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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60)… 4·3연재를 마치며

며칠 전, 한 연구자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미국 대학교에서 ‘국가사과’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연구는 전 세계의 과거사 사과사례를 대상으로 ‘국가의 사과가 어떤 원인과 조건으로 인해 받아들여지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지에 대한 실증적 검증을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표현에서 얼른 짚이는 게 있습니다. ‘국가의 사과’라고 해서 모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연구자는 공식사과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언어적 표현, 격식의 유무, 사과자의 정치적 지위, 후속조치 이행 여부 등이며 더 나아가 사과수혜자 입장에서 각각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부 공식사과도 격식이 중요해
그런 시각에서 봤을 때, 나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제주4·3에 대한 공식사과는 사과 용어가 명확했고, 절차에서도 예의를 갖추었으며 그 후 진행된 정부 차원의 후속조치도 긍정적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연구자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연단을 생각했습니까?” 내가 웃으면서 어떻게 알았느냐고 되묻자 내가 쓴 『4·3 그 진실을 찾아서』에서 봤다는 겁니다.

 

대통령 사과 발표 하루 전날인 2013년 10월 30일, 4·3위원회에 근무하던 나는 청와대 장준영 정무비서관, 기춘 행정관과 함께 제주에 내려와 라마다호텔 행사 현장을 둘러봤습니다.

 

그런데 연단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제기했고, 청와대 의전팀에 확인한 결과 “오찬 회동에서는 대통령께서 일반적으로 메인테이블에서 일어나 이야기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동행한 청와대 정무팀에게 강하게 어필했습니다. 대통령이 자유발언이 아닌 준비된 발표문을 읽어야 하고, 연단이 갖추어진 격식 있는 형식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정무팀도 이에 동조해서 뒤늦게 연단이 마련됐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온 연구자는 학계에서는 정부 공식사과에서 내용도 중요하지만, 엄숙한 절차와 이에 부합하는 격식(ceremony)도 필수 요소 중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통령 사과 당시가 연상되면서 4·3의 위상도 참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주마등같이 스쳐갔습니다.

 

대표적 갈등관계인 유족회와 경우회도 화해
나는 2015년 펴낸 저서 『4·3 그 진실을 찾아서』 맨 마지막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 “4·3의 진실규명은 고비마다 ‘기적’이었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4·3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할 때, 관 위주의 4·3특별법 시행령을 농성하면서까지 막아냈을 때,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온갖 진통을 극복하고 진상조사보고서가 최종 확정됐을 때, 대한민국 정통성이 무너진다는 일각의 드센 반대를 무릅쓰고 대통령이 4·3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을 때, 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이 이루어진 과정들을 온몸으로 겪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뀐 사건, 즉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법무장관과 국방장관까지 나서서 반대하는 것을 무릅쓰고 군법회의 수형자들을 4·3희생자로 결정하고, 그 여세를 몰아 국회에서 4·3희생자 범위에 ‘수형자’를 추가하는 내용이 포함된 4·3특별법이 개정되었습니다.

 

보안을 최우선으로 하는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바로 옆에서 4·3유해들을 무더기로 발굴하고, MB정부에서 시도했던 4·3위원회 폐지와 평화기념관 개관 저지 기도를 막아낸 것 등등. 그 중의 어느 것 하나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해냈습니다.

 

4·3희생자유족회와 경찰 출신 모임인 제주경우회는 이념과 4·3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심히 갈등해 왔습니다. 그렇게 대립해온 두 단체가 “제주도민 모두가 피해자”란 인식하에 서로 화해를 했습니다.

 

최대 난제라 여겨졌던 4·3 국가기념일 지정이 그것도 보수정권에서 이뤄졌습니다. ‘공산폭동’으로 몰렸던 4·3이 이제는 보수 성향의 주최 측에 의해서도 이념갈등 극복의 대표적인 사례로 선정되고 있음을 봅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 하나하나가 희망사항으로나 그려 볼 수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을 수 없었던 그런 일들이 눈앞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의 변화가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4·3취재반 ‘정부 사과’를 최종목표로 잡아
내가 4·3 규명 운동에 뛰어든 것은 1988년 4·3취재반장을 맡으면서였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때만 해도 나는 4·3이 오늘날같이 대명천지에서 당당히 재평가 받는 날이 오리라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4·3 취재가 시작되자 수많은 유족이 그 동안 그의 가족과 그들 자신에게 씌워졌던 ‘빨갱이’ 누명을 벗겨 달라고 절박하게 호소해 왔습니다. 그때 마음에 세운 나의 최종 목표는 4·3에 대한 ‘대한민국 대통령의 사과’였습니다.

 

1997년 일본의 『아사히신문』이 4·3취재반의 활동을 특집 기사로 내보낼 때, 그들에게 내가 밝힌 최종 목표도 ‘정부의 진상조사와 사과’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깊이 새기고 다짐했던 그런 최종 목표를 이룰 기회가 나에게 찾아왔습니다. 나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2003년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서 4·3의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의 실무 책임과 함께 대정부 건의 사항을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랜 꿈이었던 ‘정부의 사과’를 맨 앞에 내세워 건의했고, 그 건의는 마침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4·3특별법의 ‘정부의 입장표명 등에 관한’의 규정 중 ‘등’이라는 글자 하나를 활용하여 다른 건의 내용도 도모하게 됩니다. ‘대정부 7대 건의안’이 그것입니다. 국내에는 선행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외국의 사례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정부 건의안 작성 때 정부사과를 맨앞에
그렇게 해서 작성한 일곱 가지 건의안은, 정부의 사과 외에 추모기념일 지정, 진상보고서 교육자료 활용, 평화공원 조성, 유족에게 생계비 지원, 집단매장지 발굴 지원, 진상규명 기념사업 지속 지원 등이었습니다.

 

이 건의안 역시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4·3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약간의 문구 수정을 거친 후 최종 확정되었고, 이 건의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4·3에 대한 사과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건의안 초안을 작성할 때만 해도 내 속내로는 건의안 전부가 실현되기는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4·3희생자 추념일’이라는 국가기념일 지정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이루어지기가 힘든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2014년 그 꿈이 실현되었습니다.

 

4·3 진실규명 역사는 국내는 물론이고 이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2008년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헌준의 논문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확산된 과거사 위원회 전체의 흐름과 4·3위원회의 활동을 비교 연구한 김헌준 박사는 논문에서 “전 세계적으로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공적인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의 사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김 박사는 그 근거로 포괄적이고 역사적인 진실의 규명, 4·3위원회의 지속적이고 영향력 있는 활동, 4·3평화재단 설립을 통한 영구적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모델 확보 등을 꼽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권고사항의 이행률이 높다.”는 이유도 포함돼 있습니다.

 

우리는 대정부 7대 건의안 이행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겁니다. 외국에서도 과거사 해결을 위한 ‘권고안’, ‘건의안’ 등이 발표되지만 실상 그 이행률은 매우 낮다는 것입니다.

 

제주4·3은 이제 두 가지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4·3이라는 숫자로 표상되는 저항과 수난의 사건 자체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권력에 의해 반세기 넘게 가려졌던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오늘날 평화와 인권과 화해와 상생의 이정표로 거듭나게 한 4·3진실규명의 운동사가 그것입니다.

 

4·3 진실규명 운동사 자체도 ‘의미 있는 역사’
처음 4·3취재반을 꾸리던 1988년 당시를 돌이켜보면, 그때는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접근 자체가 금기였던 4·3은 그 긴 세월 무거운 침묵의 어둠 속에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간혹 ‘진상을 안다’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들이 전하는 정보들은 아주 작은 조각, 그나마 불확실하고 심지어 왜곡된 것이기 일쑤였습니다. 사건 자체가 너무나 방대하고 굴곡져 있어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 지 길이 안 보였습니다.

 

관변자료들은 공권력의 죄상을 덮기 위해 4·3을 온통 ‘공산폭동’으로 덧칠하고 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학가나 재야단체 운동권에서는 4·3을 ‘민중항쟁’으로 되받아 규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막막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두렵기도 했습니다. 4·3취재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개인의 신상문제일 뿐만 아니라 신문사의 존폐와도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떨쳐내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즉, 그 두려운 일을 시작하는 것, 그 일의 현장 속으로 뛰어드는 것. 우리 4·3취재반은 4·3의 광풍에서 살아나온 체험자들을 만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유족들의 피해의식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습니다. 그들은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침묵이 목소리보다 더 큰 외침으로 제주4·3의 잔혹사를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좀처럼 열려고 하지 않는 그들의 입에서 어렵게 나온 증언들이 하나씩 쌓여 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채록한 증언 내용을 검토하다보니, 같은 사건을 놓고도 구술자마다 다르게 증언하는 경우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기억이 희미한 탓도 있었지만, 자기를 합리화하거나 혹은 고의로 왜곡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그들만의 탓이겠습니까. 4·3 때 제주는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집단 광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났습니다.

 

‘진실’ 찾기 위해 검증과정 반복
그때 내가 버팀목으로 삼은 키워드는 ‘진실’과 ‘인본’이었습니다. 진실로 다가가기 위해 내가 가장 신경 썼던 일은 검증이었습니다. 4·3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반세기동안 은폐하고 왜곡하기에 급급했던 관변자료들은 오류투성이였습니다.

 

증언자들 역시 진실만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4·3에 관한 어떤 자료나 증언에 대해서도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검증 과정을 반복하였습니다.

 

취재반 기자들이 채록한 증언이라도 신문에 연재할 때에는 반드시 증언당사자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4·3은 말한다』(456회)는 매회 그런 과정을 거쳐 10년 동안 연재됐습니다.

 

 

이 시점에서 한마디 덧붙인다면, 제주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4·3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범도 무서웠고, 곰도 무서웠다”는 인식입니다. 토벌대도 무섭고 무장대도 무서웠다는 양비론이 제주사람들 사이에 드넓게 터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단편적인 경험이나 지식 혹은 풍문으로 4·3 전체를 재단하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근시안으로 특정 부분만 들여다봅니다. 그러고는 제주사람끼리 서로 헐뜯고 죽였다는 식의 결론을 내립니다.

 

단언합니다. 그렇게 접근해서는 4·3의 참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아는 것은 4·3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4·3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은 제주도민 대부분이 ‘동서 냉전의 피해자요, 건국 과정에 야기된 역사적인 파행(跛行)의 희생자’라는 인식을 할 때, 비로소 4·3의 참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4·3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동서 냉전 상황, 한반도의 분단 상황, 미군정이 지배한 해방공간의 모순 구조, 제주도의 저항 역사와 정치·경제·사회 여건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요컨대, 4·3은 단순히 제주도의 사건이 아니라 냉전과 분단이 연계된 세계사적인 사건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런 인식의 견지에서 투박하게 비유하자면, 4·3의 희생자들은 ‘고래 싸움에 등터진 새우’ 같다 할 것입니다.

 

인본에 초점맞춰 ‘공산폭동’ 허상 밝혀내
내처 ‘인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4·3의 진실 찾기에 나서서, 가장 다루기 어려웠던 것이 이념 문제였습니다. 과거 군사정권은 4·3을 북한 정권 또는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 하에 발생한 공산폭동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취재반이 추적한 결과, 그런 지령은 실체가 없었습니다. 조사의 결론은 중앙당의 지령 따위는 없었고 남로당 제주도당의 ‘독자적’인 봉기였다는 것입니다. 정부 조사반의 다각적인 추가 조사에서도 같은 결론이 나왔습니다.

 

4·3에 이념의 개입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붉은색이 과도하게 칠해졌고, 그로 인한 폐해는 크고 깊고 끈질긴 것입니다. 체험자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 증언을 가로 막는 것도 그들의 뇌리에 아교처럼 들러붙어 있는 지독한 ‘레드 콤플렉스’였습니다.

 

그것은 체험자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 학계의 오래된 ‘현대사 연구 기피증’도, 4·3에 대한 국내 언론의 비겁한 침묵도 바로 그 콤플렉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서지 않으니 우리라도 나서서 ‘4·3 공산폭동론’의 허상을 조목조목 밝혀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우리는 사람의 목숨이, 인간의 존엄성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4·3의 진실 찾기에 줄곧 원기를 북돋아준 것도 바로 ‘인본주의’(휴머니즘)였습니다.

 

“이념을 신봉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인본’에 초점을 맞추고 보니,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따라 나왔습니다. 좌우를 막론하고 과연 이념은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는가, 그것은 사람을 막 죽여도 되는 그런 우월한 권리를 가진 것인가, 사람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인가.

 

‘철의 장막’으로 불리던 소련의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제주를 방문하던 1991년 어느 날, 제주공항 주변 도로에 나부끼는 깃발―붉은 바탕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련 깃발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이듬해인 1992년에는 더욱 혼돈스러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죽(竹)의 장막’이라며 적대하던 중공과 수교하게 되자, 우리와 같은 반공국가인 자유중국(대만)을 내팽개치듯 걷어찬 것입니다.

 

곧이어 반공과 자유수호란 명분으로 우리가 파병하여 싸웠던 통일 베트남과도 국교를 맺습니다. 옛 소련(러시아)이나 중국과 베트남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주의국가입니다.

 

그런 그들과 사귀는 데에 대한민국 정부나 국민은 크게 저항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념보다는 ‘국익’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때로 이념이란 이토록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념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4·3을 이념 문제로만 접근하여 폄훼에 앞장섭니다. 역사는 한 걸음 한 걸음 진보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진실’과 ‘인본’의 전략은 다소 더디고 답답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긴 호흡으로 보면 성공가도를 걸어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로 되돌아가 다시 그 일을 시작한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화해와 상생’ 가치 배척돼야 하나?
4·3은 은폐와 왜곡, 억압의 긴 터널을 벗어나 이제 평화, 인권, 통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4·3은 제주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선포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4·3은 화해와 상생이라는 큰 지표가 가리키는 바에 따라 그 여정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지표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보수진영에서도 불만이지만 심지어 진보진영에서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해자들이 고백하고 용서를 빌지 않는데 무슨 화해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역사의 화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기간에 실현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역사 문제를 풀 수는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 시대의 양심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의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전두환 정권이 총칼을 들이대던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 7주기 기념미사에서 광주 희생자와 고문치사 피해자 박종철 군을 추모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같이 엄청난 일이 우리 안에서 있었는데도 눈 감고 귀 막고, 외면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도록 빌고, 아울러 우리 마음에 진실을 추구하되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원수 갚음이 아니요, 용서와 화해임을 깊이 깨닫게 하여 주시도록 빌기 위해서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은 결코 투쟁적으로 들리지 않는 이상한 마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도덕적 힘이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도 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내면에 그런 도덕적 강한 힘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필자가 화해와 용서를 말할 때면 빠짐없이 언급하는 사람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 대통령입니다. 만델라 대통령은 감옥에 갇혀 27년이나 지옥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억압했던 백인정권 사람들과 화해의 손을 잡았습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통해 보복이 아닌 용서를, 과거가 아닌 미래를 선택했습니다. “당신은 배알도 없느냐?”고 공격하는 자기진영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옥 문을 나선 뒤에도 내가 계속 그들을 증오한다면, 나는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유롭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증오심을 내려놓았습니다.”

 

만델라의 말을 빌리면, 피해자인 자신이 자유롭기 위해서 가해자를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끝>

 

** 지금까지 '4·3 발굴취재 비사-그 진실을 찾아서' 를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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