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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18) 화장 후 바다에? 의문투성이 장례절차

 

1992년 발견된 ‘다랑쉬굴’ 유해 11구가 화장 후 서둘러 바다에 뿌려지는 과정은 의문투성이다. 그 의혹은 그 때나 지금이나 풀리지 않고 있다.

 

그 당시 사회분위기는 캄캄한 동굴 속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4‧3 유해들을 양지 바른 곳에 안식처를 마련해서 안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였다. 다랑쉬굴 유해들은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참하게 희생된 상징이고, 유족들의 한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도 도민적인 진혼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정언 제주도의회 의장이나 국회의원 당선자 신분인 양정규 의원 등도 공개적으로 “예의를 갖춰 영혼들을 안장시킬 수 있는 진혼의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당시 도정 최고책임자도 처음에는 이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4월 21일에는 종교계와 시민단체 등이 참여한 ‘다랑쉬굴 4‧3희생자 대책위원회’가 조직되어 범도민적인 장례절차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얼마 없어서 다랑쉬굴 유해들을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 흔적을 없앤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게 현실화되었다. ‘유족들의 뜻’이라는 미명아래 행정기관이 슬슬 뒷걸음질 친 것이다.

 

읍장에게 총대를 맡긴 장례절차도 의문

 

이제부터 장례절차에서 나타난 수상한 점과 행정기관에서 그렇게 앞세웠던 ‘유족들의 뜻’의 실체를 살펴보겠다. 첫 번째 의문점은 이런 중대한 장례절차를 ‘구좌읍장’에게 총대를 메도록 한 점이다. 과연 그것이 적절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유해의 화장 문제가 확정된 것은 1992년 5월 4일 구좌읍장실에서 열린 회의에서였다. 구좌읍장과 읍사무소 간부, 일부 이장, 유족 대표들이 모여 다랑쉬굴 유해 사후처리를 협의한 결과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그날의 회의록을 보면 유족 대표 2명이 참석한 것으로 되어있다. 행정당국에서는 매장하기를 바랐으나, 유족 대표가 화장하는 쪽을 강력히 희망했기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동안 떠돌던 풍문이 현실화된 것이다.

 

행정당국은 이 때부터 “유족들의 뜻에 따라서…”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리고 모든 장례절차는 구좌읍장이 추진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 있었다. 그 자체가 수상했다. 이런 중대한 장례절차를 어떻게 읍장 책임 아래 진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전에 있었던 유족회의에서는 ‘합동묘역을 조성하여 안장’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데 한 유족이 나타나 화장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화장 장례 방안을 유독 주장한 사람은 고 아무개였다.

 

그가 5월 4일 읍장실에서 열린 회의에서도 ‘유족 대표’를 자처하고 화장방안을 확정시켰다. 그의 발언록을 보면, 이해 안 되는 대목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그는 어이없게도 직계유족도 아니었다.

 

희생자의 먼 친척이 ‘유족 대표’로 행세

 

어느 희생자의 5촌뻘 친척으로, 유족 범위를 확대한 현행 4‧3특별법에 의하더라도 법적인 ‘유족’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울산에 사는 희생자의 아들로부터 위임받았다면서 유족 대표 행세를 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당시 60대 중반의 그의 집(종달리)을 직접 방문해서 화장을 주장하는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는 유족 상당수가 육지부에 나가 살고 있기 때문에 무덤을 만들면 고향에 있는 유족들만 벌초하는 번거로움이 있다고 들이댔다.

 

내가 합장묘를 만들면 그런 문제는 풀 수 있다고 제기하자, 이번에는 세화 습격사건과 연계하며 “무덤을 만들면 세화리 피해유족들이 똥과 오줌을 쌀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들이댔다. 유해를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기로 단단히 작심한 사람이었다. 정상적인 대화가 안됐다.

 

나는 그 길로 이윤식 구좌읍장을 만났다. 읍장은 유해 화장은 유족의 뜻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 유물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유족의 뜻에 따라 폐기처분하겠다는 것이 읍장의 답변이었다.

 

나는 유물이라도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굴에 있는 물건들은 단순히 유족들만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역사적인 유물”이라고 강조하면서 현장에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당위성을 역설했다.

 

황급한 이장으로 도의회 의장, 취재진도 발 돌려

 

5월 15일 새벽 다랑쉬굴 유해 11구가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유해는 빛을 쬐자마자 바로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당초 유해는 다랑쉬굴 현장에서 장례식을 마친 뒤 오전 8시에 현장을 떠날 계획이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1시간 앞당겨 현장을 떠나고 말았다.

 

따라서 장례식에 참석하려던 제주도의회 장정언 의장과 이영길‧이재현 도의원, 취재기자들은 헛걸음을 하고 급히 화장장으로 향해야 했다. 유해가 나온 동굴 입구는 다시 커다란 돌로 봉쇄되었다. 그나마 유물은 그대로 굴속에 남겨졌다.

 

그런 의문의 현장을 유심히 보고 있었던 외국 기자가 있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기무라 고조(木村晃三) 편집위원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 외국 특파원 활동을 했던 베테랑 기자였다.

 

『요미우리신문』은 그 무렵 ‘20세기 100대 사건’을 선정해서 현지 취재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지난 100 년 동안 일어난 사건 중 특이한 사건 100건을 뽑아서 그 현장을 되돌아보는 기획이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는 한국전쟁, 4‧19혁명, 그리고 제주4‧3사건이 꼽혔다고 한다. 제민일보를 찾아온 그에게 나는 의아해서 “어떻게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제주4‧3이 선정됐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의 답변은 이랬다. 첫째는 제주도처럼 좁은 공간에서 민간인들이 대량 학살된 점, 두 번째는 그런 중대한 사건이 한국 안에서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점을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의 지적은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4‧3 취재차 제주에 왔던 그는 다랑쉬굴 유해 장례가 새로운 문제로 부각되자 당초 일정을 연장하면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아침 그 역시 4‧3취재반과 함께 다랑쉬굴 현장에 갔다가 유해들이 일찍 떠나는 바람에 화장장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종이컵 소주와 과일 몇 알이 전부인 초라한 제상

 

산천단 화장장은 침울한 분위기였다. 당시의 장례 절차가 얼마나 엉성하고 초라했는지는 김기삼 씨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명색이 ‘도민장’까지 거론되던 11구의 영결식인데도 제상에 올려진 것은 술이 담긴 열 한 개의 종이컵, 과일 몇 알이 전부였다.

 

몇 년 전 제주국제공항에서 발굴된 4‧3 유해의 정중한 장례식 광경과 너무 비교되는 대목이다. 4‧3평화공원 안에 봉안관이 마련됐고, 많은 유족과 지역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발인제, 하관제, 봉안제 등 장례절차가 정중하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다랑쉬굴 유해 발굴 당시 반공 색채를 띠었던 4‧3유족회와 오늘의 4‧3유족회의 역할과 기능이 대비되면서 지난 20여 년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다랑쉬굴 유해 발굴 당시에도 경기도에서 온 유족 고광치 씨는 “뼛가루 11분의 1을 주면 따로 매장하겠다”고 나섰지만 그 마저도 거절당했다. 화장된 유해는 김녕 앞바다로 옮겨져 바다에 뿌려졌다.

 

마지막 떠나는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유족들이 탄 배에 승선하려던 4‧3취재반 김종민 기자를 읍사무소 직원과 경찰이 가로막아 심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행정기관과 경찰은 왜 취재까지 막으려 했을까?

 

이를 보던 유족들의 거센 항의 덕분에 김 기자는 겨우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한 줌의 재로 변한 뼛가루를 바다에 뿌리며 울부짖는 유족들의 모습을 촬영한 유일한 취재기자였다.

 

 

지독한 레드 콤플렉스가 작동한 의혹

 

외압이 없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이 일의 사단은 1차적으로 그 이해할 수 없는 ‘유족 대표’에게 있었다. 뒤늦게나마 그의 가족사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취재에 나섰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항일투사였다. 해녀항쟁의 배후 인물로 지목받아 일경에 잡혀 1년간 옥살이도 했다. 그런 독립투사가 해방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북송선을 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북에 갔다니.

 

군사정권 시절 그 ‘유족 대표’가 겪었을 마음고생이 어떠했을지 쉽게 짐작이 갔다. 그 빈틈에 지독한 레드 콤플렉스가 작동했을 것이다. 공안당국은 다랑쉬굴 희생자들의 무덤이 만들어지는 것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분위기로 보아 대학생이나 재야인사들의 ‘순례 성지’가 될 것이 뻔히 예견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보다 심층적인 조사가 필요했다.

 

나는 이 회고록을 쓰기 위해 2011년부터 보충 취재에 나섰다. 다랑쉬굴 상황을 재조사하면서 그 ‘유족 대표’를 다시 만나 보기로 한 것이다. 수소문했더니 아뿔싸, 그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생전에 유족의 자격을 위임받았다고 했던 울산의 직계 유족을 찾아보기로 했다.

 

직계 유족 “위임 사실 없다”… 그렇다면?

 

울산에 사는 다랑쉬굴 희생자의 아들은 나와의 통화에서 문제의 그 ‘유족 대표’와는 6촌간이라고 밝혔다. 나는 “그 사람이 선생으로부터 유족의 신분을 위임받아 유해의 화장과 바다에 뿌리는 일에 앞장섰다”면서 위임 사실이 있느냐고 물었다.

 

직계 유족은 “위임 사실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6촌으로부터 사전에 어떤 협의나 연락도 없었다면서 “나는 읍사무소로부터 통지가 왔기에 장례 하루 이틀 전에 제주에 가보니 모든 장례 절차가 확정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유족의 뜻에 따라서’ 모든 장례 절차를 집행했다는 당국의 주장은 어떻게 된 것인가? 특정인의 의도에 휘말렸거나,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의 움직임에 동조했다는 두 가지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 진실은 언제라도 밝혀져야 한다

 

그 진실은 언제라도 밝혀져야 한다. 또한 현재 방치되고 있는 다랑쉬굴 현장은 유적지로 보전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유해 발굴 보도가 나간 후 4‧3연구소와 4‧3취재반 사이에 세밀한 협력체제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점은 양쪽 모두 반성해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당시의 정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얼마 전 이윤식 전 읍장을 다시 만났다. 그는 나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지금으로선 그 일을 읍에서 주관한 것이 (나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 혼미한 시대 상황의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답변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이 다랑쉬굴 사건은 결과적으로 4‧3의 총체적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고 말았다. 피난 입산 → 참혹한 죽음 → 은폐된 시신 → 발굴 후의 논란 → 수장과 봉쇄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4‧3이 안고 있는 발굴 당시의 모순을 응축하고 있다는 뜻이다.

 

공안당국은 희생자의 무덤을 만들지 않은 것이 ‘흔적을 지우는 일’이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후에 전개된 상황을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유해 처리가 역설적으로 오히려 이 사건의 생명력을 더욱 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없애버린 유해, 4‧3은폐 상징으로 부활

 

그 첫 번째는 외신의 보도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다랑쉬굴 유해 발굴과 이해할 수 없는 장례절차를 대서특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하루 1000만부를 넘게 찍어내 발행부수에서는 세계 제1위의 신문이다. 200만부를 발행한다고 자랑하는 발행부수 1위의 한국 모 신문과 비교해도 격차가 크다.

 

4‧3이란 중대한 사건이 한국 안에서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주목했다는 기무라 고조 편집위원은 서둘러 진행된 다랑쉬굴 유해 처리 과정도 보도했다. 그 내용은 요미우리신문사에서 발간한 [현대사 재방(現代史 在訪)]이라는 책자에도 실려 이 사건이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두 번째는 영상으로 재연되었다. 다랑쉬굴을 처음 발견한 김동만은 1993년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란 독립영화를 만들었다. 시신 발견과 진상조사 과정, 그리고 유해 화장과 바다로 가는 과정이 35분의 영상에 생생히 담겨있다. 1999년에는 제주MBC TV가 <4‧3 인권보고서 - 다랑쉬굴의 침묵>(송창우‧김찬석 기자)을 제작, 방영했다.

 

세 번째는 상생굿과 사진집 발간으로 복원되었다. 다랑쉬굴 참상이 세상에 알려진 지 10년째 되는 2002년에는 제주민예총 주관으로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다. 다랑쉬굴 현지에서 해원 상생굿이 진행됐고, 다랑쉬굴의 사진‧비디오‧유물 등의 전시회도 열렸다. 사진집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사진 김기삼, 글 김동만)도 발간되었다.

 

네 번째는 2008년 개관된 제주4‧3평화기념관에 다랑쉬굴 참상현장을 그대로 재현한 상설 특별관이 설치된 점이다. 다랑쉬굴 유해 발굴 당시 모습을 그대로 살려냄으로써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다랑쉬굴 특별관은 캄캄한 굴속에 갇혔던 유해 모습도 살려냈다. 그리고 ‘다랑쉬굴 사건의 전모’, ‘다랑쉬굴의 발견’, ‘안장에서 화장으로’의 패널을 통해 전 과정이 소개되었다. 해마다 2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는 전시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다랑쉬굴의 유해는 발견 당시부터 4‧3참극의 상징이 되었다. 그 희생은 저항도 못하는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초토화작전의 실상이었고, 캄캄한 굴속에 갇혔다가 40여 년 만에 햇빛을 보았지만 허무하게 화장된 것은 진실을 은폐하고 외면하려고 했던 당시대의 현주소였다.”

 

다랑쉬굴 비극이 세상에 알려진 지 20주년이 되던 2012년 4월 2일, 『한겨레신문』은 이에 관한 특집기사를 실었다. 다랑쉬굴의 비극을 처음으로 증언한 채정옥 옹(86세)의 비애어린 한마디가 가슴을 찔렀다.

 

“너무 일찍 세상에 알려진 것은 아닌지, 노무현 대통령은 4‧3 유족들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소? 그 뒤에 발견됐으면 유족들도 희생자들의 한을 풀고 안장하자고 했을 거요.”

 

그렇다. 만약 지금 이 시점에서 그런 한 맺힌 유해가 발견됐을 때,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감히 누가 그런 공작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사회분위기나 4‧3유족회가 그걸 용납할까?

 

다시 묻고 싶다. 이래도 당시 관계자들은 ‘유족들의 뜻에 따라’ 유해를 화장했고, 바다에 뿌렸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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