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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21) ... 발생원인이나 당국의 금기 역사도 비슷

1993년 4월 21일자 『제민일보』에는 “4‧3과 흡사한 대만 2‧28사건 / 46년 만에 보상금 152억 지급 결정”이라는 박스 기사가 실렸다. 로이터통신이 대만의 언론보도를 인용해 타전해온 짤막한 기사를 토대로 김종민 기자가 내용을 보충해 보도한 기사였다.

 

그러자 예사롭지 않은 반응들이 나타났다. 도대체 대만 2‧28사건의 실체는 무엇이며, 대만 2‧28사건이 제주4‧3과 닮은 점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보상까지 받게 됐는가? 하는 의문들이 꼬리를 이었다. 신문사에 문의전화도 잇따랐다.

 

나는 2‧28사건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자 보충취재를 하여 1993년 4월 24일자 『제민일보』에 ‘제주4‧3과 대만4‧3’이란 칼럼기사를 통해 2‧28사건을 소개했다. 그리고 중국 현대사 전문가를 수소문하던 중에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히는 리영희 교수(한양대)가 이 분야에 해박하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원고를 청탁했다.

 

그래서 그해 『제민일보』 창간 기념일인 6월 2일자 특집호에 “대만 2‧28사건 진상-제주4‧3의 거울”이라는 제하의 리 교수 특별기고를 싣게 되었다.

 

왜 대만2‧28은 제주4‧3과 흡사한가?

 

그렇다면 대만 2‧28사건은 무엇인가? 이 사건은 1947년 2월 27일 시작되었다. 1945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난 대만은 당시 중국 본토의 국민당 정권의 통치아래 있었다.

 

그런데 타이페이시에서 담배를 몰래 팔던 대만 여인을 본토 출신의 전매청 관리와 사복경찰보조원들이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대만인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경찰이 발포, 학생 한 명이 사망했다.

 

그 다음날인 2월 28일 대만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시위대가 시가지를 휩쓸었고, 일부 관공서 건물이 불탔다. 이에 맞서 정부군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사상자가 또다시 발생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시위대는 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했다. 이에 당황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3월 8일 본토에서 2개 사단의 군대를 파견하고 3월 10일 계엄령을 선포, 무력으로 진압했다. 무고한 사람 수만 명이 학살됐다.

 

그러면 무엇이 제주4‧3과 흡사한가? 첫째는 두 사건 모두 경찰의 무분별한 발포에서 촉발되었고, 누적된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점이다. 그 배경에는 섬 주민과 본토 출신 사이의 갈등이 깊게 깔려 있었다. 둘째는 이렇게 섬 주민들의 정치‧사회·경제적 불만이 표출되면서 시작되었지만 대만에서는 자치권의 요구로, 제주에서는 자주통일정부 지향이란 강한 정치상황으로 변전되어 갔다는 점이다.

 

셋째는 본토에서 파견된 진압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토벌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재판절차 없이 처형된 점도 닮은꼴이다. 넷째는 진압당국이 이 사건을 “공산당의 배후조정에 의해 일어난 반란”으로 규정하고 40년 가까이 금기시해왔다는 점도 같았다.

 

대만에서도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기 전까지는 2‧28사건에 대해서 말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였다. 대만은 장제스 총통에 이어 그의 아들 장징궈(蔣經國) 총통이 장기 집권하면서 독재정권체제가 오래 지속되었다.

 

민주화바람이 불면서 진실규명 박차

 

이 부자정권은 ‘반공’을 앞세워 38년간이나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에서 정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철권정치도 1988년 1월 장징궈 총통이 사망하면서 막을 내렸다. 대만에 민주화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상황과도 비슷했다. 3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군사정권도 1987년 6월 항쟁으로 무너지는 틈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에도 대만 못지않은 거센 민주화바람이 불었다.

 

다만 대만에서는 빠른 걸음으로 2‧28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와 명예회복, 기념사업, 희생자 보상까지 다다른 반면, 한국에선 4‧3와 같은 과거사 복원작업이 매우 더디게 진전되었다. 야권의 분열로 정권교체가 늦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대만은 장징궈의 사망 이후 리덩후이(李登輝)가 정권을 잡았다. 그 역시 보수당인 국민당 소속이었지만, 총통 자리에 오른 첫 대만출신인 점이 달랐다. 그렇지만 리덩후이도 집권 초기에는 조심스런 행보를 했다.

 

그는 2‧28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요구가 빗발치자 1988년 2월 “앞을 바라봐야지 뒤를 돌아봐선 안된다. 역사학자의 손에 맡겨야 한다.”며 슬쩍 발을 빼려 했다. 마치 한국에서 ‘4‧3을 역사에 맡기자’는 것과 너무 흡사했다.

 

그러나 한번 터진 물꼬를 쉽게 막을 수 없듯이 진실 규명을 향한 대만인의 욕구를 리덩후이 총통도 막을 수 없었다. 2‧28사건에 대한 대만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는 이런 진통을 거쳐 시작된 것이다.

 

리덩후이 총통은 1990년 11월 정부 산하에 2‧28사건 연구와 해결방안을 위한 전담기구 구성을 지시했다. 1991년 1월 정부 행정원(총리실) 산하에 ‘2‧28사건 전담 소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 기구가 1년여의 진상조사를 거쳐 1992년 2월 「2‧28사건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40만자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사건의 배경, 경위, 진압과정, 피해상황 등을 기록한 본문 2권에다 당시 관련자의 증언과 역사자료 등을 담은 방대한 분량의 자료집 10권으로 짜여졌다.

 

이 보고서는 정확한 사망자 숫자를 집계할 수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사망‧실종자가 1만 8천~2만 8천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 이전에 대만 군 당국이 밝힌 이 사건의 피해자는 사망 408명, 부상 2,131명, 실종 72명에 불과했다. 이 또한 제주4‧3의 경우와 비슷했다.

 

“유혈 진압의 주책임자는 장제스(蔣介石)”

 

대만 정부는 이 사건의 사후처리를 놓고도 주춤거렸다. 이 문제를 당면한 정치문제로 이끌어낸 세력이 바로 야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이었다. 소수의 반체제 인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진당은 오랜 투쟁 끝에 1986년 합법정당으로 인정받았다.

 

이 정당은 대만의 독립을 기치로 내세웠고, 합법적인 정치활동의 첫 목표로 2‧28사건 진상규명을 내세워 대만 원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이 1994년 타이페이 시장 선거에서, 2000년 총통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민진당은 1994년 2‧28사건 수난자 모임(유족회)을 적극 대변하며, 정부의 공식 사과, 책임자 추궁, 희생자에 대한 배상, 국가기념일 설정 등을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입법원(국회)에 ‘2‧28사건 처리 및 배상조례’를 상정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95년 리덩후이 총통이 공식 사과를 하게 된다. 2003년 4‧3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 표명은 이보다 8년이 늦은 것이다

 

또한 ‘2‧28사건 처리 및 보상조례’가 입법원을 통과했다. 다만 국민당의 반대로 조례 명칭은 ‘배상’에서 ‘보상’으로 바뀌었다. 이 조례는 수난자에게 1인당 최고 대만화폐 6백만원(한화 1억 8천만원)까지 보상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엄격한 심사로 보상금을 받은 수난자는 2,266명에 불과했다.

 

2‧28사건 50주년을 맞은 1997년 2월 28일 타이페이시 한복판에 자리잡은 ‘2‧28화평공원’에서는 기념식에 이어 ‘2‧28기념관’ 개관과 기념비 제막이 거행되었다. 대만 현지에서도 기념비 비문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었다.

 

주로 장제스의 책임문제와 사건의 성격에 관한 논쟁들이었다. ‘항쟁’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기념비에는 ‘2‧28기념비’로만 새겨졌다. 대만 현지 신문은 이를 ‘유비무문(有碑無文)’이라고 표현했다. 2008년에 개관된 제주4‧3평화기념관에 ‘백비(白碑)’를 설치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2000년 민진당 천수이볜이 정권을 잡은 뒤 2월 28일이 국가기념일로 정해졌다. 2014년 4‧3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것과 비교하면 대만 2‧28이 14년이나 앞선 것이다.

 

또한 천수이볜 정권 체제에서 2‧28사건의 책임문제에 대한 진상조사가 다시 진행되어 ‘유혈 진압의 주책임자는 장제스’로 결론을 내린 보고서도 나왔다.

 

과거사 청산, 집권자 성향 따라 달라져

 

덮여졌거나 왜곡됐던 과거사 재정리에 대한 세계의 흐름을 보면 이런 굴곡을 볼 수 있다. 주로 진보정권이 집권하게 되면 ‘정의로의 이행’이란 기치아래 과거사 청산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그렇다고 보수정권이라고 과거사 청산을 아예 외면하거나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정권을 잡은 사람이 누구인가에 다를 뿐이다.

 

나는 2006년 국무총리 소속 제주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의 수석전문위원으로서 4‧3중앙위원회 위원들과 대만 ‘2‧28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싸늘하고 딱딱했다.

 

그 이유를 알아본즉 타이페이 시장이 민진당 출신에서 국민당 출신으로 바뀌면서 기념관 운영체제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즉 종전에 재단법인 ‘2‧28사건 기념기금회’가 수탁 관리할 때에는 탄력성이 있고 활성화되었는데, 그 이후 타이페이시 문화국 직영체제로 전환돼 공무원들이 기념관 운영을 맡으면서 관료화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후 9년만인 2015년 4‧3평화교육위원장의 자격으로 대만을 다시 방문했다. 그런데 보수정당인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총통 체제인데도 2011년 2‧28국가기념관이 개관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앞의 2‧28기념관은 민진당 천수이볜 타이페이시장 시절 지방정부 차원에서 건립한 사업이라면, 후의 2‧28국가기념관은 국민당 정권 통치하에서 국가 차원에서 개관한 기념관인 것이다.

 

마치 대한민국 보수정당인 한나라당 이명박 정부 체제에서 과거사 청산이 후퇴했다면, 같은 정당 출신인 박근혜 정부 체제에서 4·3 국가기념일이 지정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앞으로 4·3 국가기념식 참석 여부가 과제로 남겨졌다.

 

이번에 만난 2‧28국가기념관 쇼밍쯔(蕭明治) 관장은 제주4‧3과 대만2‧28은 “국가폭력에 의한 사건”이란 점에서 유사하다고 말했다. 대만2‧28 연구자들도 자기네의 사건과 제주4‧3이 비슷하다고 보고 있다.

 

‘2‧28사건 기념기금회’는 2014년 허영선 시인이 쓴 『제주4‧3』을 중국어로 번역해 출간했다. 2‧28기금회는 책을 출간하면서 “대만의 2‧28사건과 한국 제주의 4‧3사건은 역사적인 배경과 국제적인 환경에서도 유사성이 매우 많다. 심지어 제주4‧3사건이 발생한 시기도 역시 1947년(4‧3이 1947년 3‧1 발포부터 시작됐다는 뜻)이다.”고 밝혔다.

 

특히 한국사 연구에 정통한 주리시(朱立熙, 대만 정치대) 교수는 자신이 가르치는 ‘한국정치 및 민주화’ 강좌에 제주4‧3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수업에 이번에 번역 출간된 『제주4‧3』을 교재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대만 현지에서 만난 주리시 교수는 “제주4‧3을 보며 2‧28을 생각한다”고 표현했다. 그는 2007년 제주를 방문했을 때, 공항 안에서 유해를 발굴하고 지질학자, 법의학자, DNA 전문가 등이 동원되어 신원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고 “나는 탄복했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글을 보는 독자라면 이런 느낌이 있을 것이다. 제주4‧3이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렇게 세계가 4‧3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과정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2‧28을 매개로 만난 리영희 선생

 

나는 대만 사건을 매개로 한국의 지성 리영희 교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93년 원고를 청탁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대만2‧28을 ‘4‧3의 거울’이라고 했다. 피해상황이나 강요된 침묵, 그리고 그 속을 뚫고 나온 진실규명과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 역사의 거울에 비춰보면, 대만2‧28이나 제주4‧3 같은 과거사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은 중앙정부의 수장이나 지방정부의 책임자가 어떤 성향의 인물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돌이켜봐도, 대만2‧28은 제주4‧3과 흡사하다. 사건의 배경과 진압과정도 그렇지만, 그 후의 전개된 진상조사, 국가수반의 사과, 기념사업, 재단 설립에 이어 국가기념일 지정까지도 닮았다. 다만 제주4‧3은 대만2‧28처럼 희생자에 대한 개별 보상이 이뤄지지 못한 점이 다를 뿐이다.

 

리영희(李泳禧) 선생은 한국 진보진영의 대부로 꼽힌다. 2010년 그가 눈을 감았을 때, 한국 언론은 ‘우리 시대의 스승’,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 ‘큰 언론인’이라는 별칭을 붙여 주었다. 프랑스 유력일간지 『르몽드』는 이미 그를 ‘사상의 은사’라 호칭했다.

 

그의 평생은 ‘반지성에 맞선 치열한 싸움의 역정’이었다. 근무하던 언론사와 대학에서 각각 두 번씩 해직되었고, 모두 다섯 차례 구속되었다. 그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1974), 『8억인과의 대화』(1974), 『우상과 이성』(1977)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가린 베트남 전쟁의 실체와 중국의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내며 당대의 대표적 금서로 탄압받았다.

 

하지만 1970~80년대 대학가의 필독서가 될 정도로 대학생과 지식인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라는 책 제목처럼 그는 반공주의의 허상을 깨뜨리고 오로지 진실과 균형의 날개로 이념적 도그마에 저항했던 것이다.

 

리영희 선생과 4‧3취재반과의 첫 인연은 1989년 『제주신문』에 연재했던 「4‧3의 증언」이 월간지 『사회와 사상』에 전재되었을 때였다. 『사회와 사상』 편집위원이었던 그는 지방신문에 연재되는 4‧3기획물을 전국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 월간지에 그대로 싣도록 적극 추천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때는 몰랐고, 나중에야 알았다.

 

두 번째의 인연은 바로 1993년 대만 2‧28사건에 관한 원고를 청탁하면서였다. 당시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였던 그는 기꺼이 이 청탁을 수락했다. “대만2‧28 대학살 진상-제주도4‧3의 거울(鏡)”이란 제목의 이 원고는 1만자에 가까운 장문으로 2면을 빼곡히 채웠다.

 

사건의 배경과 국민당 정부의 학살과 은폐, 진실규명 과정 등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대만 원주민이 50년간 섬긴 일본 식민경찰과 군대는 거칠었지만 규율이 엄했다. 그러나 새로 나타난 ‘동포정권’인 국민당 정권은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했을 뿐만 아니라 규율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집단이었다.

 

대만인들의 원한은 안으로 안으로 곪아 들어갔다. 조그마한 계기가 있으면 거대한 불을 뿜을 모든 조건이 갖춰진 상태였다.”는 글이 인상적이었다. 이 원고는 『4‧3은 말한다』 제4권에 부록으로 실렸다.

 

“「4‧3은 말한다」를 눈물로 읽는다”

 

이런 인연으로 리영희 선생과는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선생은 특히 한국전쟁 발발직후 통역장교로 복무할 때, 제주4‧3 학살에 관여된 제9연대에 근무한 경력이 있다면서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는 『4‧3은 말한다』 제4권에 실린 추천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1948년 제주도 민간토벌 명령을 거부하고 병란을 일으킨 경비대 제14연대를 우연히 대학생으로서 ‘여순반란’의 전화 속에서 만났고, 제주도에서의 악명을 지닌 채 개편된 국군보병 제9연대의 일원으로서 6‧25 민족상잔의 전쟁터를 가로질러 살아온 사람이다.

 

따라서 제주4‧3사건은 나의 청년기의 일부를 이룬다. 그러기에 나는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를 눈물로 읽는다.”

 

리영희 선생은 제주4‧3특별법 국회통과를 누구보다 기뻐했다. 2000년 1월 7일 보내온 엽서에는 “20세기에 저질러진 이 나라의 가장 흉악한 대학살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작은 노력인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특별법이 20세기가 저무는 날에 늦게나마 성사된 것을 함께 축하한다.”고 써 있었다.

 

그런데 선생은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져 오른쪽이 마비되었다. 그런 그가 2001년 8월 다시 엽서를 보내왔다. “우반신 마비로 자유롭지 못하지만 겨우 팔과 손이 조금 움직여 연말인사에 대한 감사를 전한다.”면서 “4‧3 일을 맡게 된 것을 축하하고,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큰일을 완주해 달라”는 요지의 글이었다.

 

얼마나 힘들게 쓴 글인지 그 자체가 감동이었다. 『리영희 평전』의 저자인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은 병중에 쓴 그의 글체를 ‘리영희 떨림체’라고 표현했다. 엽서에 그 떨림체로 써서 보내온 편지였다.

 

진보진영과 대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리영희 선생은 2010년 12월 5일 별세했다. 그의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엄수되었다. 전국에서 5백여 명의 장례위원이 꾸려졌고, 나도 말석에 끼어 그가 가는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는 광주 5‧18민주묘역에 안장됐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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