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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58)… ‘갈등연구센터’도 모범사례로 인정

2014년 10월 2일 서울의 심장 광화문에 있는 프레스센터에서 특이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행사의 이름은 ‘한국사회 갈등 정책토론회’인데, 그 곳에서 제주4·3이 이념갈등을 극복한 대표적 사례로 발표하게 된 것이다.

 

이 토론회는 진보진영에서 주최한 행사도 아니다. 대통령 직속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 재단법인 행복세상(이사장 김성호), 성균관대 갈등해결연구센터, 조선일보가 공동 주최한 행사였다. 행사 예산도 국무총리실에서 지원했다.

 

한마디로 보수 성향이 강한 주최 측에서 이념갈등 극복사례로 제주4·3을 선택했다는 자체가 의미심장했다.

 

정부지원 정책토론회에서 사례발표
그 행사 한 달 전쯤 성균관대 갈등해결연구센터장 강영진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환경부지사로 재직할 때, 강정 해군기지 갈등 문제를 어떻게 풀면 좋을지 갈등해결학 박사인 그에게 자문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강 교수는 뜻밖에도 이념갈등 극복 정책토론회가 있는데 ‘제주4·3사건: 이념갈등 극복과 화해의 길’이란 주제로 발표해 줄 수 없겠느냐고 제안했다.

 

즉, 국무총리실 지원 아래 한국사회 갈등 정책토론회가 4개 분야를 주제로 진행되고 있는데, 지난 5월에 노동 분야, 7월에 공공갈등 분야가 열렸고, 10월에는 이념갈등 분야에 대한 토론회가 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념갈등 극복 대표적인 사례연구로 제주4·3이 선정됐기에 연락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선정 이유가 궁금했다.

 

강 교수는 제주4·3사건의 상흔과 갈등 실상, 억압 속의 진실규명 활동, 그 과정에서 일어난 대립과 해소과정, 60여 년 동안 대립했던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와의 화해, 올해 국가기념일이 지정되기까지의 과정과 비극의 역사였던 4·3이 오늘날 평화·인권·화해·상생의 상징으로 거듭나게 된 배경을 설명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 토론회에서는 이념, 남북, 역사, 언론, 종교 갈등 등에 대해서도 다뤄지는데, 다른 분야의 발표시간은 25분씩, 나에게는 특별히 35분의 시간을 할애하겠다는 것이었다.

 

강 교수의 주문을 보면, 4·3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과정을 꿰뚫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더욱이 65년 만에 반목의 시대를 접고 손을 맞잡은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의 화해를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경우회와 유족회장도 행사장에 초대
주최 측은 화해 당사자인 정문현 4·3유족회장과 현창하 제주경우회장이 함께 행사장에 참석하면 더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래서 두 분께 연락했더니 쾌히 승낙했다.

 

행사 당일, 김두연 4·3실무위 부위원장을 포함해 제주에서 올라간 우리 4명은 본 행사 전 이뤄진 오찬행사에서 주빈 대접을 받았다. 이날 오찬장에는 다른 분야 발표자들도 함께 했지만 온통 화제는 이념 갈등을 극복한 4·3이었다.

 

오찬 주재자인 재단법인 행복세상 김성호 이사장은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 때 법무장관을, 이명박 정부 때 국정원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는 유족회장과 경우회장에게 번갈아 질문하면서 두 단체의 화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이날 오후 2시 ‘냉전유산 극복, 이념대립을 넘어 성숙한 사회로’란 주제로 열린 정책토론회 시작 전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보수회원들 발표자 가로막고 소란 피워
자칭 ‘제주4·3사건 바로잡기 대책회의’ 대표인 이선교 목사가 이끄는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이 나의 행사장 입장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이 목사는 “가짜 보고서를 쓴 사람은 입장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나의 입장을 막은 것이다.

 


 

 

한 노인이 어깨에 걸친 팻말에는 “4·3 보고서를 가짜로 작성하여 국군과 경찰을 학살자로 만들었다”는 문구가 있었다. 그 팻말은 이미 이 목사가 강연할 때 직접 목에 걸고 사용했던 것이다.

 

이 목사가 어떤 연유로 4·3문제에 사사건건 끼어든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가 이때 칠순이 넘었다는 사실, 이북 출신이란 것만 알려졌다.

 

그는 2003년 4·3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고, 대통령의 사과 표명이 있은 직후부터 4·3문제에 개입했다. 그가 주도적으로 만든 단체 이름이 ‘제주4·3사건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대책위원회’였다.

 

4·3에 대한 기존의 정부문서들이 왜곡됐다는 민원이 그치지 않아 특별법이 제정되고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이 추진된 것인데, 이번에는 역으로 4·3진상조사보고서가 왜곡되었다면서 보수단체가 ‘역사바로잡기 운동’을 벌이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는 집요하게 덤벼들었다. 2004년 4·3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 사과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할 때에는 전국적으로 서명운동을 벌여 185,689명의 서명지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날 갈등 정책토론회에서 이 목사 등이 발표자의 입장을 가로막자 오히려 주최 측이 당황해했다. 덩달아 정문현 4·3유족회장 등이 “이 무슨 행패냐?”고 항의하며 주최 측에 대책을 촉구했다.
 

 

 

 

결국 주최 측이 강하게 나서면서 내가 행사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 목사 등은 행사장에서 “제주4·3사건보고서는 가짜이므로 다시 써야 합니다”라고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실렸던 광고문을 내보이며 소란을 피웠다.

 

이선교 목사 퇴장명령에 버티기
한광옥 국민대통합위 위원장, 김성호 행복세상 이사장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수단체 일부가 계속 소란을 피우자 주최 측이 제동에 나섰다. 결국 이 목사에게 퇴장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 목사가 안 나가려고 버티었고,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은 오히려 “가짜 보고서를 쓴 사람을 먼저 퇴장시켜야 이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계속 소란이 이어지자 주최 측이 나의 발표 이후 그들에게도 20분간의 반론 시간을 준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항의 소동은 풀어졌다.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나의 발표순서는 맨 마지막으로 미뤄졌다.

 

예정시간 보다 20분가량 늦게 시작된 개회식에서 김성호 이사장은 “혹시 이 자리에서 보수와 진보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실 수 있는 분 계신가요? 보수와 진보가 토론과 타협의 과정을 통해 사회를 지탱할 이념의 양축으로 서지 못하고 흑백 논리에 따라 무조건적인 반대, 투쟁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어 실로 아쉽고 통탄스럽다”고 말했다.

 

이어서 국민대통합위원회 한광옥 위원장은 환영사에서 “이념갈등은 소통을 가로막고 불신을 조장해서 사회통합의 근본을 흔들게 한다”면서 “무분별한 이념갈등, 극단적인 대결은 지양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이날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제주4·3사건 이념갈등 극복과 화해의 길’이란 나의 주제발표가 시작됐다. 나는 가짜보고서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주장에 맞서 “4·3진상조사보고서는 법률의 절차에 의해 확정된 법정보고서이기 때문에 법 개정을 통해 재심의 절차를 밟지 않은 한 그 누구도 임의로 수정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나는 “4·3진실규명운동사와 4·3위원회 활동사는 이미 2008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박사학위논문에서 전 세계적으로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공사례로 평가한 바 있다”고 소개한 뒤 “이념갈등을 극복한 4·3문제 해결은 진실규명과 명예회복뿐만 아니라 화해와 상생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특별법에 의한 진실규명, 대통령 사과, 세계평화의 섬 선포, 보수정권에서의 4·3추념일 국가기념일 지정, 60여 년 동안 대립해왔던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의 화해 등을 들었고, “제주에서는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이 4·3에 한해서는 화해와 상생의 배에 함께 타게 됐다”고 소개했다.
 

 

 

 

 

나는 “그러나 역사 화해는 단기간에 실현 가능한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것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덜어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4·3 역시 갈등의 여진이 남아있다”고 털어놨다.

 

끝으로 “그럼에도 국민적 공감대를 얻기 위해서 지속적인 대화, 인내, 노력이 필요하며 특히 이념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냉전 상황을 거시적으로 보는 눈과 이분법보다는 역지사지의 사고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조기 진압하지 않았으면 10만명 죽을 뻔”
이어서 이선교 목사, 제주에서 올라간 제주4·3사건정립연구유족회 홍석표 공동대표, 예비역 육군 중령 출신인 나종삼 전 전문위원 등 세 사람이 나서서 반론을 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4·3진상조사보고서는 가짜 보고서이고, 그 진상이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그날의 발표내용을 정리해서 나중에 발간된 「사회적 갈등 종합정책보고서」 책자를 보니, 그들의 주장 가운데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초기 강경진압하고 계엄령도 해서 진압하니 망정이지 그대로 내버려뒀다면 제주도는 6·25 전까지 해방구가 되어 10만 명도 더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었다.

 

이날 행사에 대해 제주지역 언론은 보수단체의 처사를 비판하며 “빈축을 샀고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고 보도했다. 이날 행사를 훼방한 보수단체 회원들에 대해선 “오래전부터 ‘4·3 가짜보고서’, ‘4·3 폭도공원’ 등 극단적 용어를 쓰며 4·3 흔들기를 해왔다”고 지적했다.

 

이에 비해 화해 당사자인 4·3유족회 정문현 회장과 제주경우회 현창하 회장이 나란히 참석해 주최 측의 소개로 참석자로부터 박수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공동주최한 조선일보는 침묵
이에 반해서 보수계열의 언론은 “본말이 전도된 사회적 갈등 해소를 위한 정책토론회”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정통 건국사적 제주4·3의 역사를 민중봉기로 왜곡시키며 변질시킨 장본인을 이념갈등 극복 발표자로 선정한 자체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민대통합위원회는 우리 사회에 내재된 상처와 갈등을 치유하고, 공존과 상생의 문화를 정착하며, 새로운 대한민국의 가치를 도출하기 위한 정책과 사업에 관하여 대통령의 자문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인데, 큰 실수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난했다.

 

나는 이 행사의 공동 주최 측인 조선일보는 이 사안에 대해 과연 어떻게 보도했을까 궁금해졌다. 그 후로 여러 번 검색해 봤지만 그날의 4·3 발표에 관한 기사는 없었다. 나의 발표 내용뿐만 아니라 보수단체의 항의소동도 다루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킨 것이다.

 

그런데 보수단체로부터 그런 비난을 받은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은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1월 6일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정문현 4·3유족회장과 현창하 제주경우회장과 함께 헌화하고 분향했다.

 

한 위원장은 위패봉안실과 유해봉안실을 차례로 참배하고 유해 발굴 당시를 재현한 전시물을 보면서 참담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4월 3일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했는데, 우리가 아픈 역사를 화해와 용서로 풀어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부 보수단체들의 주장과는 다른 입장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그에 앞서 10월 28일 화해의 당사자인 정문현 유족회장과 현창하 경우회장이 박근혜 대통령과 2만5천명의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제95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이 열린 제주종합경기장 그라운드에 나란히 성화봉송 주자로 입장한 사실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대통령에게 남남갈등 극복사례로 보고
이 파장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퍼졌다. 그해 12월 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한 통일준비위원회에서 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경우회의 화해 노력이 대표적인 남남 갈등의 극복사례로 보고된 것이다.

 

이날 ‘통일 준비를 위한 국민 공감대 형성 방안’이란 주제의 보고회에서 전우택 통일준비위원은 전국체전에서 이념을 달리해온 유족회장과 경우회장이 공동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선 것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념 갈등으로서의 남남 갈등은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 사회 갈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따라서 남남 갈등 극복은 통일 준비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보수와 진보의 상호 신뢰 구축은 남북 갈등에서 뿐만 아니라 남남 갈등에서도 적용되어야할 개념”이라고 규정하고 “남남 갈등 극복을 위해서는 분단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적극적인 사회적 치유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4·3의 무게가 다른 과거사에 비해서 훨씬 무겁다는 것을 체득하게 되었다. 4·3은 변방의 역사가 아니라, 국제적 냉전과 한반도 분단을 관통하는 세계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4·3이 일부 보수세력에 의해 여전히 이념문제로만 덧칠해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언젠가 닥칠 통일시대를 맞게 된다면 과연 이념갈등 극복 사례로 무얼 떠올릴 것인가?

 

4·3은 통일을 지향한 그 자체의 역사로서도 의미 있지만, 이후의 진상규명 운동,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평화의 섬을 일궈낸 일련의 과정은 남남갈등을 넘어 남북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통일 이후 이념갈등 극복의 성공모델로서 재조명될 것이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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