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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45)… 노무현 대통령, 유족들 앞에 고개 숙여

꿈 같은 ‘대통령 사과’ 현실로
2003년 10월 15일 4‧3진상조사보고서가 최종 확정되자 그 다음 화두는 대통령의 사과로 모아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미 대선 과정에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결과 국가권력의 잘못이 드러나면 사죄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또 대통령 취임 직후에 청와대 참모들에게 정부 차원의 입장 표명 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대통령 사과가 실현될 가능성은 높았다. 이 업무를 맡은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구체적인 작업을 하고 있음도 감지됐다.

 

제주4‧3에 대한 국가원수의 사과라는 꿈같은 목표가 현실로 다가서자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날 유족들과 만났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1988년 4‧3취재반장을 맡은 이래 많은 유족들을 만났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우리들에게 그들 유족들의 청원은 한결같이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옥죄는, 붉은 색으로 칠해진 이념적 누명을 벗기는 방안은 무엇일까.

 

우리 취재반은 이심전심으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그 결과를 토대로 국가의 사과를 받아내는 것으로 목표를 설정하게 됐다.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1997년 4월 2일 제민일보 4‧3취재반의 활동상을 국제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은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제주4‧3의 궁극적 문제 해결은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국가의 사과’에 있고, 4‧3취재반은 그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 이전에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 방안도 검토했었다. 그러나 재심 방안은 개개인이 신청해야 하는 사법적 절차 등으로 번거롭고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보수단체들 대통령 사과 막으려 안간힘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제주4‧3에 대한 정부 입장 표명이 임박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보수단체의 반발도 잇따랐다. 자유시민연대‧경우회 등 중앙 보수단체들이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인한 보고서에 의한 대통령 사과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건국희생자제주도유족회‧경우회제주도지부‧자유수호협의회 등 제주도내 12개 보수단체는 “내란을 은폐한 4‧3보고서 우리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면서 정부 차원의 입장 표명을 반대했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국방보좌관실 등 안보 파트에서 “과거 정권의 잘못을 왜 우리가 사과해야 하나”, “시기상조다”, “전례가 없다”면서 반대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내가 공직에 발을 디딘 후 곧잘 듣게 됐던 말이 “선례가 없다”, “전례가 없다”는 것이었다.

 

공직사회에서는 일의 추진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선례가 있는 것과 없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정부 조직에서 4‧3과 같은 과거사 업무를 하는 일이 처음이고, 과거사에 대한 정부 입장 표명 역시 역사상 처음 하게 되는 일이니 응당 마찰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외국 정상의 사과 조사해 보고
‘새로운 길’인 만큼 우리나라에선 참고할만한 자료가 없었다. 따라서 외국 사례를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하와이 합병 100주년을 맞아 하와이 원주민들에게 피해를 준 사실을 사과한 일, 1995년 대만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1947년에 발생한 2‧28사건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일이 있었다.

 

또한 199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400여 년 전의 신교도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한 일, 2000년 인도네시아 와히드 대통령이 1991년에 일어난 동티모르 양민 학살사건에 사과한 일 등 외국 사례를 정리해서 청와대에 제출했다.

 

한편으로 대통령의 사과 표명은 ‘법률적 행위’에 해당됨을 강조했다. 즉, 4‧3특별법 제3조 4‧3위원회의 심의사항 중에는 ‘제주4‧3사건에 관한 정부의 입장표명 등에 관한 건의사항’이 있다.

 

그 법적인 근거에 의해 4‧3위원회가 진상조사보고서의 결론을 토대로 4‧3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7개항의 대정부 건의안을 채택했으며, 그 가운데 맨 앞자리에 ‘정부의 사과’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청와대는 앞서 노 대통령이 4‧3사건에 대한 정부 입장 표명의 뜻을 밝혔기 때문에 관련된 준비를 해왔다. 정무수석실(수석 유인태)을 중심으로 한 준비 작업은 해외 사례 조사, 현지 여론 조사, 각계 원로 및 전문가의 의견 수렴 등이었다.

 

사과 전 현지여론, 전문가 의견 수렴
2003년 10월 12~13일 청와대 정무수석실 기춘 행정관과 정책수석실 박진우 행정관 등 관계관들이 제주를 방문, 여론을 수렴했다.

 

직접적 당사자인 4‧3유족회를 비롯한 4‧3관련 단체와 제주도의회, 경우회‧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의 사무실까지 직접 방문하며 관계자들을 접촉했다. 정부의 입장 표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것이다.

 

또한 4‧3에 대한 정부 입장 표명을 제주평화포럼(장소 제주신라호텔)에서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장소에서 할 것인지에 대한 검토도 진행됐다.

 

청와대 내 4‧3업무를 담당하는 정무수석실과 평화포럼 소관부서인 외교안보실, 그리고 정책수석실 관계관 연석회의에서 4‧3 입장 표명을 국제회의인 제주평화포럼에서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개진됐다.

 

제주도민의 참여 폭도 제한될 수 있고, 포럼 기조연설에 다른 의제와 함께 4‧3을 포함시켰을 때 분명한 메시지가 반감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그래서 ‘제주도민과의 대화’라는 별도의 행사 계획이 추진된 것이다.

 

청와대 실무팀에 의해 4‧3에 대한 정부 입장 표명을 국제행사인 제주평화포럼이 아닌 ‘제주도민과의 대화’라는 별도의 행사 방침이 결정되면서 장소와 참여 범위 등을 놓고 청와대와 제주도 간의 협의가 진행됐다.

 

4‧3평화공원에서 하는 방안도 검토됐지만 위령제가 아닌 대통령 참석행사를 야외에서 하는 데 문제 제기가 있었다.

 

대통령이 지방을 방문하여 해당 지역의 국민들과 만나는 통상적인 행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해방 전후의 엄청난 역사적 사건에 대해 대통령이 처음으로 공식 입장을 표명하는 행사였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 실무팀은 2003년 10월 31일 오전 10시부터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신라호텔에서 열리는 제주평화포럼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는 계획이 잡혀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동 동선을 고려해 제주시내에서 오찬 모임을 준비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장소 선택, 유족 참석 범위 등 제주도와의 의견 조율은 제주 출신인 청와대 정책수석실 박진우 행정관이 주로 담당했다. 많은 곡절과 논란을 거치며 도민과의 대화는 2003년 10월 31일 낮 12시 라마다프라자제주호텔에서 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연단이 없다니”… 강하게 어필
4‧3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이었던 나는 하루 전날 청와대 정무수석실 장준영 비서관, 기춘 행정관과 함께 제주에 내려와 라마다호텔 행사 현장을 둘러봤다. 그런데 연단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를 제기했고, 의전팀에 확인한 결과 “오찬 회동에서는 대통령께서 일반적으로 메인테이블에서 일어나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50여 년 동안 기다려온 4‧3에 대한 중대한 정부 입장 표명을 오찬 형식의 모임에서 하는 것조차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 터에 연단까지 없다는 말을 듣고 강하게 어필했다.

 

동행했던 정무팀도 같은 의견을 개진해서 연단이 마련됐다. 나는 더 나아가 대통령이 연단에서 자유발언이 아닌 준비된 발표문을 읽는, 격식을 갖춘 형식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날 저녁에 청와대 정무팀과 나는 4‧3단체 관계자들과 만나 의견을 교환했다. 여러 이야기들이 오간 자리에서 박경훈 화백이 유족을 배려하는 자세가 중요함을 유독 강조했다.

 

그래서 메인테이블에 여든 두 살의 유족인 임복순 할머니(구좌읍 김녕리)를 앉게 하는 방안이 전날 밤에 전격 결정됐다. 다음날 보니 임 할머니가 메인테이블에 앉았고, 이성찬 유족회장이 양보해서 옆 자리로 옮긴 모습이 보였다.

 

여기까지는 형식 문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발표문 내용과 수위였다. 청와대 실무팀은 이에 대해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보수단체의 반발도 있었지만, 대한민국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과거사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발표하는 사안이어서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 사례도 연구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4‧3특별법과 4‧3진상조사보고서, 4‧3위원회의 건의에 근거해서 문제를 풀기로 방침을 정했다.

“저는 이번에 제주를 방문하기 전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하여 각계 인사로 구성된 위원회가 2년여의 조사를 통해 의결한 진상조사 결과를 보고받았습니다. 위원회는 이 사건으로 무고한 희생이 발생된 데 대한 정부의 사과와 희생자 명예회복, 그리고 추모사업의 적극적인 추진을 건의해 왔습니다.”

 

대통령의 발표문이 이렇게 시작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발표문은 발표 시점까지 철저히 베일에 가려 있었다. 발표문 초안은 청와대 실무팀과 우리 전문위원실이 사전 협의했다.

 

그 뒤에 4‧3위원회 위원인 신용하(서울대)‧서중석(성균관대) 교수와 김삼웅 주필(대한매일), 현대사 전문학자인 안병욱(가톨릭대) 교수 등의 자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발표 당일까지 어떻게 최종 정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초안이 위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청와대 관계자 등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오타가 발생하기도 했다.

 

즉 “한반도의 평화, 나아가서 동북아와 세계평화의 길을 열어나가야 하겠습니다.”라는 문장 중 ‘세계평화’가 ‘세계화’로 잘못 유인된 것이다. 노 대통령도 이 부분이 이상했던지 사과문 발표 때 “세계 (잠시 멈칫 하다) 화”라고 말했다.

 

대통령 프리토킹할까봐 전전긍긍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31일 제주평화포럼에 참석한 뒤 라마다호텔로 자리를 옮겨 4‧3유족 등 제주도민 4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단에 올랐다.

 

그에 앞서 대통령 전용차에 동승한 유인태 정무수석은 대통령에게 이 사안이 중요하기 때문에 프리토킹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그 무렵 프리토킹을 좋아해서, 때로는 보수언론의 표적이 되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유 수석은 훗날 필자와 만났을 때 “중문 신라호텔에서 출발할 때, 이동 도중에, 라마다호텔 도착 직전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이 연설문은 꼭 읽으셔야 합니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했고, 그때마다 대통령께서는 ‘알았다’고 답변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연단에 오른 노 대통령이 발표문을 보지 않고 예의 자유발언으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순간 긴장했지만 마음을 졸인 시간은 매우 짧았다.

 

“내년쯤 4‧3기념식 때 입장 발표를 생각했는데, 한편으로 보면 제주도민들 마음도 급하고 그때는 선거(총선)가 임박하게 된 시점이어서 적절치 않은 듯싶어서 오늘 4‧3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공식으로 표명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국가권력 잘못 사과”에 눈물의 환호
“저는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4‧3에 대한 분명한 사과 메시지를 발표했다. 대통령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궁금해 하던 4‧3유족 등 참석자 400여 명은 그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이곳저곳에서 “고맙습니다”란 환호가 터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필자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노 대통령은 이어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고 밝혔다. 또 열렬한 박수가 나왔다. “정부는 4‧3평화공원 조성, 신속한 명예회복 등 위원회의 건의사항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박수가 터졌다.

 

 

노 대통령은 “이제 우리는 4‧3사건의 소중한 교훈을 더욱 승화시킴으로써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확산시켜야 하겠다.”면서 “이제 제주도는 인권의 상징이자 평화의 섬으로 우뚝 설 것”임을 선언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받는 박수다”
제주도가 세계적인 ‘평화의 섬’이 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박수는 10여 차례 이어졌다. 박수가 계속되자 노 대통령은 “사실 4‧3특별법은 국민의 정부 시절에 김대중 대통령이 마음먹고 만든 법이다. 그래서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있다. 제가 오늘 받은 박수는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받는 박수로 생각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날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노 대통령의 용단에 의해 발표된 이 한마디의 사과가 반세기동안 유족과 제주도민들을 짓눌러 왔던 이념적 누명과 불명예를 한꺼번에 씻어 내리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20여 년 동안 4‧3 진실찾기를 해왔던 필자에게도 그 날은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물론 4‧3특별법이 기적적으로 통과하던 날, 4‧3진상조사보고서가 우여곡절을 겪어가며 어렵게 통과한 순간도 잊지 못할 감동이었지만 그 가운데도 으뜸은 단연 대통령이 사과하던 그 순간이다.

 

대통령의 발표 직후 이성찬 4‧3유족회장은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해 대통령께서 진심으로 사과해 주신데 대해 매우 감사하다.”면서 다시금 박수를 유도했다. 그는 이어 “55년 한이 이제야 풀리는 것 같고, 오늘 이 기쁜 소식을 아버님 영전에 보고 드리겠다.”고 밝혀 장내를 숙연케 했다.

 

대통령의 사과 중앙언론의 빅뉴스
과거사에 대한 대통령의 첫 사과는 제주언론뿐만 아니라 중앙언론의 빅뉴스가 됐다. 중앙지들은 사과 내용만이 아니라 대부분 ‘대통령 사과의 의미’란 해설기사를 실어서 심층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정부수반의 과거사에 대한 사과 발언은 우리로선 사상 처음인데다, 세계사에서도 드문 역사의 한 페이지에 획을 그었다.”고 평가했다.

 

『경향신문』은 “과거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무고한 양민희생을 현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인정하고, 잘못된 역사에 대해 반성을 표했다는데 의미가 있고, 정부의 연속성이라는 차원에서는 55년간 제주도민들에게 씌워진 멍에를 벗기고 불행한 사건에 역사적인 매듭을 지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동아일보』는 “그동안 ‘좌익세력의 반란 진압을 위한 정당한 공권력 행사’라는 기존의 사건 성격 규정을 정부차원에서 재해석했다는데 의미가 있는데, 반세기 동안 가려있던 무고한 양민의 희생을 공식 인정한 내용이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보수단체의 반발을 예로 들며 “그러나 이 사건의 성격 규정을 둘러싼 논란은 쉽게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토를 달았다.

 

『한겨레신문』은 ‘55년 만에 정부 사과 받은 제주4‧3사건’이란 제하의 사설을 통해 “군사정권이 끝나고 정부와 민간, 제주도민들의 노력으로 역사적 진실과 실체를 밝히려는 노력이 열매를 맺었다.”면서 “또한 반성하는 역사를 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제주평화포럼에 참석했던 외신 기자들도 제주4‧3과 대통령의 사과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CNN 서울특파원 손지애 기자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4‧3이라는 역사적 배경 때문이라도 제주는 ‘평화의 섬’을 추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단체들은 이와는 다른 입장이었다. 대통령의 사과에 심한 불만을 드러냈다. 급기야는 헌법재판소에 4‧3진상조사보고서와 이에 따른 대통령 사과를 취소해야 한다는 요지의 헌법소원을 제기한다. 그들의 닫힌 마음은 반백년 유족의 한을 풀어주는 대통령 사과마저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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