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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34) ... 가슴 졸이며 지켜봤던 국회통과 순간

   
▲ 1999년 12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4‧3특볍법안 통과를 선언하는 박준규 국회의장.

행자위·법사위는 무난히 통과

 

1999년 12월 13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산하 법안심사소위가 심의하여 만든 4‧3특별법 단일안(행자위 대안)을 일부 조문의 수정 끝에 통과시켰다. 4‧3특별법안이 중요한 관문을 또 하나 넘은 것이다. 이제 4‧3특별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의 의결 과정만 남게 됐다.

 

국회 행자위 심의 과정에서 행자위 수석전문위원(박봉국)은 4‧3특별법 발의안에 대해 “지난날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의 한 부분을 치유하려는 취지를 가진 것”이라고 평가하고, 이 법안을 심사할 때는 “사건의 진상에 대한 역사의식과 정책의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날 행자위 전체회의에서 한 조문이 수정됐는데, 그것은 행자위 대안에 ‘제주4‧3사건 백서 편찬’으로 표현됐던 것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으로 바꾼 것이다.

 

즉 정부 차원의 위원회에서 4‧3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게 됨에 따라 ‘백서 편찬’이란 용어보다는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이란 표현이 더 체계적이고 무게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돼 이를 수용한 것이다.

 

이 수정안을 제기한 사람은 국민회의 김충조 의원이었다. 전남 여수 출신인 그는 4‧3특별법 제정 이후 여순사건 관련 법 제정에도 이 내용이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4‧3진영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를 관철시켰다. 그를 설득시킨 이가 바로 4‧3범국민위 고희범 운영위원장이었다.

 

12월 15일 열린 국회 법사위에서도 4‧3특별법안은 무난히 통과됐다. 일부 조항에 대한 배열순서 등 가벼운 손질이 있었을 뿐이다. 이제 마지막 관문인 본회의 통과만 남게 되었는데, 당초 18일 개최 예정이던 본회의가 16일로 앞당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양정규 의원이 보수파 김용갑 의원 설득

 

아울러 불길한 소식도 들려왔다. 보수단체들의 강력한 항의가 한나라당 쪽으로 이어졌고, 보수단체의 입장을 대변해오던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이 4‧3특별법안의 본회의 통과 저지를 위해 총대를 멨다는 것이다.

 

4‧3진영은 비상을 걸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당 소속 제주출신 세 국회의원에게 그 대책을 촉구했다. 그 일에 양정규 의원이 앞장섰다. 당시 한나라당 부총재이던 양 의원은 이부영 원내총무 등과 협의를 거쳐 김용갑 의원을 설득했다.

 

그러나 김 의원은 자신의 입장도 있기 때문에 본회의에서 반드시 반대토론을 해야 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원내대책회의에서 반대토론은 하되 표결은 하지 않는다는 안으로 정리됐다.

 

운명의 날인 12월 16일이 다가왔다. 4‧3진영의 시선은 온통 제208회 정기국회 본회의로 쏠렸다. 오후 3시께 박준규 국회의장은 13번째 안건으로 4‧3특별법안을 상정했다.

 

제안 설명 나선 추미애 의원 간절히 호소

 

먼저 국민회의 추미애 의원이 단상에 나와 11개 조문과 부칙으로 구성된 4‧3특별법안에 대한 제안 설명을 했다.

 

“사건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피해자 규모조차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그동안 이 사건을 덮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죄 없이 죽어가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양민피해가 있었다면 이제 이를 조사하여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는 것이 역사를 승계한 후대의 의무일 것입니다(중략).

 

제주도민은 더 이상 기다리기에도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제주도민도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21세기를 맞을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각 당이 제주도민에게 이 법의 통과를 굳게 약속한 이상 그 신의를 저버리지 않도록 본 의원이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대구 출신인 추미애 의원은 훗날 이런 회고를 했다. 제주4‧3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 고심하던 자신에게 남편(서성환 변호사)이 절차법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조언해줬다는 것이다.

 

전북 정읍 출신인 남편은 그 무렵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재조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가 제주4‧3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기 전에는 어떻게 정의할 수 없는 만큼, 그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절차법을 우선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리고 국회에서 이념 대립이나 정쟁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차라리 정부 내에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 분위기를 완화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거들었다는 것이다. 추미애 의원은 그런 절차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제안한 것이다.

 

김용갑 의원 반대토론에 바짝 긴장

 

곧이어 예상했던 대로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이 반대토론을 위해 본회의 단상에 섰다. 국회 본회의장에 나가 있던 4‧3단체 관계자들이나 제주도의 4‧3연대회의 사무실에서 TV 실황중계를 지켜보던 연대회의 임원들 모두 침이 바짝 마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김 의원은 예의 공산폭동론을 앞세웠다. 그는 이어 “4‧3의 진압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제주도민이 있을 수 있지만 4‧3사건의 성격을 자의적으로 재규정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범죄”라고 열을 올렸다. ‘역사에 대한 범죄’라는 과격한 용어까지 썼던 그는 4‧3특별법안을 통과시켜선 안 된다고 강변했다.

 

그런데, 한나라당 원내대책회의에서 ‘반대 토론은 하되 표결은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기 때문인지 김용갑 의원은 발언대에서 내려오더니 곧바로 본회의장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박준규 국회의장이 “또 다른 의견이 있느냐?”고 묻자 약간의 웅성거림이 있었다. 박 의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이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며 의사봉을 힘차게 두들겼다. 이 때 국회 본회의장에 걸린 시계는 오후 3시 2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통과 순간 일제히 일어나 “만세”

 

그 순간 4‧3연대회의 사무실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TV 실황중계를 지켜보던 연대회의 임원들과 관계자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어떤 이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50년 맺힌 한을 풀 수 있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특별법 제1조)을 목적으로 하는 제주4‧3특별법은 이렇게 탄생됐다.

 

 

 

 

 

나는 4‧3특별법안의 국회통과 직후 ‘기적 같은 일’이라고 표현했다. 특별법 통과 과정에서 도저히 뚫기 힘들 것 같은 장벽에 여러 번 부딪쳤지만 그때마다 신기하게 실마리가 풀렸다.

 

특별법을 향한 역사의 톱니바퀴가 어느 것 하나라도 이탈했더라면 물 건너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절묘하게 극복해낸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은 손’이 도와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4‧3특별법 제정 작업은 뜻있는 제주도민들과 전국의 양심있는 인사들이 뜻을 모아 ‘쟁취해낸’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그 밑바탕에는 4‧3범국민위, 4‧3도민연대, 4‧3연대회의 등으로 상징되는 4‧3진영의 치열성과 헌신성이 있었다.

 

‘기적 같다’는 표현의 이유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담아낼 수는 없다. 필자가 ‘기적 같은 일’이라면서 ‘신기하게’ 느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정치적인 상황이었다. 우선 DJ정부의 탄생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국회는 여소야대 상황이었다. 만약에 여당인 국민회의가 먼저 4‧3특별법을 치고 나갔더라면 야당인 한나라당은 어땠을까? 또한 다수 의석을 갖고 있던 한나라당이 법 제정을 반대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데 4‧3특별법안은 오히려 그해 10월 11일 한나라당 제주출신 세 국회의원이 전격 발표하면서 시동이 걸렸다.

 

둘째는 대통령의 결단이다. DJ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4‧3특별법 제정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여당의 총선 전략에 의해 특별법 제정은 뒷전으로 밀렸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DJ는 4‧3진영 대표단과 극적 면담을 가진 청와대 민정수석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결단을 내려 특명을 내린 것이다. DJ가 “정기국회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는 대목에서 그 의지가 엿보였다.

 

셋째는 법안 제정의 속도다. 한나라당이 4‧3특별법안을 국회에 발의한 것은 11월 18일이다. 그리고 국민회의가 대통령의 특명으로 입장을 선회해서 특별법안을 발의한 것이 12월 1일. 이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이 12월 16일이니 한나라당이 처음 발의한 때를 기준삼아도 29일 만에 거둔 성과였다. 쟁점이 되는 법안이 이렇게 빨리 제정되기는 매우 드문 일이다. 법안 심의과정에서 혼선과 긴박했던 상황들이 있었지만, 법을 꼭 제정해야 한다는 한나라당 변정일 의원, 국민회의 추미애 의원 등의 의지와 열의가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게 했다.

넷째는 보수단체의 뒤늦은 반발이다. 4‧3특별법안에 대해 23개 보수단체들이 첫 반응을 보인 것은 12월 8일이다. 그들은 성명을 발표하고, 4‧3특별법안을 즉각 폐기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 시점은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여야 합의로 특별법 대안을 만든 이후였다. 결국 보수단체들은 뒷북을 친 격이다.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여당 원내총무 등이 4‧3특별법이 아닌 국회 4‧3특위로 밀고 갔던 것이 그들을 방심케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4‧3특별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각계의 환영 성명이 잇따랐다. 4‧3연대회의와 4‧3범국민위가 공동으로 환영 성명을 발표했고, 한나라당 제주도지부, 국민회의 제주도지부,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4‧3희생자유족회 등이 잇따라 성명을 발표했다. 지역 언론들도 “50년 맺힌 한 푸는 새 역사의 장 열다”, “특별법 제정은 도민의 위대한 승리” 등의 제목을 달고 대서특필했다.

 

제주도는 갑자기 잔치분위기로 들썩

 

4‧3특별법이 전격적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제주 도민 사회는 갑자기 기쁨과 기대감으로 출렁거렸다. 이념 문제로 알게 모르게 제주 도민들을 옥죄여왔던 4‧3을 국가 차원에서 진상규명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4‧3특별법 제정 운동이 시민사회단체 중심으로 한창 진행될 때에도 도민 대다수는 ‘과연 이뤄낼 수 있을까?’하는 시선으로 한발 물러서 있었다. 4‧3연대회의에서 벌인 특별법 제정 염원 서명 운동에 2,045명이 참여하자 그것을 ‘소중한 성과’로 여겼을 정도였다.

 

그러나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분위기는 고조됐다. 범도민적인 환영 행사를 개최하자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래서 4‧3특별법 제정을 기념하기 위한 ‘제주 도민 한마당’ 행사가 각급 기관장과 단체장, 도민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999년 12월 27일 제주시 신산공원에서 열렸다. 보름 전 보수단체들의 특별법 반대 책동에 맞서 비장한 마음으로 결의대회를 했던 곳이다.

이 행사는 제주도의회 주최, 4‧3연대회의 주관, 제주도와 4‧3위령사업 범도민추진위원회가 후원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억울한 영혼들에게 안식을, 도민들에게 희망의 새 천년’이란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는 칠머리당굿 기능보유자 김윤수 심방의 ‘초감제 굿’으로 막이 올랐다.

 

이어 연합풍물패의 ‘길트기’, 제주춤 아카데미의 ‘북춤’, 민요패 소리왓의 민요 공연, 민예총 음악분과의 노래 공연이 이어졌다. 또한 박재동 화백의 인물스케치 특별행사와 4‧3특별법 쟁취 거리행사에 참여했던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 초청공연도 펼쳐져 축제 분위기를 돋우었다.

 

4‧3연대회의 상임공동대표 임문철 신부는 개회사에서 “이제 4‧3의 갈등은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면서 “제주도를 생명이 무엇보다 중시되는 평화의 섬으로 가꾸어가자”고 말했다.

 

제주도의회 강신정 의장은 대회사에서 “4‧3특별법 제정은 온 도민의 위대한 승리”라며 “이제 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나 21세기를 자랑스런 번영의 길로 이끌자”고 역설했다. 이어 우근민 도지사, 변정일‧양정규 의원, 김창진 국민회의 도지부장, 조명철 4‧3위령사업 범도민추진위원장의 축사와 박창욱 4‧3유족회장의 감사의 말이 이어졌다.

 

이날 참석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사람은 국민회의 추미애 의원이었다. 추 의원은 4‧3특별법 제정에 대한 공로로 제주도로부터 명예제주도민증을, 제주도의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또한 4‧3연대회의는 헌신적으로 활동한 양동윤 기획단장에게 공로패를, 「4‧3은 말한다」 연재로 특별법 제정의 초석을 깔아준 제민일보 4‧3취재반 김종민 기자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이때 4‧3특별법 제정의 숨은 공로자인 강성구 씨가 성금 2백만 원을 쾌척해 두 사람에게 부상으로 전달됐다.

 

 

 

 

 

제민일보 기자들의 지지와 축하에 감동

 

한편 나는 4‧3특별법의 국회통과 다음날인 12월 17일, 4‧3진실규명을 위해 4‧3실록을 엮어내는 등 역사 바로세우기에 대한 업적으로 제주도문화상을 받았다. 제주도문화상 수상은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의 추천으로 이뤄졌다.

 

도의회 특별위원회가 문화상 후보자를 추천한 것도 처음이고, 4‧3과 관련된 업적으로 문화상 수상자를 선정한 것도 처음이어서 이래저래 화제가 되었다.

 

문화상을 수상하던 날은 4‧3특별법이 통과된 바로 직후여서인지 4‧3유족 등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았다. 특히 제민일보 기자들은 행사장에 나와 축하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날 저녁 편집국 전체기자가 우리 부부를 초대해 만찬을 베풀어줬다.

 

 

제민일보를 떠난 지 4개월만의 일이었다. 경영주는 4‧3연재를 오래한다고 나를 신문사에서 쫓아냈지만, 기자들은 오히려 그 해직의 부당함과 미안한 감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연대회의, ‘올해의 제주인’으로 선정되기도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제민일보가 1999년 ‘올해의 제주인’으로 4‧3연대회의를 선정한 일이다. 1990년 창간된 제민일보는 첫 해엔 소설가 현기영 선생을 선정하는 등 해마다 도민사회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개인이나 단체를 뽑아 ‘올해의 제주인’ 상을 시상해왔다.

 

그런데 1999년 수상자로 4‧3특별법 제정에 공을 세운 4‧3연대회의를 뽑은 것이다. ‘올해의 제주인’ 선정위원회는 “4‧3연대회의의 헌신적 노력으로 제주도민들이 50여 년간의 멍에에서 벗어나 희망의 새 천년을 맞이할 수 있는 역사적 계기가 됐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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