥한 것이었다.

 

박익주 씨는 육군 중장 출신이다. 제11‧12대 국회의원(민정당)도 지냈다. 그는 4‧3 당시 제주에서 부하에 의해 암살당한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양자이다. 그는 4‧3특별법이 제정되자 누구보다 앞장서서 반대운동에 나선 것이다.

 

이렇게 헌법소원심판 청구인 가운데 서청‧학련 관련자까지 참여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제주 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주시민사회단체협의회(상임대표 임문철‧김태성)는 그해 4월 10일 성명을 발표하고 “서청‧학련 책임자 등이 위헌소원을 낸 것은 학살 책임자들과 극우세력의 최후의 몸부림이자, 사건의 진상이 공개되면 그 반인륜적 죄악상이 만천하에 공개될 것을 우려하는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장성출신 모임인 성우회도 헌법소원에 가세
이런 논란의 와중에 2000년 5월 10일 예비역 장성 출신 모임인 성우회(회장 정승화)가 헌법소원심판 청구에 가세하면서 4‧3특별법의 위헌 논쟁은 더욱 확산되었다. 장성 출신 333명이 서명한 성우회의 헌소 청구서에는 “4‧3특별법은 청구인들의 기본권과 행복추구권 등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4‧3사건은 남로당이 1948년 한반도를 적화하기 위해 제헌의원 선출을 저지할 목적으로 일으킨 폭동임에도 특별법은 이를 합법화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파괴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국무총리 산하에 위원회를 둬 희생자의 심사결정, 명예회복, 호적 등재까지 자의로 할 수 있게 한 조항은 포괄위임 입법금지 원칙을 위배했다.”고 주장했다. 성우회는 특히 “특별법은 폭동세력과 국가공권력을 대등하게 위치시켜 공권력 행사의 적법성을 부인하고 있다.”면서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청구인 측 변호사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 10여 명에 이르렀다. 대법관 출신인 정기승, 국회의원 출신인 나석호‧이진우‧이택돈 변호사 등도 합류했다. 그 중에도 4‧3특별법 제정을 공박하는 『월간조선』 기고문의 파문을 일으켰던 이진우 변호사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변호사는 『월간조선』 2000년 2월호에 ‘제주4‧3특별법의 국회 통과를 개탄한다’면서 “국군을 배신한 대한민국 국회 - 국회는 공산게릴라에게 면죄부를 주고 국군과 경찰을 양민 학살범으로 정죄하였다”는 충격적인 글을 기고, 논란을 일으켰다.

 

청구인 측 변호사들은 준비서면을 작성하면서 4‧3특별법 문제의 출발점은 4‧3사태의 기산일을 1948년 4월 3일로 하지 않고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잡은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목적의식의 소산이며, 그 목적이란 적화통일을 목표로 한 공산주의 폭동에 대하여 조국의 광복을 위한 민족의 3‧1 저항운동과 같은 평가를 하기 위한 것”이란 색다른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에 맞서 행정자치부 고문 변호사인 배병호 변호사가 반론을 폈다. 정부나 국회, 4‧3진영까지 한편이 되어 청구인 측의 부당한 주장에 반박하는 논리를 폈다. 내가 소속했던 4‧3위원회 전문위원실에서 많은 관련 자료를 제공했다.

 

2000년 12월 8일에는 청와대와 국무총리실‧행정자치부‧법무부‧국방부 등 정부 측과 국회 측 관계관 연석 대책회의도 개최됐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두 가지 헌법소원 심판 청구를 병합 심리한 끝에 2001년 9월 27일 위헌심판 청구를 각하 결정했다.

 

이런 보수단체의 반발 분위기는 2003년 4‧3진상조사보고서 확정과 대통령 사과가 실현되면서 재연되었다. 그들은 “대한민국 정통성이 무너졌다”면서 다시 거품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보고서 통과 후유증 마라톤으로 극복
한편 4‧3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과 심의 업무에 매진했던 나는 이 무렵 묘한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대통령 사과라는 목표를 이루었고, 험난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이룬 꿈같은 일이었기에 보람도 컸다. 성취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2004년에 접어들면서 그 못지않은 허망함, 허탈감이 엄습해 왔다. 특히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던 순간, 4‧3진영과 일부 언론으로부터 받았던 예상외의 혹평, ‘정부 보고서가 아니다’란 서문 초안을 놓고 벌인 논쟁의 후유증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연극을 끝낸 배우가 무대 뒤에 멍하니 앉아있는 모습처럼 한동안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이제 뭐하지?” 스스로 자문하는 시간이 많았다. 이런 모습이 보기 딱했던지 영어자료 전담 전문위원인 장준갑 박사가 달리기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마라톤 마니아였다.

 

그게 인연이 되어 달리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그렇게 무겁던 몸이 연습량에 비례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한강이나 상암경기장 주변에서 달리기 연습을 했다.

 

그리고 10km, 하프마라톤에 이어 풀코스까지 뛰게 됐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전문위원과 조사요원, 지원단 공무원들도 함께 뛰었다. 42.195km를 달릴 때는 한없는 고통이 뒤따랐다. 그때마다 1988년 4‧3취재반 출범 때를 떠올렸다.

 

“우리가 4‧3을 다루면서 100m 단거리선수처럼 질주할 수는 없다. 그러다간 금방 쓰러질 것이다. 이 연재를 제대로 하려면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토너 같은 인내와 끈기가 필요할 것이다.”

 

젊은 기자들이 6월 항쟁의 열기에 힘입어, 4‧3의 성격도 ‘항쟁’에서 출발하자고 했을 때 내가 했던 말이다. 그리고 선입견을 갖지 말고,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하나 헤쳐가자고 설득했다.

 

그래서 꼬리표가 없는 ‘4‧3’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마라톤을 하면서 이런 생각에 미치면 고통이 오더라도 걷거나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2005년 동아국제마라톤대회에서 4시간 14분대의 기록을 세웠다. 몸이 날렵한 김종민 전문위원은 3시간 40분대를 주파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보수단체들이 4‧3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 사과를 폄하하고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한 것이다.

 

잘못 기록됐던 4‧3역사가 바로 정립되고 무고한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는 상황이 전개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보수단체의 반발과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의 방향성을 놓고 잠시 갈등하던 나에게 몸과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는 계기가 됐다.

 

제주도민을 ‘빨치산 협조자’로 매도해 공분
진상조사보고서 확정과 대통령의 사과 표명 직후에 보수단체에서는 이른바 ‘제주4‧3사건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대책위원회’란 단체를 결성했다.

 

4‧3에 대한 기존의 정부문서들이 왜곡됐다는 민원이 그치지 않아 특별법이 제정되고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이 추진된 것인데, 이번에는 역으로 4‧3진상조사보고서가 왜곡되었다면서 보수단체들이 ‘역사바로잡기 운동’을 벌이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 중심에 이선교 목사가 있었다.

 

2004년 3월 그들은 1차적으로 2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4‧3진상조사보고서의 왜곡과 불법성을 재조사하라는 진정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이 진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해 7월 20일 4‧3진상조사보고서와 이에 따른 대통령 사과를 취소해야 한다는 요지의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4‧3진상조사보고서 반대 서명운동을 벌여 확보한 185,689명의 서명지를 헌법재판소에 함께 제출했다. 그들의 집요함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이 헌법소원은 유기남(자유시민연대 공동의장)‧오형인(건국유족회 제주유족회장)‧이선교(백운교회 목사) 등 대표 6명과 43개 보수단체의 이름으로 제출됐다.

 

위헌심판을 제기한 이들은 4‧3특별법에 근본적 오류가 있고, 진상조사보고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시키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자신들의 행복 추구권, 양심의 자유, 재산권 등에 침해를 입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헌법소원 청구내용 중에는 적절치 못한 표현들이 그대로 나와 제주 도민사회의 공분을 샀다.

 

즉, “4‧3 당시 공산무장 유격대의 병력이 평균 19,900명에 이르며, 20,000명에 육박하는 빨치산들에게 7년이라고 하는 긴 기간 동안 양식을 공급해주어서 무력투쟁을 할 수 있게 해준 사람들은 제주도민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주장해 제주도민 전체를 빨치산 협력자로 매도했다.

 

헌소 참여자들 “내용 못보고 서명” 꼬리 내려
보수단체들은 더 나아가 “현 정부가 확정한 4‧3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의 사과 절대 인정할 수 없다”, “대통령과 정부는 4‧3사건을 무장봉기로 규정한 역사왜곡을 즉각 취소, 전면 수정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이런 헌법소원에 일부 제주도민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아무리 극우적 사고를 한다 해도 제주사람이면서 이 헌법소원에 참여한 것은 너무했다. 정말 제주사람 맞느냐”는 비난이 일었다.

 

제주4‧3유족회 등 4‧3 관련단체들은 2004년 7월 21일 성명을 통해 “제주도민은 너희들의 이름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결코 너희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 다음날인 7월 22일 헌법소원에 참여한 대한민국재향경우회 제주도지부(회장 김영중)와 대한민국건국희생자 제주도유족회(회장 오형인) 관계자들이 제주도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내용들 중에 부적절한 표현이 있다며 해명하고 나섰다.

 

그들은 제주도민들을 4‧3 당시 빨갱이를 도와준 부역자로 규정한 것 등 몇 가지 부분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명하고, “이로 인해 도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드린데 대해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사과 입장을 밝혔다.

 

그들은 이선교 목사가 제주에 내려와 헌법소원에 동참해 달라고 해서 참여한 것이지만 “헌소 내용을 보지도 않은 채 서명하고, 청구인과 전문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분명한 오류였다.”고 꼬리를 내렸다

 

그러면서도 4‧3진상조사보고서가 좌편향되고, 왜곡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 사과에 대한 헌법소원은 그대로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이들만이 아니라 전문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일부 제주출신 보수논객들도 자신이 동의한 바 없다고 부인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이선교 목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주도 4‧3사건에 대해 헌법소원을 하는 것인데, 제주도 사람들이 다 빠지면 누가 할 것이냐, 서울에는 4‧3을 연구한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내가 일방적으로 넣었다.”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이 목사는 문제된 내용들에 대해서는 “내가 작성한 것은 아니다. 이진우 변호사가 혼자서 쓴 것이다. 이 변호사는 현재 유럽에 가 있어서 연락이 안 되고 있는데, 연락이 닿으면 일부 내용을 수정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 목사 역시 헌법소원 자체를 포기할 생각은 결코 없다고 강조했다.

 

헌재, “헌법소원 대상 아니다” 각하결정
이진우 변호사는 4‧3특별법이 제정된 직후인 2000년 2월 『월간조선』에 “국군을 배신한 국회 - 공산게릴라들에겐 면죄부를 주고 국군을 학살범으로 정죄한 4‧3특별법”이란 매우 선정적인 기고문을 통해 4‧3특별법의 국회통과를 개탄한 바 있다.

 

한때 민정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그는 1999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가 “4‧3계엄령은 불법”이라고 보도한 『제민일보』를 상대로 3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할 때 원고 측 변호인으로 참여했다가 패소의 쓴 맛을 봤다.

 

그는 또 2000년 4월 보수 인사와 예비역 장성들이 4‧3특별법을 위헌이라면서 헌법소원을 제기할 때에도 변호인단으로 참여했다가 역시 패소했다. 이번엔 4‧3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의 사과가 위헌이라면서 4‧3과 관련한 세 번째 사법적 도전을 한 것이다.

 

이에 맞서 4‧3위원회는 행정자치부 고문 변호사였던 배병호‧정연순 변호사와 4‧3계엄령 불법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바 있는 제주출신 문성윤 변호사를 소송 대리인으로 위촉, 대응에 나섰다. 물론 4‧3위원회 전문위원실에서 청구인 측의 부당한 주장에 반박하는 관련자료를 제공했다.

 

2004년 8월 17일 헌법재판소는 이 헌법소원을 각하 결정했다. 헌법재판소 지정판결부(재판장 김경일)는 관여재판관 전원일치로 “청구인들이 제기한 헌법소원 청구는 헌법소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행위에 대한 위헌확인을 구하고 있으므로 부적법하다.”면서 각하 결정을 내린 것이다.

 

헌재, “보고서는 사건의 성격 기재된 것” 밝혀
재판부는 4‧3진상조사보고서에 대해 “4‧3특별법의 입법목적 수행에 필요한 근거자료 마련 차원에서 작성된 것으로 사건의 성격, 발생원인과 경과, 피해상황 등 진상조사 결과가 기재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대통령의 사과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국가 내지 정부를 대표하여 유족 등에게 제주4‧3사건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히면서 사건으로 인한 희생에 관한 의견과 감상을 표명한 것”이라면서 이는 헌법소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헌법재판소가 4‧3진상조사보고서에 ‘사건의 성격’ 등 진상조사 결과를 기재했다고 밝힌 점이다.

 

진상조사보고서 서문 작성을 둘러싸고 격한 논쟁이 벌어진 이후 “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는 애매한 내용이 기술됐지만, 사법부는 사건의 성격을 기재했다면서 그와 다른 견해를 표명한 것이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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