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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50)… 4‧3 수형자의 명예회복 비화

심사기준 결정부터 힘겨루기
제주4‧3특별법에 정의된 ‘희생자’의 범위는 “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후유장애가 남아 있는 자로서 4‧3위원회에서 심의‧결정된 자”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희생자 심의‧결정 기준은 명시돼 있지 않았다. 따라서 희생자 심사를 어떤 기본원칙으로 할 것인지, 희생자 범위에서 제외될 대상은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구체적인 심의‧결정 방법은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국무총리 소속의 4‧3위원회는 2001년 10월 11일 희생자심사소위원회(위원장 박재승 변호사)를 출범시켰다. 이 심사소위에 닥친 첫 과제가 바로 심사기준을 정하는 일이었다.

 

막상 심사기준을 만들려고 하니, 가장 예민한 문제로 대두된 것이 ‘희생자 제외대상 범위’였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심사소위 위원들을 곤혹스럽게 한 것이 있었다. 바로 헌법재판소(헌재)가 예시한 ‘희생자 명예회복 제외기준’이었다.

 

헌재는 2001년 9월 27일 성우회 등이 제기한 4‧3특별법의 위헌심판 청구를 각하 결정하면서도, 별도로 희생자 명예회복 제외대상자를 예시했다, 즉, 1) 수괴급 무장병력 지휘관 및 중간간부, 2)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간부, 3) 주도적‧적극적으로 살인‧방화에 가담한 자를 꼽았다.

 

심사소위 내에서는 이 헌재 기준보다 더 강화된 안을 만들자는 의견과 이에 개의치 말고 희생자 범위를 폭넓게 인정하자는 의견이 맞섰다.

 

 

보수단체에서는 2001년 12월 12일 “무장폭도가 희생자로 둔갑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희생자 심사기준 강화를 촉구했다. 그래서 희생자 심사기준 논의가 더디게 진행됐다.

 

이에 맞서 4‧3유족회는 12월 21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제주4‧3문제 해결 촉구를 위한 유족 총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조속한 희생자 심사를 촉구했다.

 

 

보수단체 “수형자는 절대 안된다” 제동
이런 진통을 겪고 심사기준이 마련됐다. 이 안은 논란 끝에 심사소위를 통과한 뒤, 2002년 3월 14일 이한동 국무총리가 주재한 제4차 4‧3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결됐다.

 

이 심사기준 중 논란이 됐던 ‘희생자 제외대상’은 1) 제주4‧3사건 발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2)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무장대 수괴급 등으로 정하되, “이 경우 그러한 행위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명백한 증거자료가 있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4‧3희생자 심사는 이런 격랑을 타면서 한발씩 앞으로 나아갔다. 드디어 2002년 11월 20일 김석수 국무총리가 주재한 제5차 4‧3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희생자 1715명이 처음으로 결정됐다. 그리고 2003년에 3329명, 2004년에 1246명이 4‧3희생자로 각각 결정됐다.

 

그런데 2004년에 이르러, 희생자 심사가 더디게 진행됐다. 민감한 수형자 심사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뤄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유보됐던 수형자에 대한 심사가 재개되자 “유죄판결을 받은 수형자들은 4‧3희생자로 결정돼서는 절대 안 된다.”는 보수단체의 성명이 잇따랐다.

 

그때까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에 진력했던 나와 김종민 전문위원은 보고서 작성 업무가 종료되자 이 무렵부터 희생자 심사업무에 관여하게 됐다. 그리고 처음 부닥친 난제가 바로 수형자 심사였다.

 

국방·법무장관도 수형자 심사 반대
2005년 3월 17일, 희생자 3,541명에 대한 심사안건이 상정된 제10차 4‧3위원회 전체회의는 회의 전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동안 “된다” “안된다”로 논란이 많았던 수형자 606명이 처음으로 상정되었기 때문이다.

 

이해찬 국무총리가 주재한 이날 회의에서 수형자 심의안건이 상정되자, 예상했던 대로 윤광웅 국방장관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윤 장관은 “당시 진압작전을 수행했거나 군법회의를 담당했던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고, 안보 관련 단체에서 수형자 모두를 희생자로 결정하는데 다른 의견이 있다.”고 전하고, “따라서, 수형자 심사는 좀 더 객관적이고, 정확한 자료를 모아 신중히 결정하기 위해 재고해 달라”면서 심의 연기를 주장했다.

 

이어 국방부 추천 위원인 유재갑 위원이 나서 강도 높게 수형자 심사문제를 비난했다. 이렇게 되자 분위기는 초반부터 싸늘하게 됐다.

 

이에 맞서 희생자심사소위원회 위원인 임문철‧김삼웅‧서중석‧박창욱 위원 등이 차례로 나서서 군법회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심사소위의 결의대로 원안 통과를 주장했다.

 

찬반 의견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김승규 법무장관이 마이크를 잡았다. 김 장관은 먼저 “헌법재판소에서 네 가지 기준을 제시했고, 수형인명부에 죄명이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수형자 모두를 희생자로 보기는 어렵다.”고 포문을 열었다.

 

김 장관은 이어 “이 점은 신중히 가려야 될 필요가 있으므로 자료를 찾아보고 최대한 판단해서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합당하다.”면서 “따라서, 수형자 심사는 따로 떼어서 별도로 검토하자”고 제안했다.

 

뒷좌석에 배석했던 나는 그 순간, “아, 수형자 통과 오늘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진보 성향의 이해찬 총리라 할지라도, 일국의 법무‧국방장관이 반대하고 나서는 판국이니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십중팔구 다음 회의로 넘길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이었다.

 

“재판도 판결문도 없는 군법회의”
그때, 희생자심사소위 위원장인 박재승 변호사가 나섰다. 판사 출신인 그는 당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법조계 거물인사였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재판정에서 판결하듯 논거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특별법이 제정되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가 나왔고, 그 결과로 대통령이 사과한 사실을 상기시킨 후, “국방부장관과 법무부장관, 또한 다른 분들의 이해를 도와드릴까 해서 어떤 노력을 해서 진상보고서가 됐고, 그동안 심사소위가 어떤 심의를 해왔는지 말씀을 드리겠다.”면서 포문을 열었다.

 

박 위원장은 이어 15분가량 4‧3 군법회의의 허구성과 불법성을 10여 가지 사례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따졌다.

 

“저희 소위원회는 이렇게 접근을 했습니다. 소위 4‧3군법회의를 받았다는 사람 30명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한결같이 군경의 취조를 받았지만 재판을 받아본 적이 없다, 여기서 재판이라는 것은 검찰관의 직접 심문과 거기에 대한 항변, 자기 방어권 행사, 구형, 변론 이런 걸 말하겠죠. 그런 절차를 밟아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 사람들의 말이 맞는가를 보기 위해서 군법회의를 열었다는 9연대 혹은 2연대의 지휘부에 있었던 서종철, 전부일, 김정무 씨에 대한 진술 채록을 한 것을 봤습니다. 민간인에 대한 군법회의는 우리는 모른다는 겁니다. 세 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까 서른 분의 진술하고 부합됩니다. 군법회의가 없었다는 거죠. 그래서 국방부에 그러면 그 당시에 재판장은 누구며 심판관은 누구며 법무사는 누구며 검찰관은 누구냐 대라고 하니까 자료가 없다, 자료가 없는 이유는 모른다, 회신이 그렇게 옵니다. 국방부장관 아셔야 합니다.

 

그 다음에 또 당시 취조한 경찰, 호송했던 경찰들의 증언들을 봤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재판 없었다. 형무소에 간 뒤에 형량 알려줬다. 죄명 알려줬다' 이런 얘깁니다. 저희들이 기록에 관심을 가지고 혹시 다른 기록이 있는지 보자, 정부 기록보존소에 조회를 해도 없습니다. 없는 사유 모른다.

 

국방부 판결문 기록이 있느냐, 4‧3 군법회의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 없다, 이거예요. 없는 사유 모른다. 그런 공문이 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마산형무소에 소위 수형자 기록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제주4‧3사건에서 군법회의를 받고 거기에 수형됐던 다섯 명에 대한 기록을 봤더니 한결같이 군법회의를 받았다는 근거가 없습니다. 범죄 개요가 없습니다. 수형됐다는 사실만 있습니다. 다른 형무소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무소부터 보내 놓고 군법회의는 나중에?”
박재승 위원장은 비장한 목소리로 조목조목 따져갔다. 회의장 분위기가 갑자기 고요해졌다.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했던 법무‧국방장관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수형자 심사의 변곡점이 된 이날, 박 위원장의 발언은 거침없이 이어져 갔다.

 

“김춘배 씨는 마포형무소에 수형됐던 사람인데, 6‧25때 옥문이 열려 나와서 6~7년간 자기 집에서 지내다가 1962년도에 잔여형 집행문제로 체포가 됩니다.

 

‘난 군법회의에서 재판 받은 사실이 없다’ 해가지고 잔여형 집행에 이의 신청을 하니까 (1963년) 군법회의에서 심리 결과 재판 받았다는 자료가 없다, 그래서 형집행 취소결정이 됐습니다.

 

박상우라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던 사람인데, 희한합니다. 군법회의 재판이 이 사람이 대구형무소로 들어왔다는 날짜보다 더 뒤입니다. 그러니까 형무소 들어온 날이 1948년 12월 9일인데, 군법회의는 13일 날 됐다는 겁니다.

 

군법회의 안 받고 어떻게 수형자가 됩니까? 혹시 이게 미결구금 시작되는 날이 아닌가,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제주에서 군법회의 열리는데 미리 대구형무소에 넣어놓고 제주에서 군법회의를 한다? 그건 당시 교통사정으로 봐서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있을 수 없는 얘기지요.

 

또 경찰기록을 보면 자기들 조사해 가지고 A는 사형, B는 무기로 해서 올렸지 재판을 한 것은 모른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있는 것은 아까 법무부장관 말씀, '군법회의 명령'이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거 하나뿐입니다. 4282년도, 즉 1949년도 만들어진 군법회의의 명령서라는 것인데 거기에 81년도 것을 기재하면서 82년도 용지에다가 두자 작대기 있는 것을 밑에 하나를 그어 지웠습니다.

 

그것도 정정인도 없어요. 그걸 81년도 군법회의 명령서 용지로 썼습니다. 그러면 소급했다는 것이 누가 봐도 나타납니다.

 

 

또 판결의 내용, 명령서 내용을 보면 피고인 이름은 쭉 있고, '항변'이라는 난이 있는데, 거기에 전부 '무죄' 주장했다는 항변이 나옵니다. '항변 무죄' 이렇게만 써 있습니다. 피고인이 그렇게 항변했다는 거죠. 그리고 형량 나오고 죄명 나오고 형무소 나옵니다. 그런 간단간단한 서면입니다.

 

48년도 재판이 있었던 날짜가 12월 3일부터 27일까지 12번, 49년도에는 6월 23일부터 7월 7일까지 10번에 걸쳐서 재판을 했다는 거죠. 48년도 재판에서 871명을, 49년도에는 그 짧은 기간에 1,659명의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수형인 명부에 의하면.

 

그러면 한번 재판할 때 백 몇 십 명씩 재판했다는 겁니다. 이 피고인들은 하나같이 무죄 주장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면 검찰관이 직접 심문을 하고 그 많은 범죄사실에 항변 다 듣고 증거 조사하고, 나 억울하다 하면 증거 조사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구형하고 최후 진술하고. 이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자료를 갖고 오랜 시간을 걸려서 진상보고서가 작성됐습니다. 진상보고서 461쪽으로 기억합니다만, 거기에 이 4‧3 군법회의라는 것은 아무리 자료를 찾아봐도 적법한 절차를 거쳤다고 볼 자료가 없다, 따라서 '수형인'이라는 말 자체도 부적당하다, 그리고 형무소에 수감한 것은 '불법 감금'이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국가자료 없다면서 또 기다리라고?”
박재승 위원장은 이 대목에 이르자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판국인데, 그동안 국가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내어 놓으라고 수차례 요구했는데도 없다고 해놓고선 오늘 다시 신중히 하자고 하는데,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인가”고 일갈한 것이다.

 

 

박 위원장의 발언이 끝날 무렵 팽팽하던 무게추가 이미 기울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쐐기를 박듯 김태환 도지사가 나섰다.

 

김 지사는 그해 1월 있었던 제주도 세계평화의 섬 선포식에서 대통령이 4‧3을 과거사 정리의 모범이라 하신 말씀이 있었다고 상기시켰다. 김 지사는 “제주도는 이제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나아가고 있고, 제주도 실무위원회에서도 결론 내린 수형자 심의도 이런 정신으로 접근해줬으면 좋겠다.”고 발언했다.

 

회의장은 더 이상 반대론자들이 목소리를 높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날 수형자 606명이 극적으로 4‧3희생자로 결정됐다. 수형자 문제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회의장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김두연 회장, 홍성수 상임부회장 등 4‧3유족회 임원들은 이 소식이 알려지자 “마침내 구천을 떠돌던 영령들의 원혼이 풀리게 됐다.”면서 서로 얼싸안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 회의에 배석했던 총리실, 행정자치부 등 중앙 관료들도 놀라움을 표했다. 한 관료는 “국무회의에서 실세장관인 법무장관이나 국방장관 중 한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그 안건은 유보되는데, 오늘 박재승 변호사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했다.

 

그것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이란 ‘권위’에다 철저히 준비된 ‘진실’이 법무‧국방장관의 반대를 압도한 것으로 분석하고 싶다.

 

 

결국 사형수도 희생자로 인정받아
이렇게 해서 어렵게 여겨지던 4‧3 수형자에 대한 명예회복 물꼬가 터졌다. 이제 남은 관문은 군법회의 상의 사형수와 무기수에 대한 인정 여부였다. 심사소위에서 많은 격론이 있었지만, 결국 다수 의견으로 사형수와 무기수도 희생자로 인정하는 안이 채택됐다.

 

그 이유인즉, 정부 진상조사보고서에서 4‧3 군법회의를 불법으로 규정했을 뿐 더러, 4‧3특별법의 규정에 따라 ‘희생자’로 결정하는 것과 형사소송법상의 재심을 통해 무죄 또는 면소를 받는 것과는 별개의 사안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위원회가 정한 ‘희생자 제외대상’에 해당하지 않으면 희생자로 결정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불과 사흘 만에 345명에게 사형 선고했다고 하나 국내외 언론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은 점, 그 시신들을 암매장한 점 등 군법회의를 둘러싼 수많은 의혹들도 이런 결정을 하는데 한몫했다.

 

여기에다 유족들에게 희소식이 있었다. 국회 본회의가 2006년 12월 22일 희생자 범위에 사망자‧행방불명자‧후유장애자 이외에 ‘수형자’도 추가시키는 4‧3특별법 개정법률을 의결한 것이다. 강창일 국회의원 등이 발의한 이 개정법률이 통과됨으로써 결국 입법부도 4‧3 군법회의의 불법성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형수 318명과 무기수 238명을 4‧3 희생자로 인정하자는 심사안건이 상정된 제12차 4‧3위원회 전체회의는 2007년 3월 14일 권오규 국무총리권한대행 주재로 열렸다. 회의는 예상보다 쉽게 풀렸다.

 

물론 회의 중간 중간에 몇 차례 고성이 오갔지만, 예전 회의에 비해 그 강도가 낮았다. 국방부와 법무부 쪽에서 장관을 대신해서 차관들이 나와서 반대의견을 피력했지만, 역시 한풀 꺾인 기세였다.

 

심사소위 위원장인 박재승 변호사가 “아직도 이런 논쟁이 있다니 답답하다. 2005년 수형자들을 4‧3 희생자로 인정할 때 군법회의가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은 것을 법률적으로 충분히 검토했고, 진상조사보고서도 그렇게 나온 것이 아니냐.”고 질책성 발언을 하는데도 더 이상 반박을 못했다.

 

이에 권오규 총리대행은 “이번 희생자 결정은 실체적 사실접근을 위한 노력의 결과”라고 평가하고, 사형수와 무기수들을 4‧3 희생자로 결정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수형자 심사하러 미국서 자비 귀국도
수형자들을 희생자로 결정하기까지 많은 위원들의 노고가 있었지만, 그 중에도 수훈갑을 꼽으라면 심사소위 위원장을 맡아서 어려운 난관을 헤쳐 온 박재승 변호사일 것이다.

 

박 위원장에겐 여러 일화가 있다. 2005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그만둔 박 위원장은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방문연구원으로 미국에 가 있었다. 2006년과 2007년 4‧3위원회 회의에서 수형자 심사가 있을 때, 두 차례나 귀국하는 열의를 보여줬다. 그것도 자비 부담으로 귀국한 것이다.

 

4‧3매듭이 풀리기까지 이런 수많은 굽이가 있었다. 사형수와 무기수까지 희생자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4‧3특별법의 개정은 새로운 동력이 됐다.

 

또한 2007년 4‧3위원회에서 사형수들을 희생자로 인정함으로써 그들이 암매장됐던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옆 유해 발굴도 탄력을 받게 된다. 이념적 누명이 상당부분 풀린 결과였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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