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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41) ... 격론장이 된 4·3진상보고서 심의(1)

목차안 심의부터 격론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작성 기한이 정해져 있었다. 4‧3특별법에 위원회 구성 후 2년 이내에 자료 조사를 한 뒤 6개월 이내에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4‧3위원회가 2000년 8월에 출범했기 때문에 이를 기준점으로 한다면 늦어도 2003년 3월 이내에 보고서를 완성해야 했다.

 

보고서 작성의 임무를 맡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은 기획단장 선임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2001년 1월에야 겨우 출범할 수 있었다. 5개월 가량을 까먹은 것이다.

 

 

기획단은 2003년 2월 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이 작성될 때까지 모두 12차례 회의를 갖는 등 숨 가쁘게 움직였다. 정부 관계부처 국장급 공무원과 민간인 전문가 등 15명으로 구성된 기획단은 전문위원실에서 작성한 진상조사 대상 선정에서부터 증언조사 계획과 국내외 자료조사 계획 등을 심의했다.

 

또한 자료 관리 데이터베이스 개발과 자료집, 증언집, 법령집 발간계획 등도 논의했다. 실질적인 진상조사 등은 상근체제인 진상조사팀에서 했지만, 그 추진상황은 기획단 회의에서 심의, 의결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수석전문위원인 나는 2002년 4월 열린 기획단 제7차 회의에서 진상조사보고서 기본 구상안을 보고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사건의 종합적인 규명과 함께 인권침해 실태조사에 역점을 두어 편찬하되 종합진상조사보고서와 주민피해실태조사보고서 등 2권으로 엮을 계획임을 밝혔다.

 

제1권 종합조사보고서에는 사건의 배경, 전개과정, 주민의 피해 개요 등 사건의 전체 모습을 다루고, 제2권 피해실태조사보고서에는 피해 유형, 마을별 피해 상황, 희생자명단 등을 수록할 복안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기획단 회의에서 한 권의 보고서를 만드는 것으로 수정됐다.

 

기획단 회의는 진상조사보고서 목차 안이 상정된 2002년 8월 제8차 회의 때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보고서 체제뿐만 아니라 주요 제목의 선정, 용어 사용 문제 등 여러 현안들이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이날 회의에서는 격렬한 논쟁만 되풀이 되었다.

 

국방부·경찰 측은 남로당 책임만 강조
보고서 목차 안은 그해 10월 열린 제9차 회의에서 잠정적으로 확정됐다. 이때 정리된 목차 안은 제1장 진상조사 개요, 제2장 배경과 기점, 제3장 전개과정, 제4장 피해상황, 제5장 조사결론, 제6장 권고 순으로 편성됐다.

 

‘미국과의 관계’를 독립된 장(章)으로 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토론이 있었으나 이 부분은 독립시키지 않고 각 장에 미국과의 관계를 적절히 기술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9차 기획단 회의에서도 논쟁이 거듭됐다. 보다 못한 박원순 기획단장(현 서울시장)이 “지금 현실적으로 보고서 초안은 전문위원들이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능하면 빨리 초안을 작성하도록 하고 그 내용을 중심으로 용어라든지 구체적인 기술내용 등을 심의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는 중재안을 내놓아 통과시켰다.

 

박 단장은 전문위원실을 신뢰하고 지지를 보냈다. 여기에 4‧3역사를 연구해온 강창일(배재대)‧김순태(방송대) 교수와 강종호 재경4‧3유족회장 등이 가세했다. 그들은 4‧3특별법 제정 정신을 살려 사건의 진실규명과 희생자 실태조사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반해 국방부가 추천한 하재평(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 유재갑(경기대 교수), 경찰청 추천 인사인 오문균(경찰대 공안문제연구소 연구원) 등은 남로당 책임문제 등을 내세워 끈질기게 이의를 제기하는 형국이었다.

 

특히 육군 소장 출신인 하재평 군사편찬연구소장은 국방부 입장을 대변하기로 작심한 듯 매우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목차 안이 잠정 확정된 다음날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곤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잘해야지 잘못하면 언론에 터질 것이다. 「4‧3은 말한다」 식으로 기술하면 큰일 난다.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진과 토의하는 시간을 갖자. 필요하다면 우리가 입력 작업을 도울 수도 있다.”고 제안해왔다. 나는 이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지만, 그 뒤 보고서 내용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초안작성 앞두고 대선 결과에 촉각
진상조사보고서 초안 작업이 전문위원들에게 맡겨지자 전문위원별 집필 분야를 정했다. 내가 사건 배경과 조사결론, 김종민이 전개과정과 피해실태, 박찬식이 피해실태와 군법회의, 나종삼이 1950년대 이후 상황을 집필하기로 했고, 장준갑이 미국 관계 자료들을 맡았다.

 

그런데 막상 집필분야가 정해졌지만 너나 할 것 없이 곧바로 집필에 몰두하는 전문위원은 없어 보였다. 관련자료만 뒤적거리는 수준이었다. 마음이 ‘콩밭에 가버린 듯’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했다. 바로 그해 12월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 때문이었다.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 결과는 4‧3진상조사보고서 심의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됐다. 2003년 3월부터 4‧3위원회의 보고서 심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그러나 그때에는 4‧3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총리를 비롯해 당연직 위원인 6명의 장관이 새 얼굴로 바뀌기 때문이다. 어떤 성향의 정부가 출범하느냐에 따라 4‧3위원회의 위원 진용이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뜻이다.

 

20세기 후반 전 세계적으로 40여 개의 진실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했다. 군사정권이나 권위주의 정권에서 민주적인 정권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과거사의 반성과 진실규명작업이 벌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 진상보고서를 채택한 위원회는 절반에도 못 미쳤다. 법률상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어 있는데도 반대 세력의 저항에 부닥쳐 보고서 채택에 실패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4·3규명 공약한 노무현 당선에 고무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경합을 벌였다. 대부분의 여론조사는 이 후보가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해 12월 19일 치러진 대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다.

 

그는 대선 기간에 제주에 와서 “정부 차원의 4‧3 진상조사 결과 국가권력이 잘못한 게 드러나면 4‧3영령과 도민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죄하겠다.”고 공약했다. 4‧3진영은 그의 당선을 크게 반겼다.

 

이에 따라 대선 동향을 살피며 진상조사보고서 초안 작성의 속도를 늦췄던 전문위원들의 발 등에도 불이 떨어졌다. 대선 다음날부터 전문위원실에서는 철야작업이 벌어졌다. 집필 방향에 대해서는 전문위원 사이에도 다소 논란이 있었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3가지 원칙이 세워졌다.

 

첫째는 사실에 부합한 자료를 중심으로 내용을 기술한다는 것이다. 4‧3 관련 기존자료나 증언이라 할지라도 왜곡된 내용이 많기 때문에 정밀한 검증과정을 거쳐 그 진실이 확인된 내용에 한하여 인용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4‧3특별법의 입법 취지를 충실히 반영한다는 것이다. 특별법은 4‧3사건의 핵심적인 정의를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주민 희생’에 키워드를 두어 인권침해 규명에 비중을 둔다는 것이다.

 

셋째는 4‧3의 구조적인 문제 규명에 역점을 두기로 한 점이다. 당시 남한사회의 정치상황과 국제적인 역학관계, 그리고 당시 독특했던 제주도의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여건을 총체적으로 살핀다는 것이었다.

 

‘봉기’ ‘초토화’ 용어 놓고 설전
이런 과정을 거쳐 전문위원들에 의해 집필된 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이 2003년 2월 7일 보고서작성기획단 제10차 회의에 상정됐다. 회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4‧3사건의 성격 문제를 비롯해서 발발 원인의 책임 문제, 남로당 및 미군의 역할 범위, 진압 작전의 실상, 계엄령과 군법회의의 불법성 여부, 집단학살의 책임문제 등에 대해서 열띤 공방이 벌어졌다.

 

군경 측 단원들은 남로당의 개입 문제에 역점을 둔 반면 유족 측 단원들은 학살의 실상과 그 가해자 책임 문제 규명에 비중을 두는 발언으로 날을 세웠다. 기획단 회의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용어는 4‧3의 성격을 압축하는 ‘무장봉기’와 학살의 책임 문제가 제기된 ‘초토화작전’이었다.

 

군경 측에서는 ‘무장봉기’ 용어 대신에 ‘반란’ 또는 ‘무장폭동’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반란’이란 용어를 쓰려면 우리 정부가 존재해야 하는데, 미군정이 우리 정부냐는 반론을 제기했다.

 

‘무장봉기’도 “무장을 하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는 뜻의 중립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그대로 고수하자는 의견이 앞섰다. 국방부가 진상보고서 목차 초안을 제출할 때 ‘무장봉기’란 용어를 무심코 사용했던 것도 그들에게는 약점이 됐다.

 

국방부 쪽에서는 ‘초토화작전’이란 용어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군사 작전에서 그런 용어를 쓴 적이 없다고 버티었다. 그러나 필자 등은 제주도에서 실질적 초토화작전이 감행됐고, 김익렬‧김정무 장군 등이 ‘초토작전’이란 표현을 쓰고 있음을 들이댔다.

 

또한 1967년 국방부에서 편찬한 『한국전쟁사』 제1권에 “군경의 토벌작전으로 초토화되었다”는 글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은 제11차 회의(2월 13일)를 거쳐 2월 25일 열린 기획단 제12차 회의에서 확정됐다. 이 심의 과정에서 일부 용어들이 순화됐다.

 

4‧3 때 발효된 계엄령의 불법성에 대해서는 단정하지 않되 불법 논란이 있는 점, 집행 과정에 법을 어긴 점을 다루는 것으로 수정됐다. 논란이 많았던 군법회의에 대해서는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조정됐다.

 

이 보고서 초안은 2003년 3월 초에 4‧3위원회 전체 위원들에게 배포됐다.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고건 국무총리가 취임했다. 그가 4‧3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보고서 심의의 수장을 맡게 된 것이다.

 

보수 측 반대로 1차 통과 무산
4‧3기획단의 진상조사보고서안이 확정 절차를 마치자 이를 심의하기 위한 4‧3위원회 전체회의가 2003년 3월 21일 고건 국무총리 주재로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국무총리실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는 50여 년 동안 어둠 속에 묻혀왔던 4‧3의 진상을 정부가 공식 인증하느냐 여부가 달려 있어 초미의 관심을 모았다.

 

이 회의에 앞서 보고서 채택을 반대하는 보수진영의 움직임도 있었다. 장성 출신들의 모임인 성우회(회장 김영관 제독)는 3월 18일 고건 국무총리에게 4‧3진상조사보고서에 대한 의견서를 보냈다.

 

그 내용은 “4‧3진상조사보고서가 공산폭도에 의한 무장폭동이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민중항쟁으로, 군경의 진압작전은 국가폭력으로 규정함으로써 국가의 정통성과 군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 있는 중대한 오착을 내포하고 있다.”면서 객관적인 검증이 내려질 때까지 심의를 유보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전달했다.

 

국방부는 물론이거니와 군경 쪽에서 추천한 민간인 위원인 김점곤‧한광덕 장군, 이황우 동국대 교수 등도 반대 입장을 보였다. 특히 국방대학원장을 역임한 소장 출신의 한광덕 장군은 밤을 새워가며 보고서의 내용을 일일이 분석한 뒤 성우회 홈페이지에 비판하는 글을 올리는 등 가장 열심히 반대활동을 벌였다.

 

가장 열렬히 반대 활동한 한광덕 위원
한광덕 위원은 4‧3위원회 활동 기간에도 일반적 수준을 넘어서는 강성 발언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는 2002년 3월 15일자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에서 “4‧3위원회에 회의 자료를 제공해야 하는 진상조사기획단이 4‧3사건을 민중항쟁으로 보는 재야 측 주장만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밝혀 파장을 일으켰다.

 

그때는 기획단에서 자료 수집 발굴에만 힘을 쏟고 있을 때였지 수집 자료의 해석이나 사건의 성격을 판단하는 일은 착수조차 않은 상태였다. 이에 따라 박원순 기획단장 명의로 한광덕 위원에게 “발언 근거가 무엇이냐”고 공식 질의했지만 답변은 없었다.

 

2002년 5월 31일 4‧3위원회 위원들이 4‧3 당시 2연대 군인들에 의해 민간인 300여 명이 학살된 ‘북촌리 사건’ 피해자들의 증언을 청취한 일이 있다.

 

사건 현장을 목격한 3명의 주민으로부터 당시 상황을 듣던 한 위원은 난데없이 “학교 운동장에 주민 1천여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소대나 중대 병력이라면 대항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져 주민으로부터 “어떻게 맨손인 주민들이 총을 든 군인들에게 대들 수 있느냐”는 핀잔의 소리를 들었다.

 

한광덕 위원은 진상조사보고서 심의를 하기 위해 2003년 3월 21일 4‧3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린 날에도 4페이지에 이르는 ‘진상조사보고서 안 검토 소감’을 발표했다. “진상조사보고서가 아니고 군경의 과잉 진압과 무장폭동의 정당성을 가설로 세우고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쓰여진 피해보고서로 보였다.”는 게 그의 소감이다.

 

그는 이어 진상보고서 의결을 유보할 뿐만 아니라 집필진의 구성과 감독 체제에 중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감사원의 감사를 제안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건 총리에 맞섰던 두 여성장관
진상보고서를 심의하는 4‧3위원회 전체회의에서는 박원순 기획단장으로부터 보고서 초안의 골자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이런 주장들이 나오면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회의는 2시간 동안 진행됐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이에 고건 총리가 소위원회를 구성해 심도 있게 검토한 후 일주일 후에 전체회의를 열어 재논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일부 민간인 위원들이 “오늘 결론 내자”면서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여기에 장관들도 덩달아 동조하는 이색적인 현상을 연출했다.

 

특히 제주 출신 강금실 법무장관은 법적 절차 등을 제기하면서 “또다시 회의를 열어봤자 똑같은 얘기만 나올 것이기 때문에 오늘 당장 보고서를 통과시키자”고 강한 톤으로 주장했다.

 

여기에 김화중 보건복지부장관이 가세하면서 민간인 위원들 앞에서 총리와 여성 장관들 사이에 입씨름이 벌어지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이나 권위적인 정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고건 총리가 “일주일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라고 재삼 설득하면서 소위원회를 구성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소위원회 회의는 총리가 직접 주재하되 위원으로는 국방장관‧법무장관‧법제처장 등 정부 측 각료 3명과 김삼웅 전 대한매일 주필, 김점곤 경희대 명예교수, 신용하 전 서울대 교수 등 민간인 위원 3명이 위촉됐다. 여기에 박원순 기획단장, 김한욱 지원단장, 양조훈 수석전문위원이 배석하는 구조였다.

 

보고서 심의를 위한 소위원회 제1차 회의가 사흘 뒤인 3월 24일 고건 총리 주재로 국무위원 식당에서 열렸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총리실에서 나종삼 전문위원도 참석시키라고 통보해온 것이다.

 

소위에 나종삼 전문위원을 참석시킨 의도는?
전문위원실에는 성향이 각기 다른 5명의 전문위원이 근무했다. 특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사부장 출신(중령 예편)인 나종삼 전문위원은 국방부 입장을 대변하듯 매우 강한 보수 성향의 의견을 개진해서 나와 충돌이 잦은 편이었다.

 

그런데 중앙위원회가 열릴 때에는 전문위원실을 대표해서 수석전문위원만 참석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처럼 되어 왔는데, 난데없이 나종삼 전문위원을 지목해서 참석하라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내용을 알아본즉, 국방장관이 총리실에 그의 참석을 적극 요청했다는 것이다. 필시 진상조사보고서 집필 업무를 총괄했던 나를 공격하고, 기획단 심의 과정의 문제점을 부각시켜 보고서 심의를 원천적으로 무력화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그것도 국방장관과 합작해서 말이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일전을 할 각오아래 회의에 참석했다. <42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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