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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8) ... 김익렬 9연대장, 유고로 말했다

1989년 8월 김익렬 장군의 유고록을 들고 신문사에 돌아오자 편집국이 갑자기 들뜬 분위기가 됐다. 원고를 전면 검토한 송상일 편집국장은 4‧3 초기 미군정의 토벌정책과 군‧경의 대응전략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라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편집회의에서 취재반의 본 연재를 잠시 중단한 채 김익렬 유고를 매주 5회씩 연재하기로 결정했다. 1989년 8월 15일 『제주신문』에 「유언-4‧3의 진실」이란 이름으로 첫 회가 발표된 데 이어 그해 9월 23일까지 모두 26회가 연재됐다.

 


유족들과의 약속대로 친필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다만 유족의 요구에 따라 조 아무개와 박 아무개 등 특정인을 심하게 힐난하는 두 문장을 뺐고, 한자를 한글 표기로 맞춤법에 맞게 고치는 등 기초 교정만 했다.

 

노인의 육필이라서 문장 하나가 200자 원고지 서너 장을 훌쩍 넘긴 후에야 비로소 마침표가 찍힐 정도로 장문이 많았다. 송 편집국장은 그 긴 문장을 일일이 잘라 단문으로 만드는 등 손수 수정할 정도로 적극성을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 유고 연재에 대한 독자들의 반향은 뜨거웠다.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미군정의 4‧3 토벌정책에 대한 고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예로 들면 이렇다.

 

김익렬 연대장은 4‧3 발발 원인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失政)으로 빚어진 경찰과 서청 등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들고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가세한 것으로 판단했다. 미군정으로부터 출동명령을 받았을 때 제9연대가 ‘선 선무 후 토벌’ 원칙을 세운 것도 여기에 근거한다.

 

“딘 장군 고문, 나에게 초토작전 강요"

 

그는 곧 미군정이 ‘난처한 입장’에 놓인 것을 알게 됐다. 소련 측이 UN 무대에서 “소련 점령지역 주민들은 평화롭기만 한데 미군 점령지역에서는 미군정의 폭정에 항거하는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제주도다”라고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 정부가 군정장관 딘 장군을 문책하고, 제주도 사태를 조속히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또한 소련의 선전을 봉쇄하기 위해서 제주도 사태를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짓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제주도 군정관 맨스필드 중령이 연대장인 자신에게 직접 전한 말이라고 김익렬 장군은 유고를 통해 증언했다.

 

이에 놀란 김익렬 연대장은 “그것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결정할 문제”라고 표명하고, 자신은 평화적인 해결에 관심을 보인 맨스필드 군정관의 지원 아래 L-5 경비행기를 직접 타고 전단을 뿌리는 등 무장대 측과의 평화협상을 우선 추진했다는 것이다.

 

김익렬은 이 무렵 ‘또 다른 고통스러운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고 유고에 적고 있다. 미군 CIC 사무실에서 딘 장군의 정치 고문이란 자를 만났는데, 제주 사태를 조속히 진압하지 않으면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진다면서 “신속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김 연대장이 이를 거부하자, 그 정치 고문은 "10만 달러를 주겠다, 미국으로 이민을 알선해주겠다"는 등의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런 회유를 물리치고 자신의 소신대로 평화협상을 진행하자 이번엔 경찰의 방해 공작을 맞게 됐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이른바 ‘5‧1 오라리 방화사건’과 ‘5‧3 기습작전’이라고 주장했다.

 

김익렬 유고, 미군정 토벌 실체 처음 밝혔다

 

김익렬의 유고는 1948년 5월 5일 딘 군정장관이 직접 제주도에 와서 주재한 ‘9인 최고 수뇌회의’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날 회의에 딘 장군,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경비대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제주도 군정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제주도지사, 9연대장 김익렬 중령,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통역관 등이 참석했다. 갈림길에 선 제주도 사태에 대해 화평이냐, 유혈이냐의 정책 결정을 하는 주요한 최고회의였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 김익렬 연대장은 ‘선 선무 후 토벌’의 원칙을 제시하며 평화적 해결방안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조병옥 경무부장은 이번 사태가 ‘국제공산주의의 개입’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김 연대장까지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이에 발끈한 김 연대장이 조병옥에게 달려들면서 예상치 못했던 육탄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딘 장군은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 해임했다. 그것은 제주도 사태의 강경 진압을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익렬 연대장의 유고가 발표된 이후 반응은 여러 갈래로 나타났다. 4‧3 연구자나 일반 독자들은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이 적나라하게 폭로된데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더욱이 제주도 상황을 유혈사태로 몰고 간 초토화작전 발상이 미군 고위층에서 나왔고, ‘공산 반란’이란 규정도 소련의 선전을 봉쇄하기 위한 국제 정치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는 내용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 예비역 대장은 “김익렬 장군은 명예욕보다는 정의감이 강했고 물욕이 없었으며, 아첨배들을 멸시하는 직언파여서 손해도 많이 봤으나 후배들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한 장성 출신은 “대한민국 군인의 표상으로 삼기 위해 육사 교정에 김익렬 장군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이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보수 진영의 필진은 “김익렬 연대장이 제주 사태를 보는 인식과 판단에 문제가 있었고, 특히 남로당의 전략에 휘말렸거나 간과한 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일부 군 장성 출신 가운데는 김 장군을 ‘허풍이 심한 사람’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4‧3 연구자 가운데 김익렬의 유고를 의도적으로 비틀려고 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4‧3 봉기가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슬로건 아래 출발했는데, 그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평화협정을 맺은 것은 납득할 수 없다며 ‘4‧28 협상’ 자체를 의심하기도 했다.

 

김익렬의 유고는 5‧10선거를 앞두고 긴박하게 전개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즉 ‘4‧28 협상’, ‘5‧1 오라리 방화’, ‘5‧5 최고 수뇌회의’ 등이 그것이다. 그 시기는 미군정이 제주도 사태를 화평으로 풀 것인가, 강경작전으로 진압할 것인가를 저울질하던 시점이다. 김익렬 유고나 나중에 속속 밝혀진 미군 기밀문서를 보면, 저울추는 강경진압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부위원회 조사과정에서 새 자료 입수

 

1989년 4‧3취재반의 활동을 통해 이 시기의 상황을 파악해 보도했던 나는 그 후 10여 년이 지난 2000년부터 4‧3중앙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참여하면서 이 사건과 관련된 새로운 자료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중에도 기억에 남는 자료는 5‧5 수뇌회의 참석자들의 사진,   미 24군단 작전참모부 슈 중령의 보고서, 『국제신문』에 실린 김익렬 기고문 등이다.

 

2001년으로 기억된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자료조사 차 파견된 장준갑 전문위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1948년 5월 5일 회의에 참석했던 미군정 수뇌부들이 한꺼번에 촬영된 사진을 입수했다는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빨리 보내라고 독촉하면서 받아본 사진은 나를 흥분시켰다.

 

미국에서 찾아낸 사진에는 김익렬 유고에 기록된 최고 수뇌회의 참석자 9명이 모두 담겨 있었다. 즉 그날 제주공항에 도착한 딘 장군,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경비대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통역관과 마중나간 제주도 군정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제주도지사, 9연대장 김익렬 중령,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등이 한 컷에 모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한 장의 사진은 김익렬 유고의 신뢰도를 높여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미 24군단 작전참모부 슈 중령의 보고서를 접하면서 처음에는 혼선을 빚기도 했다. 도대체 미군정의 본심이 무엇인지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슈 중령은 24군단 작전참모 타이첸 대령의 명령을 받고 4월 27일부터 이틀간 제주에 들어와 제주 상황을 점검한 뒤 보고서를 남겼다.

 

앞에서 밝혔듯이, 4월 27일 이미 광주 주둔 미 20연대장 브라운 대령 등이 제주에 들어와 있었다. 이날 브라운 대령은 하지 사령관의 지시사항을 제주군정관 맨스필드 중령에게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경비대를 동원해 서둘러 사태를 진압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4월 27일부터 경비대를 동원한 수색작전이 전개되었는데, 그 작전에는 부산에서 들어온 경비대 5연대 1개대대 병력이 참여했다.

 

한편 1948년 5월 2일 UP통신은 “미국 당국에서는 제주도의 좌익 게릴라대는 우익측과 화평 교섭을 개시하였고 경찰이 무장을 해제하고 폭압행동을 취한 경관들을 처벌하는 경우에는 습격을 정지할 것을 약속했다고 발표했다”고 타전했다. 이로 미루어 미군 측은 김익렬 연대장을 내세워 무장대와의 화평 교섭을 하면서 뒤로는 무력 진압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2003년 확정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이와 관련해서 이런 내용으로 기록되었다.

 

“주한미군을 책임지고 있는 하지 장관은 4월 27일 슈 중령을 제주에 보내 사태 진압을 위한 두 가지 방법에 대해 점검했다. 즉 귀순공작을 확인‧감독하는 동시에 아울러 무력진압에 대비해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쳐 무장대의 전력을 확인했다. 5‧10선거를 앞둬 사태의 조기 진압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하지 장군은 결국 두 번째 방법인 무력진압 방침을 채택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논란된 평화협상일 4월 28일로 정리

 

정부 진상조사팀은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해방 공간에서 명멸되어 갔던 22개 신문을 모두 뒤져 4‧3 관련기사를 발췌했다. 그런 조사과정에서 9연대장을 지낸 김익렬의 기고문을 찾아내었다. 이 기고는 『국제신문』에 1948년 8월 6~8일까지 3회에 걸쳐 연재됐다.

 

그런데 이 기고문과 이미 입수한 김익렬 유고를 비교하다보니 머리가 아파왔다. 평화협상 날짜를 비롯해서 여러 곳에 상이한 내용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즉 김달삼과의 협상일이 유고 등을 토대로 ‘4월 28일’로 알려졌으나, 기고문에는 ‘4월 30일’로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혼선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밀 분석이 필요했다.

 

기고문은 4‧3 와중인 1948년 8월 현역 군인의 신분으로 『국제신문』에 발표된 반면, 유고는 김익렬 장군이 1969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4‧3역사가 왜곡 발표되는데 공분을 느껴 1970년대에 “4‧3의 정사(正史)를 위해 진실을 밝힌다”는 취지 아래 기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회고록이 그가 1988년에 숨진 이듬해인 1989년에 『제주신문』에 공개하게 됨으로써 유고가 되었던 것이다.

 

『국제신문』 1948년 8월 6일자에 “동족의 피로 물드린 제주참전기”로 시작된 기고문은 주로 무장대와의 협상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에 비해 유고는 4‧3 발발원인에서부터 시작해 미군정으로부터 출동명령을 받은 9연대가 무장대와 협상하게 된 동기, 과정, 미군정 측의 회유 공작, 수뇌부 회의에서의 조병옥 경무부장과 충돌, 연대장 해임 과정 등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기고문은 『국제신문』에 3회 게재된 반면, 유고는 『제주신문』에 26회 연재될 정도로 분량 자체에서 큰 차이가 났다.

 

유고는 특히 미국 정부가 소련의 선전을 봉쇄하기 위해서 제주도 사태를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딘 장군의 정치 고문이 평화협상을 진행하는 자신에게 초토작전을 강조하며 회유했다는 사실 등 작심하지 않고는 밝힐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미군정의 초기 진압정책을 분석하는데 주요한 사료가 아닐 수 없다.

 

나는 4‧3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과정에서 이 부분의 집필을 맡게 될 김종민 전문위원과 함께 정밀 분석에 들어갔다. 평화협상일을 4월 28일로 할 것인지, 4월 30일로 재정리할 것인지 먼저 분석했다.

 

김익렬 유고에는 협상 날짜를 직접 적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하게 “휴전 4일째 되는 5월 1일은 노동기념일인 ‘메이데이’날이었다. 이날 오전 11시경 제주읍 중산간부락 오라리에 정체불명의 일단이 습격하여 부락민을 죽이고 부락을 방화하는 난동사건이 일어났다”고 기록해 오라리 방화사건 사흘 전에 협상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초대 9연대장을 지낸 장창국은 그의 저서 『육사졸업생』에서 “1948년 4월 28일 오전 11시였다. 이윤락 중위가 반도의 통보를 받아왔다. 오후 1시에 회담하자는 것이었다”고 쓰고 있다. 협상일을 4월 28일로 못 박은 것이다.

 

유고에는 또한 “수삼 일에 걸쳐 전투가 종식되고…”란 표현과 함께 평화협상 이후 전개된 귀순활동의 진행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만약 4월 30일 협상을 했고, 다음날 오라리 방화가 발생됐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록을 남긴 셈이다.

 

이런 혼선은 협상 당사자인 김익렬의 이름으로 발표된 기고문과 유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우리는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증언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바로 김달삼과의 협상 자리에 배석했고, 오라리 방화 현장도 직접 조사했던 9연대 정보주임 출신 이윤락 중위의 증언록이다.

 

이 중위는 “협상은 어려운 고비를 넘겨 성공적으로 마쳤고, 천막을 치고 선무공작을 하고 있던 휴전 기간에 오라리에 폭도들이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먼저 흥분했다”고 증언했다. 중대한 배신행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장 조사결과 경찰 지원을 받은 우익청년들의 소행으로 결론 내리고 맨스필드 중령을 방문했지만, 그가 발을 뺐고 결국 미 CIC장교를 만나 강경토벌 방침을 통보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중위는 이미 발표됐던 협상일 4월 28일에도 토를 달지 않았다. 이를 수긍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국제신문』 기고문의 진위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다시 부산으로 연락했지만 이 중위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최종적으로 김익렬 장군의 가족에게 연락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한자 한자 직접 쓴 유고록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국제신문』에 아버지 명의로 기고문이 발표됐다고 하나, 그 글이 과연 누가 쓴 글인지, 또한 아버지가 유고를 쓰면서 그 기고문 존재를 몰라서 달리 표현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결국 『국제신문』 기고문이 누가 쓴 글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이런 경우 기자가 발표자의 구술을 듣고 직접 쓰는 사례도 많다. 여러 상황을 종합한 결과, 진상조사보고서에는 김익렬이 직접 쓴 유고를 중심으로 기술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만약 김익렬 유고가 없었다면”

 

어떤 회고록이라 할지라도 완벽할 수는 없다. 또 개인의 글이기 때문에 자신을 미화할 수도 있고, 자기 판단에 매몰될 수도 있다. 김익렬 장군도 이 점을 인식했다. 글 말미에 “그런데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나의 무식의 소산이거나 교양 부족에서 생긴 편견일 것이다.”라고 단서를 달았다.

 

한번 상상해 보라. 김익렬 유고가 없었다면 미군정 고위층의 토벌정책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을까? 초토작전의 발상이 미군 측에서 제안됐던 사실을 비롯하여 ‘4‧28 평화협상’, ‘5‧1 오라리 방화사건’, ‘5‧3 기습사건’의 실체는? 그리고 회의내용을 극비에 붙인 ‘5‧5 최고 수뇌회의’의 참 모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염려는 당시 실제로 일어났다. 제주에서 수뇌회의를 주재한 딘 군정장관은 귀경한 다음 날인 5월 6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현지 실정과는 판이한 ‘거짓 내용’을 진술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김익렬 유고록이 없었다면 딘 장군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진실처럼 보였을 것이 아닌가?

 

첫째는 군과 경찰의 관계이다. 바로 전날 경찰 총수와 현지 연대장이 육탄전을 벌었고, 연대장을 해임까지 해놓고도 “현재의 제주도 분위기는 평온하게 유지되고 있다. 경찰과 국방경비대가 협력하고 있으므로 불원 완전히 평정되어…”라고 표현했다.

 

둘째는 ‘공산 반란’으로 몰아가는 전략이다. “제주도 외에서 들어온 공산주의자들의 선동과 모략과 위협에 잘못 인도된 청년들이 … 살해하고 방화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김익렬 연대장의 유고는 그 후 제주4‧3을 소재로 한 TV 드라마나 소설에도 많이 인용됐다. 1992년 화제를 불러일으킨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비롯하여 한림화의 장편소설 [한라산의 노을](1991년), 오성찬의 소설 [죽은 장군의 증언](2000년), 김시태의 장편소설 [연북정](2006년)의 소재가 되었다. 몇 년 전에는 황석영의 소설 [강남몽](2010년)에 삽화처럼 언급되기도 했다.

 

김익렬 유고 원본은 현재 제주4‧3평화기념관 ‘의로운 사람’ 코너에 전시되어 있다. ‘집단학살 속의 의로운 바람’이라는 그 코너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학살을 막기 위해 힘썼던 독일인 ‘쉰들러’가 있었다면, 제주4·3사건 때에는 ‘김익렬 연대장’과 ‘문형순 경찰서장’이 있었다.” <9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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