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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43) ... 4·3진상보고서 조건부 확정 이후

진보·보수 막론하고 중앙언론 크게 보도
2003년 3월 29일, 비록 “6개월 동안 수정의견을 받는다.”는 조건부 단서가 달렸지만, 4‧3위원회에서 진상조사보고서를 채택하자 중앙언론들이 일제히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중앙지들은 4‧3사건 발생 55년 만에 정부 차원의 첫 종합보고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특히 국가공권력에 의한 주민 희생 등 인권침해 여부를 규명하는데 역점을 뒀다는 점에서 평가받고 있다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3월 31일자 『한겨레신문』은 “해방공간에서 이념갈등이 개입된 유혈사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첫 공식보고서라는 의의를 지닌다.”, 『중앙일보』는 “국가공권력에 의한 불법사건으로 규정했다”, 『동아일보』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으로 규정했다”고 보도했다.

 

또 『경향신문』은 “4‧3 와중에 희생됐다는 이유로 ‘빨갱이’이라고 손가락질 받아온 희생자 유가족들의 반세기 신원을 해주려 했음을 명확히 했다”, 『한국일보』는 “희생자 유가족의 신원을 위해 정부가 과오를 인정하는 사과를 하도록 노무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각각 보도했다.

 

진보‧보수 성향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중앙지가 진상조사보고서 채택을 비중 있게 다룬 것이다. 그 중에서 눈길을 끈 보도는 보수언론의 대표 격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신동아』의 대서특필이었다.

 

두 매체의 관련 보도기사 중 공통적인 표현은 ‘단독입수’라고 표기를 한 점이다. 물론 진상조사보고서 전체 내용은 그때까지도 ‘대외보안을 요하는 사항’으로 다뤄졌다. 심의과정의 불가피한 조처였다.

 

4‧3위원회는 진상조사보고서 채택 직후 보도자료를 통해 보고서 주요골자와 대정부 건의안을 설명했고, 보고서 전체내용은 수정‧유인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1개월 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보고서가 정식 채택되면서 적지 않은 기자들이 4‧3위원회 위원 등을 통해 보고서 내용을 입수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두 언론은 특집으로 이 내용을 다룰 의도에서 ‘본사 단독입수’란 표현을 쓴 것 같다.

 

“3만명 희생”…조선일보 이례적인 보도
3월 31일자 『조선일보』는 중앙일간지 중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해 진상조사보고서 관련 보도를 했다. 이례적으로 보고서 조사결론의 전문(全文)까지 실었다. 큰 제목도 “최대 3만 명 희생…47년 3‧1절 발포사건이 도화선”이라고 적절하게 달았다.

 

종전에 ‘공산폭동론’에 비중을 두어 4‧3에 접근하던 태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비틀기도 없었다. 또한 박스 기사를 통해 진상조사보고서의 4‧3사건 성격 규정, 공권력의 잘못, 피해자 수, 대정부 건의안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평소의 『조선일보』 보도 성향과 비교해 봤을 때 그때 왜 그런 보도를 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유추 생각하면 『월간조선』 소송 사건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2002년 3월 4‧3유족회 당시 이성찬 회장 등이 『월간조선』을 상대로 명예훼손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월간조선』 2001년 10월호는 여순사건을 다루면서, 제주4‧3사건에 대해 “북한의 명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보도했다. 1989년까지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그런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으나, 잘못됐다는 지적에 따라 교과서에서 삭제된 내용이었다.

 

4‧3 유족들이 이에 발끈하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월간조선』이나 『조선일보』가 4‧3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를 계속 해왔기 때문에 제동을 건다는 의도도 있었다. 이런 소송 제기가 주효했는지 조선일보 측의 4‧3 보도는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신동아, ‘양민학살 진상’ 특집기사로 다뤄
한편 2003년 5월 1일자로 발행된 월간지 『신동아』는 한 술 더 떴다. “그간 ‘남로당 무장봉기’에 가려졌던 군‧경 및 우익단체의 양민학살 진상이 밝혀졌다. 진상조사보고서 전문을 단독입수, 피로 얼룩졌던 광기의 역사를 고발한다.”는 글로 시작한 특집기사는 보고서의 조사결론 전문뿐만 아니라, ‘피해상황’의 주요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진상조사보고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정부 보고서로는 이례적이다 싶을 만치 피해상황이 세밀히 기록돼 있다. 피해상황은 보고서 총 540쪽(자료편 제외) 중 169쪽의 분량으로 실려 있는데, 주로 체험자들의 증언들로 엮어졌다. 4‧3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그런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동아』가 이 대목을 주목한 것이다. 정부 보고서에 이런 시시콜콜한 피해내용을 일일이 기록할 수 있느냐고 문제 제기할 수도 있는 사안인데, 오히려 이것을 중요하게 여겨 상당 부분을 발췌, 소개했다.

 

특히 그 가운데는 토벌대에 의한 피비린내 나는 학살극뿐만 아니라 잔혹한 성적 가해상황도 있었는데, 그걸 그대로 보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보도한 『신동아』의 대표 제목은 “피가 튀고 살이 찢긴 광란의 살육극…2만5000 생죽음 육성증언”이었다.

 

돌이켜보면, 4‧3진상조사보고서는 그 후 극단적인 보수세력으로부터 헌법소원, 행정소송 제기 등 숱한 시련과 도전을 받았다. 그런데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피해상황’ 기록이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생각이나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피해 기록을 보면서 4‧3문제를 이념논쟁으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제주지역 방송이나 신문들도 이 사안을 크게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저마다 특집기획을 연재했다.

 

『제민일보』는 ‘4‧3을 일구는 사람들’ 기획연재를 통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기까지 헌신했던 사람들과 진상규명의 역사를 소개했고, 『제주일보』는 ‘4‧3사건 진상보고’란 타이틀로 보고서 내용을 중심으로 주요 사안에 대해 재구성을 했다. 『한라일보』는 ‘4‧3 진상보고서 채택 이후’란 기획연재를 통해 남은 과제를 시리즈로 점검했다.

 

노무현 대통령, 조건부 의결에 입장표명 미뤄
2003년 3월 29일 4‧3위원회에서 4‧3진상조사보고서를 조건부 의결한 상황을 청와대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그해 4월 3일 일정을 비워놓았다. 이를 두고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4‧3위령제에 참석하는 것이냐는 관측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앞서 전국 대학교수 255명, 문화예술인 258명, 천주교 제주교구 정의구현사제단, 제주도내 28개 시민사회단체가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노무현 대통령의 4‧3위령제 참석을 공식 요청했다.

 

나는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 청와대 과거사정리정책보고서T/F가 추진한 『과거사정리정책보고서』 작성 작업에 감수위원으로 참여한 바 있다. 정권 말기에 보수언론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받던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가 했던 일을 역사적으로 평가를 받자”면서 백서 발간을 지시했다.

 

『과거사정리정책보고서』 작성도 그 일환으로 추진됐다. 나는 그때 제주4‧3뿐만 아니라 과거사에 관련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록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노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과거사 청산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그 맨 앞자리에 제주4‧3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4‧3에 대한 정부 입장 표명의 뜻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진상조사보고서 채택 이전인 2003년 3월 21일 열린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였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시점이었다.

 

대통령의 어록을 보면, 그 이전에 시민사회 대표들과의 면담 때, 개별적으로 만난 원로 역사학자(강만길 상지대 총장 등)에게 제주4‧3에 대한 정부 입장을 어느 수준에서 표명하는 것이 좋은지 판단해 달라고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는 청와대 참모들에게 “(그 표명이) 내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대리해서 의사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맥락에서 법적 성격 등을 잘 판단할 것”을 지시하고 “4‧3위원회의 판단 결과에 따라 공식적인 입장으로 표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 줄 것”을 주문했던 것이다.

 

노 대통령은 대선 공약을 지키기 위해 4‧3위원회가 진상조사보고서를 채택하면 그 결과에 따라 그해 4월 3일 제55주년 4‧3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 정부의 입장을 표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진상조사보고서가 6개월의 시한을 둔 조건부로 통과되면서 무산됐다.

 

노 대통령은 3월 31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위령제 참석문제를 논의했다. 노 대통령은 유인태 정무수석으로부터 4‧3위원회가 6개월 이내에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면 보고서를 수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진상보고서를 채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노 대통령은 이에 “다른 어떤 사건보다 무거운 사안이고 역사적 평가인 만큼 보고서를 통해 사실을 재확인하고 의미를 재평가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면서 “국가차원의 입장 표명은 내년 4‧3사건 추모식에 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회의 결과는 송경희 청와대 대변인에 의해 공식 발표됐다.

 

“보고서 마무리되는대로 입장표명” 약속
노 대통령은 그해 위령제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4월 2일 4‧3위원회 민간인 위원들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 회동을 갖고 위로의 뜻을 밝혔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고건 총리가 4‧3위원회에서 의견을 조정해서 진상조사보고서를 만장일치로 조건부 의결했다고 보고하자 노 대통령은 “위원들 간 견해와 관점이 달라 결론내기 어려웠을 텐데 만장일치로 합의를 이끌어낸 것도 역사적 성과”라고 평가하면서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만장일치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며 고건 총리를 우회적으로 질책했다.

 

그 자리서 유족 대표인 박창욱 위원은 “4‧3유족들은 대통령님의 위령제 참석을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재차 참석을 요청했고, 김삼웅 위원은 “정부 입장 표명을 내년 4‧3위령제 때 하는 계획은 바로 총선과 맞물려 정치적인 논쟁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면서 “서양 속담에 선행은 하루라도 빨리 하는 게 좋다는 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노 대통령은 “미처 총선은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내년 4월 3일에는 반드시 제주를 방문할 것이며 그 이전에라도 진상보고서가 마무리 되는대로 국가적 입장을 표명할 것”이라고 수정의견을 밝혔다.

 

그날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사 정리의 의지를 확고하게 밝혔다. 그는 우리 현대사에서 4‧3과 유사한 비극적인 사건이 많은데, 임기 5년 동안 끝내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시작해야 되지 않겠냐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언급했다.

 

대통령은 “기왕에 총리실에 기구가 있으니까 4‧3 진상규명이 마무리 되는대로 총리와 4‧3지원단에서 다른 과거사 정리를 어떻게 풀 것인지에 대해서 구상의 초안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총리실 등에선 이 발언을 간과한 것 같다. 우리 전문위원실에도 이와 관련된 아무런 시달이 없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그로부터 1년 4개월 뒤인 2004년 8월 17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앞서 지시한 내용을 상기시키면서 그 뒤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때는 국무총리가 고건에서 이해찬 총리로 바뀐 때였다.

 

조건부 의결한 총리 위령제 입장 반대 시위도
2003년 4‧3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고, 대통령이 처음으로 4‧3위령제에 참석해서 국가차원의 사과를 한다면 그야말로 반세기 이상 맺힌 한을 푸는 역사적 사건이 될 터였다. 그런 꿈같은 이야기가 바짝 현실로 다가왔다.

 

4‧3유족은 물론이거니와 제주 도민사회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 진행상황을 지켜봤다. 제주도는 이런 고무된 분위기를 극대화하기 위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시 봉개동에 마련된 제주4‧3평화공원 조성예정 부지에서 기공식을 갖는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런데 진상조사보고서 조건부 의결과 대통령의 위령제 참석이 1년 연기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실망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의식한 듯, 4월 2일 4‧3위원회 민간인 위원들을 청와대로 초대해서 위로의 회동을 갖는 한편 위령제에는 정부를 대표해서 고건 국무총리와 김두관 행정자치부장관이 참석하도록 조치했다.

 

1989년부터 4‧3위령제가 거행됐지만 국무총리와 장관 등 정부 측 고위인사가 참석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참석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이런 조치에도 분위기는 싸늘했다. 4‧3유족회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 뿐만 아니라 여야 정치인, 도의회 등에서 불만스런 성명이 잇달아 발표됐다.

 

4‧3유족회 등 제주도내 26개 시민사회단체는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에서 드러났듯이 4‧3사건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학살사건”이라면서 “국무총리가 참석하더라도 정부가 공식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주출신 국회의원 고진부 의원(민주당)과 양정규‧현경대 의원(한나라당)도 여야를 떠나 “진상조사 결과 국기기관의 잘못이 밝혀질 경우 대통령 신분으로 직접 사과하겠다던 제주도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제주도의회는 김영훈 의장과 강원철 4‧3특위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 차원의 공식 입장 표명과 대통령의 위령제 참석이 유보된 데 대해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다음 일어났다. 추미애 의원 등이 이런 사태가 빚어진 책임이 고건 총리에게 있다고 직접 공격했기 때문이다. 4‧3특별법 제정의 산파역할을 했던 추미애 의원은 4월 1일 발표한 성명을 통해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결론을 왜곡하는 듯한 국무총리의 태도와 이에 따른 청와대의 사과 재검토를 비판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추 의원은 “총리의 보고서 작성 시한 연장조치는 진상규명 작업이 미흡하다고 판단한 결과라기보다는 보고서 채택과정에서 군경 측 일부 위원의 반발을 의식한 결과라고 본다.”며 “이는 4‧3특별법의 입법 취지와 법에 정해진 기간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4‧3특별법 제정운동에 앞장섰던 제주참여환경연대 이지훈 대표도 『한겨레신문』 4월 3일자에 실린 “제주4‧3 사과 유보라니”란 제목의 기고를 통해 “4‧3특별법은 여야 의원들이 함께 발의해 통과시킨 인권법이다. 감히 총리가 자의적으로 훼손할 수 있는 법이 아니다. 도민들은 이제 실망을 넘어 분노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앞서 4월 2일 제주참여환경연대‧제주환경운동연합‧제주여민회 등 3개 단체는 “정부 차원의 공식사과 유보를 사실상 조장하고 제주4‧3 진상규명에 찬물을 끼얹은 고건 총리의 위령제 참석을 반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위령제 참석 반대 표명에 총리실 당황
뜻하지 않은 공격을 받은 총리실은 당황한 빛을 보이며 반론에 나섰다. 즉 “6개월 시한부 수정의견은 군경 측 입장을 대변하는 위원들의 수정 제의 등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위원 전원 동의하에 전원일치의 의결로 이뤄진 것이고, 진상조사보고서가 6개월 뒤 최종 확정되면 적절한 시점에 정부의 공식입장이 표명될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총리는 위원장으로서 위원들과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 위원회를 원만히 운영하고자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4‧3위령제 행사장엔 긴장감이 돌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고건 총리와 김두관 장관 등은 같은 버스에 탑승해 행사장으로 향했다. 일부 시민단체 회원들이 계란을 던질지 모른다는 정보가 입수돼 경호원들은 우산을 준비하기도 했다.

 

고건 총리 일행이 평화공원 조성 예정지 입구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참여환경연대 등 일부 단체 회원들이 ‘4‧3 해결에 찬물을 끼얹는 고건 국무총리 규탄한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펼치고 입장을 저지하는 기습 시위를 벌였다.

 

경호원과 사복경찰들과 실랑이가 벌어지자 일부 시민단체 회원들은 땅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다. 이 바람에 추모행사 시작이 10여 분 간 지연됐다. 고 총리는 훗날 이 상황을 매우 안타까웠다면서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위령제에 참석한 고건 총리는 정부의 입장 표명시기가 늦어진 데 대해 양해를 구하고, “4‧3위원장으로서, 또 총리로서 제주4‧3사건을 마무리 짓는데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을 다짐한다.”고 밝혔다.

 

이날 권영길 민노당 대표, 김원웅 개혁당 대표, 민주당 정동영‧추미애 의원, 한나라당 이부영 의원 등 중앙 정치인들도 대거 참석한 가운데 위령제에 이어 평화공원 조성 기공식도 거행됐다. <44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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