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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12) … 3‧10총파업 이후 미군정 탄압 노골화

1947년 3월 10일부터 경찰 발포에 항의하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나는 이 총파업 관련 자료를 취재하면서 그 규모와 참여 폭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주도청, 법원, 검찰 등 대부분의 관공서를 포함하여 166개 사업장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학생들도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상점은 철시되었다. 심지어 제주출신 경찰관 66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제주신보사에서는 3‧1사건 희생자 유족 조의금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신문사는 사고(社告)를 통해 “희생자들은 독립의 영광도 얻지 못한 채 천고의 원한을 남기고 무참히도 쓰러졌다”고 표현했다. “경찰서를 습격하려 해서 불가피 발포했다”는 경찰의 성명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의 글귀였다.

 

 

 

“좌우 공히 참가, 이념을 뛰어넘은 총파업”

 

당시 조선통신사가 발간한 『조선연감』에는 이 상황을 ‘조선에서 처음 보는 관공리의 총파업’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세계사에서도 매우 드문 민관 총파업’이라고 평가했다.

 

지역민이 이렇게 들고 일어난 동력은 무엇일까? 물론 파업의 배후에서 남로당 제주위원회가 조직적으로 기획하고 지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좌익이 선동했다고 해서 민관이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들고 일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군정경찰이 발포사건에 대한 사과는커녕 오히려 대대적인 연행 등 민심을 자극하자 극도의 공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군 정보보고서에도 “총파업에는 ‘좌‧우익 공히 참가’하고 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결국 ‘3‧10총파업’은 이념을 뛰어넘는 총파업이었다.

 

이 때 미군정청 특별감찰실장 카스티어 대령을 반장으로 한 중앙조사단이 제주에 와 있었다. 미군정의 기록을 종합하면, 총파업의 원인을 ‘경찰에 대한 반감’과 ‘이런 증오심이 남로당 제주도당의 대중선동에 의하여 증폭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군정,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

 

그런데도 미군정은 전자의 민심 수습책보다는 후자의 좌익 척결에 무게 중심을 두는 정책을 펴나갔다. “제주도 총파업이 남한 전역의 파업으로 퍼질 시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별도로 취급하고 있다.”는 미군 CIC 보고서가 미군정의 시각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 총대를 멘 사람이 바로 당시 경찰총수인 조병옥 경무부장이다.

 

내가 ‘조병옥’이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때 나의 기억은 이승만 정권과 맞서 싸우던 ‘민주투사’였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지병으로 미국 병원에서 운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어린 나이에도 애석해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4‧3취재하면서 다시 만난 ‘조병옥’은 전혀 다른 이미지의 인물이었다.

 

1947년 3월 14일 응원경찰 421명을 대동하고 제주에 온 조병옥 경무부장은 파업 관련자들을 적극적으로 검거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제주도 사건은 북조선의 세력과 통모하고 미군정을 전복하여 사회적 혼란을 유치하려는 책동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것”이라고 단정해서 사건을 왜곡시켰다.

 

경무부 2인자인 최경진 차장은 기자들에게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밝힐 정도였다. 이 무렵 미군정 보고서도 이와 유사한 시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미군정은 우익강화정책으로 제주도의 수뇌부를 전면 교체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제주도 군정관에는 강성파인 베로스 중령을 임명했다. 또한 경찰처사에 대한 항의 표시로 사표를 제출한 초대 지사 박경훈의 사표를 수리하고, 그 후임에 철저한 극우파인 한독당 농림부장 출신 유해진을 전격 임명했다.

 

신임 극우파 도지사는 서청 단원 대동

 

목민관으로 부임해야 할 신임 도지사 유해진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호위병으로 서북청년회(서청) 단원 7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 서청 단원들이 지사 관사 주변을 경비했다. 유 지사는 잠을 잘 때에는 권총을 옆에 끼고 잤다는 것이다.

 

나는 제주출신 경찰 간부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율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유해진을 ‘극우주의자(an extreme rightist)’라고 표현까지 한 미군 보고서를 찾아 읽으면서 그런 사람을 제주도지사에 임명한 미군정의 속셈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 지사는 부임한 뒤 관공리의 숙청 작업부터 손을 대었다. 총파업을 주도한 관리들을 찾아내 파직했다. 이런 숙청 작업은 도청만이 아니라 전 행정기관으로 파급되었다. 교육계에도 숙청 바람이 무섭게 불었다. 그러다보니 공직사회나 교단에 날로 빈자리가 생겨났다. 이런 공백을 서청 단원 등 육지부 출신으로 채웠다.

 

서청 단원 횡포도 제주 민심 자극

 

여기에다 민심을 더욱 자극시킨 것은 서청 단원들의 횡포였다. ‘자다가도 공산주의자라면 벌떡 일어나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인 서청 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왔다. 조병옥 경무부장이 서청을 적극 후원했다. 조 부장은 군정경찰만으로는 남한의 치안을 유지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보고 경찰 보조요원으로 서청 단원들을 적절히 활용했다.

 

그런데 문제는 서청 단원의 무보수 근무였다. 법에도 없던 경찰 보조기능을 부여하면서도 ‘생활은 현지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그러다보니 서청이 가는 곳마다 민폐가 컸다. 대표적으로 표출된 곳이 바로 제주도였다.

 

내가 만난 서청 단원은 그 점을 인정했다. 서울 서청 본부에서 ‘제주도에서 빨갱이들이 판치고 있으니 반공정신이 투철한 여러분이 내려가서 진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주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봉급도 없었고, 보급도 시원치 않았다. 겨우 일선 지서에 배속되어서 얹혀 사는 신세였다. 거리에 나가봐도 젊은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모처럼 도망가는 청년을 붙잡아 지서에 끌고 와 취조하다보니 다음날 돈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그 청년의 가족이 구명운동에 나선 것이다.

 

응원경찰이나 서청 작폐는 제주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안겼다. 존 메릴은 자신의 논문에서 4‧3 발발 이전에 응원경찰과 서청이 저지른 민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경찰의 봉급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뇌물을 받아 이를 보충해야 했다. 서북청년단원들은 정규봉급이 아예 없었으며 완전히 빈손으로 살아가야 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공공질서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제주도의 상황은 치안이 악화될수록 이 두 그룹에게 뇌물수수, 공갈, 보호명목의 갈취와 강도단과 유사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해 줬다.

 

테러와 보복테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경찰과 우익들은 반항하는 섬주민들에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잔인하게 대했다.”

 

일부 서청 단원들은 이런 식으로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자 부녀자를 겁탈하는 일도 자행했다. 4‧3 발발 이후 서청의 횡포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심지어 물자 보급문제에 불만을 품고 제주도청 총무국장을 연행해서 고문하다가 죽이는가하면, 신문사를 접수해서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는 작태도 서슴지 않았다.

 

4‧3 직전까지 2,500명 검속

 

1947년 3‧10 총파업을 물리력으로 제압한 미군정은 이렇게 총파업의 원인과 배경은 철저히 무시한 채 파업 관련자 검거와 탄압에 매진했다. 미군정은 제주도 문제를 오로지 이데올로기적 시각으로만 접근했다. 한 달 만에 검속된 사람이 500명으로 늘어났고, 계속적인 검거선풍으로 4‧3 직전까지 2500명이 수감됐다.

 

제주출신 관료들은 행정기관의 주요 요직에서 물러났다. 특히 경찰 쪽이 심했다. 파업에 동참했던 제주출신 경찰관 66명은 전원 파면되었다. 대신에 육지부 철도경찰 출신들이 대거 제주지역 경찰로 배속되었다. 이 무렵 제주지역 경찰 수는 500명으로 급증했다. 이는 불과 2년 전인 일제 말기의 경찰 수 101명보다 무려 다섯 배나 늘어난 것이다.

 

전통적으로 본토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제주인들과, 섬 주민을 경시하는 육지 출신 경찰‧서청 단원들은 물과 기름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서로 경멸했다.

 

1947년 3‧1 발포사건과 3‧10 총파업에 이어 우도 경찰파견소 피습사건(3월 14일), 중문 발포사건(3월 17일), 종달리 6‧6사건(6월 6일), 북촌 발포사건(8월 15일) 등 민중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잦아졌다. 백색 테러도 잇따랐다.

 

1947년 하반기부터는 중산간마을 곳곳에 이색적인 ‘마을 보초’가 생겨났다. 마을 주민들은 이들을 ‘빗개’라고 불렀다. 마을 보초는 ‘오름’ 꼭대기에 마을 안에서나 밭에서 잘 볼 수 있도록 장대를 세웠다가 경찰이나 서청 단원들이 마을 쪽으로 오는 모습이 보이면 그 장대를 쓰러트렸다. 그것은 곧 주민들에게 ‘피신하라’는 신호였다.

 

“넘쳐나는 유치장, 비좁아 앉지도 못했다”

 

1947년 12월 제주 미군 CIC는 의미심장한 보고를 한다. 그것은 “제주도의 여론은 만일 경찰이 빠른 시일 내에 정의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모든 조직들이 제주경찰감찰청을 공격하리라.”는 첩보였다. 극우파인 유해진 도지사를 암살해야 한다는 삐라도 나돌았다. 제주도민의 반미의식도 점차 수위가 높아갔다.

 

제주사회의 긴장감이 높아가자 미군정청은 넬슨 중령을 제주에 내려 보내 1947년 11월부터 1948년 2월까지 유해진 도지사와 제주도 군정청, 경찰 등을 대상으로 특별감찰을 실시했다.

 

이 감찰 결과 ‘10×12피트의 유치장 한 방에 35명이 수감됐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1피트가 30.48센티미터이므로 이를 평수로 환산하면 3.3평이 된다. 어린이 공부방만한 3.3평에 35명을 가두었다는 뜻이다. “유치장 안이 비좁아 앉지도 못하고 서서 생활했다.”는 수감자의 증언이 미군 감찰보고서에서도 입증된 것이다.

 

 

 

정치적 반대파의 탄압에만 몰두해온 유해진 도지사의 행적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넬슨 중령은 감찰 보고서를 통해 유해진 지사의 교체, 제주경찰에 대한 조사, 과밀 유치장 조사 등을 건의했다. 4‧3 직전에 이런 유화정책이 시행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딘 군정장관은 이를 전혀 시행하지 않았다.

 

1948년 3월 잇따른 3건의 고문치사

 

이런 상황에서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됐던 학생과 청년 등 3명이 고문치사로 숨지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해 제주사회가 요동쳤다.

 

조천지서에서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 김용철이 거꾸로 매달린 채 곤봉으로 매질을 당하다 숨졌다. 모슬포지서에서는 양은하 청년이 머리채가 천장에 매달린 채 고문을 당하다 절명했고, 금릉리 청년 박행구는 서청 경찰대에게 뭇매를 맞고 숨졌다.

 

 

 

 

4‧3취재반은 이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을 심층 취재했다. 특히 김용철 학생의 시신을 부검한 장시영 의사(전 제주도정 자문위원장)의 증언을 통해 경찰이 당시 검시의사를 회유 협박하면서 ‘지병에 의한 사망’으로 조작하려 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나는 조천지서에서 발생한 고문치사사건을 취재하면서 숨이 막히듯 답답함을 느꼈다. 고문치사를 일으킨 조천지서장(조한용)이나 이를 조사한 제주경찰서장(문용채)과 수사과장(성범용), 제주도청 보건후생국장(송한영)이 모두 이북 출신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사건은 제주 공직사회가 1년 만에 제주사람들이 퇴출되고 이북출신들로 채워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 사건의 검시의사로 참여했던 장시영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조천지서 고문치사의 피해자 김용철 학생을 두 번 부검했다는 것이다. 1차 부검은 건성으로 끝났다. 은밀하게 진행된 부검 장소에는 이미 경찰관들이 차지했고, 의사 면허증이 있는 송한영 국장이 “피의자는 원래 늑막과 폐가 나쁘고 맹장수술까지 받았다”는 등 자세한 병력을 설명한 뒤 배 쪽만 부검하도록 유도했다.

 

“지병으로” 조작하려던 경찰 음모 들통 나

 

그러자 이런 사실을 눈치 챈 유족 측에서 정확한 사인을 요구하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서 2차 부검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부검 차 조천에 갔을 때, 수많은 주민들이 신작로에 도열하고 있었다. 이미 소문이 퍼진 것이다. 특히 부녀자들이 “사인규명을 똑바로 하라!”고 윽박지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장시영 선생은 말했다.

 

두 번째 부검은 제대로 진행됐다. 머리 쪽을 해부해보니 피가 엉겨 있었다. 감정서를 쓰기까지 경찰 측으로부터 여러 형태의 회유와 압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용기를 내어 ‘타박에 의한 뇌출혈이 치명적인 사인’이란 감정서를 제출했다. 고문치사를 인정한 것이다.

 

그런 사실이 알려지자 조천지역에서 난리가 났다. 학생들이 조천지서로 몰려가 항의시위도 벌였다.

 

한편 경찰의 눈 밖에 난 의사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산으로 출항해서 그 곳에서 개업했다. 그래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6‧25가 나자 얼른 해군 군의관으로 지원, 군 복무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민심의 흐름’에 역점 두고 취재

 

나는 4‧3취재를 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민심의 흐름’에 대한 추적이었다. 취재 결론을 말하면, 남로당 등 좌파 측은 이런 민심의 흐름에 편승하거나 이를 이용‧선동했다면 미군정과 경찰은 이런 민심을 도외시하거나 묵살했다는 것이다.

 

4‧3을 다룬 관변자료에는 이런 민심을 자극한 고문치사사건 등은 아예 기록조차 안하고 있다. 최근에도 4‧3 폭동론을 주장하는 보수논객들은 이런 민심의 흐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남로당의 전략’에만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가뭄으로 바짝 마른 풀숲에는 성냥 한 개피의 불만 던져도 활활 타오르게 된다. 민심의 흐름도 같은 이치다. 특히 민중의 불만이 겹겹이 쌓여 있을 때에는 작은 바늘로 풍선이 터지듯 어떤 모티브가 있을 때 폭발하게 된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다가 행방불명된 김주열(고등학생)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학생과 시민들이 분노했고, 결국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되지 않았던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또 어떤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가운데 일이 터진 것이다. 박종철(서울대생)을 물고문하다 숨지게 하고도 이를 은폐하려던 경찰의 음모가 들통나면서 활화산처럼 타오른 6월항쟁의 불씨가 되지 않았던가.

 

설령 1948년 3월 제주도 경찰지서에서 잇따라 발생한 3건의 고문치사사건이 4‧3 발발에 직접적이거나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다고 해도, 긴장국면의 민심에 불쏘시개 역할을 했을 것이란 해석은 충분히 가능하다.

 

4‧3 발발 직후 현지 선무 활동 차 제주에 왔던 경무부 공보실장 김대봉(제주 출신, 제주감찰청장 역임)은 경무부 출입기자들에게 제주 사태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폭동 원인에 경찰도 과실이 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느 면에서 경관의 고문에 의한 치사사건이 있었고, 또 경찰이 청년단체에게 경관행세까지 방임한 것 등이 있었다.”

 

조천에서 이장(里葬)으로 김용철 학생의 장례식이 있던 날, 고인이 일개 중학생 신분인데도 제주도 전역에서 보내온, 애석한 죽음을 애도하는 수십 개의 만장이 나부꼈다.

 

모슬포지서의 고문치사 희생자 양은하의 장례 절차에는 대정면 지역 청년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의 시신은 모슬포 청년들이 광목까지 내놓아 서림까지 운구하면 서림 청년들이 다시 영락리 어귀까지 운구하고, 영락리 청년들이 다시 이어받아 고향집으로 운구하는 형식을 밟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역민들이 그들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고 분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진영에서는 이런 역사적 사실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일화도 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조천지서의 고문치사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보도한 이후 이를 반박하는 글이 발표됐다.

 

한 보수 논객이 자신의 4‧3 자료집에 ‘대공전문가 K씨의 글’이라면서 “고문치사를 당했다는 김용철은 현재 조천리에 멀쩡히 살아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내용을 재확인했더니 조천에는 ‘김용철’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 있었다. 대공전문가는 그런 사실도 확인하지 않은 채, 4‧3취재반의 허점을 꼬집을 구실을 찾아낸 양 소리만 높이다 체면을 구긴 것이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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