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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47) ... 국방부의 「6·25전쟁사」 파문

기존의 폭동, 토벌 정당성 그대로 답습
2004년 7월, 보수단체가 낸 헌법소원 못지않게 국방부가 발행한 『6‧25전쟁사』 파문도 논란거리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편찬한 이 책에 제주4‧3을 ‘무장폭동’으로 기술하는가하면 오류와 왜곡사례도 수두룩해서 큰 파장이 일어난 것이다.

 

국방부는 6‧25전쟁에 관한 정부 공식 역사서로 1967년부터 13년간에 걸쳐 『한국전쟁사』(전 11권)를 발간한 바 있다.

 

국방부는 『한국전쟁사』 발간이 오래 전에 있었고, 미국과 구소련, 중국 등에서 새로 발굴한 문헌자료와 학계의 연구 성과, 참전용사 4,000명의 증언자료 등을 반영해서 모두 18권의 『6‧25전쟁사』를 새로운 각도로 쓴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 첫 권으로 ‘전쟁의 배경과 원인’을 발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제주4‧3을 ‘무장폭동’으로 표기했다는 문제 제기가 4‧3관련단체로부터 나왔다. 4‧3위원회 전문위원실에서 얼른 이 책을 입수해서 분석했다. 총 28페이지에 걸쳐 언급한 제주4‧3 관련 부분에서 30여 군데의 문제가 발견됐다.

 

정부 위원회가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철저히 묵살하고, 기존의 폭동론과 토벌의 정당성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다.

폐기된 『제주경찰사』에서 8군데나 인용
이 책은 4‧3의 직접 발발 원인이 된 1947년 3‧1 경찰 발포사건부터 왜곡했다. 아울러 3‧1사건 이후 발생된 2,500명의 검속, 3건의 고문치사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남로당 활동만 부각시켰다.

 

초토화작전에 대해서도 “포로가 된 인민유격대도 처형하지 않았고, 양민으로 인정된 자는 전원 귀향 조치했다.”고 왜곡했다.

 

또한 민간인 희생사실을 철저히 외면하면서, 오히려 군인들에게 민간인 80여 명이 희생된 의귀리사건에 대해서는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30여 명을 사살했다.”고 기술했다.

 

더욱 어이가 없었던 것은 이미 폐기처분된 2000년판 『제주경찰사』에서 여덟 군데나 인용한 점이다. 경찰사는 발간 직후 4‧3 관련 부분에 많은 오류와 왜곡으로 물의를 빚자 2000년 11월 제주경찰청 스스로 공식 폐기했던 문건이다.

 

이런 내용상의 왜곡 못지않게, 국방부가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나 대통령의 사과라는 정치적 행위를 애써 외면하거나 묵살하는 의도를 보였다는 점이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이것은 자칫 국군 통수권자에 대한 항명으로 비쳐질 수 있는 사안일 뿐 아니라, 4‧3 치유의 향방에도 악영향을 미칠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대통령이 사과한 사안에 대한 ‘항명인가?‘
이와 같은 문제가 불거지자, 7월 9일 제주4‧3연구소장 출신인 강창일 국회의원(열린우리당)이 우리 전문위원실에서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 조영길 국방장관을 상대로 10개 항의 서면 질의를 했다.

“국방장관은 4‧3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해놓고도 정부 진상보고서를 단 한 줄도 인용하지 않고 철저히 묵살한 저의는? 진상보고서를 인정하지 않는가?”,

 

“민간인 희생 부분에 대해서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데, 장관은 진압작전의 민간인 희생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가?”,

 

“장관은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가 잘못됐다고 판단하는가?” 등을 따졌다.

 

7월 12일 임종인 의원(열린우리당)도 대정부 질문에서 국방장관에게 제주4‧3을 ‘폭동’으로 표현한 문제 등을 따져 물었다.

 

이에 대해 조영길 장관은 “6‧25전쟁사에서 폭동이란 표현은 딱 두 번 썼다. 이는 사건의 전개과정을 표현한 것으로, 제주4‧3사건 전체의 성격을 정의한 목적에서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조 장관은 또 “폭동이란 수식어를 썼다고 해서 4‧3사건 성격을 왜곡하거나 변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여 『6‧25전쟁사』를 옹호했다.

 

이에 4‧3진영이 발끈했다. 7월 13일 제주4‧3희생자유족회(회장 이성찬)‧4‧3연구소(소장 이규배)‧민예총 제주도지회(지회장 김수열)가 긴급 대책회의를 가졌다.

 

 

4·3진영, “엄중 처벌” 노 대통령에게 요구
이들 단체 대표들은 다음날인 7월 14일 제주도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4‧3사건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문과 국방부에서 발간한 『6‧25전쟁사』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데 참여정부의 입장은 과연 무엇인지 밝히라”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공개 질의했다. 아울러, 국방장관의 사과와 『6‧25전쟁사』의 회수 폐기, 관련자 문책 등을 요구했다.

 

7월 15일에는 제주도의회와 4‧3도민연대(공동대표 고상호‧고창후‧김평담‧윤춘광‧양동윤)가 나섰다. 도의회는 이날 4‧3특별위원회(위원장 강원철)가 제안한 건의문을 도의원 전원의 서명으로 채택했다.

 

도의원들은 이 건의문을 통해 “『6‧25전쟁사』의 은폐와 왜곡 사태는 그동안 도민들이 조심스럽게 쌓아 올린 진실의 탑을 송두리째 허물고 우롱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정부에 대해 재발 방지 대책과 문제의 책 전량 폐기를 주장했다.

 

4‧3도민연대도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 사태에 대해 진상을 즉각 조사하고, 국방장관과 군사편찬연구소 관계자를 엄중히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국회에 대해서는 4‧3특별법을 제정한 입법기관으로서 특별법의 권위를 지켜줄 것을 촉구했다. 이와 함께 도민연대는 청와대와 국회를 항의 방문하겠다고 밝혔다.

 

2004년 7월, 『6‧25전쟁사』 파문이 일어났을 때 4‧3유족회‧4‧3연구소‧4‧3도민연대 등 4‧3 관련단체와 제주도의회 등은 한결같이 국방부가 정부 보고서인 4‧3진상조사보고서를 철저히 외면한 사실을 지적하고, 한목소리로 이를 규탄했다.

 

4‧3 관련단체들은 4‧3진상조사보고서를 “국가의 공식적인 보고서”, 혹은 “제주4‧3사건에 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정사(正史)”로 규정하고 이를 외면한 국방부를 질책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 단체들은 4‧3진상조사보고서의 조사 결론을 토대로 대통령이 사과했음을 강조하면서 어떻게 국방부가 이를 묵살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일부 4‧3 관련단체가 2003년 10월 4‧3진상조사보고서가 최종 확정됐을 때, 이를 ‘미완의 보고서’로 규정하면서, “미완의 보고서를 뛰어넘는 ‘4‧3정사’를 새롭게 편찬하겠다.”고 밝혔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쌍방 대립하자 청와대가 중재에 나서
이렇게 4‧3 관련단체와 제주도의회까지 합세해서 『6‧25전쟁사』의 시정을 요구했지만 국방부 측은 계속 버티기 작전으로 들어갔다. 7월 19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4‧3연구소에 보낸 회신 공문에서 “『6‧25전쟁사』는 전쟁사 기술방식으로 작성했고, 4‧3위원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전체적으로 고려, 최종 발간했다”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조영길 국방장관은 7월 22일 강창일 의원의 서면 질의에 대한 답변서를 통해 4‧3진상조사보고서의 사료적 가치와 군경 진압과정의 민간인 희생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4‧3 관련부분의 전면 수정이나 사과, 관계자 문책 등을 거부했다.

 

조 장관은 ‘무장폭동’이란 표현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며, 사소한 오류에 대해서는 ‘정오표(正誤表)’로 교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강창일 의원뿐만 아니라 4‧3 관련단체들이 발끈했다. 4‧3유족회‧연구소‧도민연대와 제주민예총, 백조일손유족회(회장 조정배)까지 가세한 5개 단체는 7월 26일 『6‧25전쟁사』의 4‧3 왜곡을 바로잡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라고 촉구했다.

 

또한 이 책의 전량 폐기뿐만 아니라 국방장관과 군사편찬연구소 관련자의 문책을 강도 높게 요구했다. 이제 공은 청와대로 넘겨진 상황이었다.

 

이에 앞서 7월 20일 4‧3도민연대 고성화 상임고문, 김평담‧양동윤 공동대표, 김용범 운영위원이 청와대를 방문, 시민사회수석실 황인성 비서관 등과 만나 『6‧25전쟁사』 왜곡에 대한 도민사회의 분노를 전하면서, 이를 시정하기 위한 진정서를 반드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달해 줄 것을 요구했다.

 

윤광웅 국방보좌관 주재로 열린 대책회의
이렇게 되자 청와대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7월 26일 오후 청와대 국방보좌관실에서 윤광웅 국방보좌관(예비역 해군 중장) 주재로 『6‧25전쟁사』 관련 대책회의가 열렸다.

 

청와대 측에선 윤 국방보좌관과 김종대 국방보좌 행정관, 기춘 시민사회 행정관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선 안병한 소장(예비역 육군 소장), 최종대 연구부장(현역 육군 대령), 양영조 박사가, 4‧3위원회에선 배윤호 지원과장(당시 지원단장 공석 중)과 수석전문위원인 내가 참석했다.

 

먼저 안 소장이 국방부 입장을 설명했다. 요약하면, 선배 군인들이 기록한 내용을 중심으로 『6‧25전쟁사』의 4‧3 관련부분을 기술했다는 것이다. 이어 필자가 4‧3위원회의 입장을 설명했다.

 

“국방부 기존 기록이 문제가 있었기에 4‧3특별법이 제정되고,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진행된 것이 아닙니까. 많은 논란 있었지만 결국 국방부 쪽에서도 참여한 가운데 ‘무장폭동’ 용어를 삭제하지 않았습니까. 국무총리가 주재한 회의에서 보고서가 확정되고, 이에 따라 대통령이 사과까지 한 마당인데 국방부가 이제 와서 과거의 논리로 회귀하겠다면 누가 신뢰하겠습니까?”

 

내가 되묻는 식으로 말을 이어나가자 안 소장이 바로 항변하려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때 회의를 주재하던 윤 국방보좌관이 안 소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안 장군, 이제 국방부도 달라져야 합니다. 국방부도 아픈 역사를 풀어주는 차원에서 합리적인 수정방안이 모색돼야 할 겁니다. 그래야 국민으로부터 사랑 받는 강한 군대의 모습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아울러 제주도민들도 국방부의 입장을 십분 고려하여, 슬기롭게 이 문제를 풀어주실 것을 바랍니다.”

 

그러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날 회의는 그 후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청와대의 수정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남으로써 국방부 쪽에서도 더 이상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날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3가지 원칙이 합의됐다.

 

1) 『6‧25전쟁사』 중 사실과 다른 4‧3내용을 협의 수정하되, 수정안을 4‧3위원회에서 만든다.
2) 수정작업은 8월중 마무리한다.
3) 협의가 완료될 때까지 『6‧25전쟁사』 배포를 중단한다.

 

국방장관 교체 후 수정작업 급물살
『6‧25전쟁사』 파동을 둘러싸고 정치권과 4‧3진영에서 국방장관의 문책을 요구하던 상황에서 2004년 7월 28일 공교롭게도 국방장관이 전격 교체됐다.

 

청와대는 남북 함정간의 무선교신 보고 누락사건이 불거지면서 조영길 국방장관이 사의를 표명하자 이를 수리하고, 후임 장관에 윤광웅 청와대 국방보좌관을 임명한 것이다.

예비역 해군 중장 출신을 국방장관에 발탁한 것부터 이례적이었다. 여기에는 참여정부의 국방 개혁 의지가 담겨 있었다. 윤 장관이 취임 일성으로 “국방의 문민화는 시대적 명제”라고 강조한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신임 국방장관이 이틀 전 청와대에서 열린 『6‧25전쟁사』 파동 대책회의에서 국방부 쪽에 수정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던 주인공이다.

 

우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8월 2일 4‧3위원회의 수정안을 군사편찬연구소(군편)에 보냈고, 군편은 8월 9일 수정안에 대한 검토의견을 보내왔다. 여전히 주요 부분에선 버티기 자세가 역력했다.

 

8월 11일, 군편 회의실에서 양쪽 실무자 회의가 열렸다. 군편에선 최종대 연구부장, 정석균 자문위원, 양영조 박사, 박동찬 연구원이, 4‧3위원회에선 나와 김종민 전문위원이 참석했다.

 

이에 앞서 가진 군편 안병한 소장과의 티타임에서 내가 “군편 검토의견을 보고 실망했다. 오늘 회의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라고 불만을 토로하자, 오히려 안 소장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막상 회의가 시작되자, 군편 관계자들이 전향적 자세로 임하고 있음이 감지됐다. 그럼에도 주요 부분에선 의견을 달리했다. 가장 부딪친 용어가 ‘무장폭동’이냐, ‘무장봉기’냐 였다.

 

아울러 무고한 민간인 희생에 대한 군 작전의 과오를 인정하는 부분에서 머뭇거렸다. 이런 문제는 2차 회의에서 매듭짓기로 했다. 수정작업을 ‘8월중’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배수진을 쳤다.

 

오류부분 등 35건 수정 합의
2차 회의는 8월 23일 4‧3위원회 사무실에서 열렸다. 결국, 이날 회의에서 논란 끝에 35건을 수정하기로 합의했다. 오류부분 18건, 왜곡‧편향부분 13건, 추가내용 4건 등이다. 가장 논란이 됐던 ‘무장폭동’은 삭제하고, 4‧3특별법에 명시된 ‘4‧3사건’ 또는 ‘소요사태’란 용어로 대체하기로 했다.

 

추가한 내용 중 중요한 것은, 사건 배경의 하나인 ‘2,500명 검속, 3건의 고문치사 발생’, 초토화작전의 실체인 ‘해안선 5km 이외의 통행금지와 총살 포고문’과 ‘9연대의 강경작전으로 표선면 토산리 등 여러 곳에서 다수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등이었다.

 

특히, 결론 부분에 종합적인 평가라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삽입하기로 합의했다.

 

“제주4‧3사건은 광복 이후 정부 수립 과정의 혼란기에 발생하여 제주도민들이 수많은 인적‧물적 피해를 입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당시 미군정과 새로 출범한 정부는 체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토벌작전을 담당한 군‧경도 훈련과 경험이 부족하여 도민의 피해를 크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이를 고려하여 정부는 사건 발생 50여 년 만에 인권신장과 국민화합에 기여하기 위해 4‧3특별법을 제정하여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회복 조치를 추진하였다.”

 

국방부에 불어 닥친 후폭풍
이날 회의에서는 35건 수정 합의 이외에도, 조만간 ‘4‧3사건 수정문’을 별지로 만들어 『6‧25전쟁사』 배포처 모두에게 발송할 것, 『6‧25전쟁사』 재발행시 본문에 수정문을 반영할 것, 향후 군편에서 4‧3사건을 서술할 때 4‧3진상조사보고서를 최대한 참고하여 반영할 것 등을 약속 받았다.

 

9월 15일, 이 수정안은 상부에 보고한 뒤 ‘군편 연구부장 최종대-4‧3지원단 수석전문위원 양조훈’의 서명으로 매듭지어졌다.

 

11월 16일, 『6‧25전쟁사』 제1집 수정본이 나왔다. 배포처마다 발송된 ‘제주4‧3사건 수정문’의 맨 앞장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6‧25전쟁사』 제1집 중 제주4‧3사건 수정문은 ‘제주4‧3특별법’과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내용과 취지를 고려하여 제주도민의 피해상황을 추가하고 일부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이 수정문이 나오자 4‧3진영은 크게 환영했다. 4‧3유족회‧4‧3연구소‧4‧3도민연대‧민예총제주도지회 등 4개 단체는 11월 17일 “국방부의 4‧3사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환영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국방부 쪽은 후폭풍에 시달렸다. ‘별들의 모임’이라는 성우회를 비롯하여 퇴역 장성들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것이다. 이런 후폭풍의 영향인지 얼마 후 현역 대령이던 최종대 군편 연구부장이 군복을 벗었다.

 

그는 준장 진급이 예견되던 엘리트 군인이었다. 경위야 어찌됐던, 얼마 후 강원도에 있는 국영기업체 임원으로 떠난다는 그의 전화를 받고 필자의 심정도 착잡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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