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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35) ... 4·3특별법 시행령 파동 이겨내다

“우리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제정된 4‧3특별법은 4‧3 진상규명을 향한 도정에서 첫 단추만 꿰맨 것이지 어떠한 낙관도 금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향후 진행될 여러 후속조치, 즉 시행령과 조례 등 관련 하위법령의 제정 및 법안에 명시된 진상규명특별위원회의 구성 등이 도민의 염원과 민족적 양심에 부응하여 ‘시급히’ 그리고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꾸준히 감시하고 촉구할 과제가 주어져 있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특별법이 제정된 오늘을 4‧3 진상규명을 위한 제2단계 투쟁의 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위의 내용은 4‧3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던 1999년 12월 16일, ‘4‧3특별법 쟁취 연대회의’ 등이 발표한 공동성명에 나오는 글이다. 4‧3연대회의는 “특별법 제정은 제주도민의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하면서도 앞으로 있을 후속조치를 주시하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우려가 현실로…어처구니없는 개악

 

그런데 이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시행령 제정을 위한 초안 작성에서부터 진상규명 기구 구성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험난한 산을 넘듯이 요동쳤다. 맨 먼저 닥친 문제가 ‘시행령 파동’이었다.

 

특별법 조문은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 특별법 운용의 실질적인 내용은 시행령에서 구체적으로 담아낸다. 따라서 4‧3의 진상을 어떤 방법으로 규명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어떤 형식으로 풀어갈 것인지, 그리고 위원회의 위상과 힘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등 주요한 방향이 시행령에서 판가름 난다.

 

4‧3특별법 부칙에는 ‘이 법은 공포 후 3개월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한다.’는 규정이 있다. 4‧3특별법은 2000년 1월 12일 공포되었기 때문에 그해 4월 13일부터 시행하게 됐다. 이렇게 특별법이 시행되기 위해서는 시행령 제정이 필요했다.

 

4‧3특별법 시행령안 작성 작업은 행정자치부가 주도했다. 행자부 자치행정국 실무 팀은 시행령 초안을 만들고 2000년 3월 4일 입법예고했다. 3월 23일까지 20일간 이에 따른 의견을 받았다.

 

이에 따라 4‧3범국민위, 4‧3도민연대, 4‧3유족회 등 4‧3관련단체와 제주시민사회단체협의회가 각각 의견서를 제출했다. 내용인즉 진상규명을 담당할 위원회나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의 구성이 너무 관 위주로 치우쳤다고 지적하고 “공무원 수를 줄이고 민간 전문가들의 참여 폭을 넓혀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4월 초 행자부가 법제처에 제출한 시행령 최종안은 이런 4‧3진영의 의견이 깡그리 무시된 채 오히려 ‘개악’된 것으로 밝혀졌다.

 

위원과 기획단에 ‘군사전문가’도 포함한다?

 

즉 4‧3위원회 위원 20명 구성안이 초안에는 장관급 공무원 8명으로 되어 있었으나, 최종안에는 한 명이 더 늘어 9명으로 수정됐고, 여기에다 종전에 없었던 ‘군사(軍史)전문가’가 당연직으로 추가된 것이다. 덩달아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의 구성도 15명 중 간부 공무원 8명과 군사전문가가 포함되는 체제로 수정된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진상조사와 보고서 작성을 맡을 전문위원은 ‘비상임 2명’으로 격하시켰다. 한마디로 진상조사와 보고서 작성도 공무원 중심으로 추진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내포돼 있었던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국방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됐음이 감지됐다. 여기에다 4‧3진영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행자부의 의결안에 “시행령안 입법예고 결과, 특기사항이 없다”고 명시한 점이다. 4‧3진영이 제기한 의견을 완전히 묵살해버린 것이다.

 

이에 4‧3유족회 등 6개 4‧3관련단체가 4월 5일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진상규명의 입법 취지에 맞도록 시행령을 만들어야 한다는 제주도내 4‧3관련단체, 학계, 시민단체의 의견을 무시하고 잘못된 보고서를 작성한 책임자를 문책하라”고 주장했다.

 

4월 6일에는 4‧3관련단체와 시민사회단체가 합동으로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고, 다음날인 4월 7일에는 제주도내 33개 단체 대표의 긴급 기자회견이 개최되는 등 긴박하게 돌아갔다. 기존의 4‧3연대회의에 참여했던 24개 유족 및 시민사회단체 이외에도 도내 4개 대학 총학생회 등이 가세하면서 참여 단체수가 더욱 늘어난 것이다.

 

이들 단체 대표들은 합동 기자회견을 통해 제주도민의 의견을 묵살한 행정자치부의 무책임한 처사를 성토하고 다음 네 가지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첫째 왜곡된 보고서 작성자 문책, 둘째 시행령 상의 4‧3위원회 20명 중 국방부장관‧국무조정실장‧법제처장‧군사전문가는 조문에서 삭제, 셋째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15명 중 국방부장관‧국무조정실장‧법제처장이 정하는 자와 군사전문가는 조문에서 삭제, 넷째 진상조사작업을 수행할 민간 상임 전문위원 약간 명을 두는 규정 신설 등이었다.

 

이들 단체는 “이 같은 최소한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4‧3특별법에 근거한 각종 위원회 및 기획단 참여를 전면 거부하고 전도민적 투쟁을 전개할 것임을 경고한다.”고 밝혔다.

국방부 입김 작용했다 판단하고 강공 대응

 

이들 단체들이 이렇게 강공으로 나간 것은 중앙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장부터 밀리기 시작하면 4‧3특별법의 입법 취지가 상당히 훼손되고 사사건건 발목이 잡힐 우려가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들 단체들은 행자부의 태도 변화의 배후에는 국방부가 있다고 봤다. 당초 입법예고 당시 시안에 없던 국무조정실장을 끼워 넣어 공무원 숫자를 늘리고 심지어 군사전문가까지 조문에 명시하면서도 제주도내 단체들의 의견을 완전히 묵살한 것은 국방부의 강력한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본 것이다.

 

공권력 집행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과거의 과오에 대해 사과 한마디 없이 특별법 진상규명 기구 구성에 집착하는 국방부의 의도는 무엇인가? 제주도내 단체들은 그것은 한마디로 기존의 틀을 바꾸지 않고 과거의 이념논쟁으로 끌고 가려는 속셈이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부는 4월 13일 4‧3특별법 시행 예정일을 앞두고 시행령을 확정 발표할 계획이었다. 이런 일정에 따라 4월 10일 관계부처 차관회의를 열어 시행령안을 의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주도내 4‧3유족과 시민사회단체의 완강한 반발에 부닥쳐 이를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4월 13일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코앞에 둔 여야 국회의원 후보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이 문제가 정치권으로 확산됐다.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할 것 없이 제주에서 총선에 출마한 후보들은 잇따라 제주도청 기자실에 찾아가 시행령안의 변질을 성토하기에 바빴다.

 

33개 단체 합동 항의농성 돌입

 

33개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은 4월 11일 회합을 갖고 4‧3특별법 시행령 개악안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별도 대책기구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시행령은 법 제정 취지에 맞게 관료 중심의 현행 개악안을 철폐하고 진상규명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민간 전문가 중심의 실무기구 구성이 관건이라고 보고 이를 관철하는데 초점을 맞춰나갔다. 이에 대한 강력한 의사 표시로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항의 농성은 4월 17일부터 제주4‧3연구소에서 시작됐다. 농성 참여자들은 “50여 년의 한을 털어내기 위해 지난해 말 어렵게 제정된 4‧3특별법에 따른 최종 시행령안을 검토한 결과 올바른 진상규명을 바라는 도민의 바람을 외면한 내용으로 확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면서 “시행령안의 개악을 막기 위해 농성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제주도민들의 강력 항의에 여권 수뇌부가 전향적 검토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제16대 총선에서 제주도에서는 현경대(한나라당)‧장정언(민주당)‧고진부(민주당)가 각각 당선됐다.

 

4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당 당선자 초청 만찬에 다녀온 장정언 당선자는 다음날 “여권 수뇌부로부터 4‧3특별법 시행령에 제주도민들의 의사를 적극 반영, 군사전문가를 삭제하도록 하겠다는 확약을 받았다.”고 밝혔다. 즉 민주당 이재정 정책위 의장, 김옥두 사무총장, 한화갑 지도위원 등이 전향적인 검토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4월 20일 최재욱 국무조정실장 주재로 열린 차관회의에서 4‧3특별법 시행령안은 수정되지 않은 채 조건부로 의결됐다. 즉 논란이 되는 조문은 4월 25일 열리는 국무회의 때까지 정부 각 부처의 의견을 수렴해 시행령을 확정한다는 내용의 어정쩡한 조건부였다.

 

이에 제주도내 단체들이 발끈했다. 제주도내 단체들은 차관회의에서 도민들의 의견이 수렴될 것으로 예상하고 농성을 풀 예정이었다. 그러나 차관회의 결과를 듣고 이를 성토하는 장외 집회를 개최하는 등 농성 강도를 더욱 높여가기로 했다.

 

궐기대회와 시가행진으로 수정 촉구

 

2000년 4월 22일 제주시청 어울림마당에서 4‧3특별법 시행령 개악 저지를 위한 범도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제주도내 33개 4‧3관련단체 및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공동대책회의가 주최한 이 대회에는 4‧3유족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대회는 대통령에게 드리는 호소문, 도민에게 드리는 글 낭독과 결의문 채택 순으로 진행됐다.

 

대통령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1월 11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4‧3특별법 서명식에서 ‘4‧3특별법은 인권이 그 어느 가치보다 우선되는 사회, 도도히 흐르는 민주화의 도정에 금자탑이 될 것이며, 법 제정의 본래 취지가 잘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특별히 당부했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상기시켰다.

 

그리고 “4‧3 희생자 문제는 미군정시대, 제1공화국 탄생의 혼란기에 빚어진 사건인데, 그 역사적인 과거문제를 현재 진행형인양 지금의 국방부가 떠맡으려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 “이 문제를 풀어줄 분은 대통령이라는 절박한 생각에서 호소문을 올리게 됐다.”고 밝혔다.

 

이날 참석자들은 궐기대회가 끝난 후 관덕정까지 시가행진을 벌이며, 개악된 시행령의 즉각 수정을 촉구했다.

 

이런 제주사회의 동향에 청와대와 여권도 긴밀하게 움직였다. 청와대에서는 4‧3특별법 제정에 공을 세운 김성재 민정수석이 적극 나섰다. 그는 4‧3범국민위 고희범 운영위원장으로부터 “이렇게 하려고 특별법 만들었느냐?”는 줄기찬 항의를 받았다.

 

김 수석은 훗날, “상임전문위원이 없으면 이 법이 실효성을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대통령께 보고했고, 대통령께서는 제주도민들의 요구를 수용할 것을 지시했다”고 회고했다.

 

최인기 장관 결국 “수정하겠다” 약속

 

그런데 행자부의 결정적인 입장 선회는 4월 24일 민주당 추미애 의원과 장정언‧고진부 국회의원 당선자의 행자부 항의 방문이 기폭제가 됐다. 추 의원은 4‧3특별법 입법을 발의한 당사자로, 두 당선자는 제주지역 출신 여당 국회의원 당선자의 신분으로 행자부 장관을 찾아간 것이다. 당시 상황을 장정언 의원으로부터 들어본다.

“국무회의에 시행령을 상정한다는 바로 전날 세 사람이 절박한 심정으로 수정안을 들고 행자부 장관실로 찾아갔습니다. 사전에 방문 예고를 했는데도 최인기 장관은 부재중이었고, 차관보와 국장급 간부 몇 명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왠지 분통이 터졌습니다. 제가 큰소리로 언성을 높이는 상황이 되더군요.

 

오히려 추 의원이 ‘이 분은 제주도의회 의장까지 지낸 분인데, 오죽하면 언성을 높이겠느냐’면서 다독거리기도 했지요. 저는 국회가 개원되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분명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김포공항에 거의 다다를 무렵 최인기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수정 의견을 그대로 반영하겠다고 하더군요.”

 

이 같은 최 장관의 약속으로 그동안 논란이 됐던 내용들이 거의 수정됐다. 첫째 위원회에 장관급 1명을 추가하는 방안이 취소됐고, ‘군사전문가’는 ‘관련전문가’로 수정됐다. 둘째 기획단 15명 중 간부 공무원은 5명으로 대폭 축소됐다.

 

셋째 위원회의 사무처리를 위한 간사(지원단장)를 거창사건심의위원회 간사와 겸직하도록 한 규정을 삭제, 4‧3위원회 간사를 별도로 두도록 했다. 넷째 당초 시행령에 조사 인력을 ‘2인 이내의 비상임 전문위원’을 두도록 했던 것을 ‘약간인의 전문위원을 계약직 공무원’으로 두는 것으로 수정하되, 시행세칙 등을 통해 전문위원 5명과 보좌 조사인력 20명을 채용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조사인력 민간인 쪽으로 대폭 이동

 

위원회와 기획단, 조사인력 등 핵심적인 인적 구성이 관 주도 성격에서 상당 부분 민간인 쪽으로 이동됐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비상임 전문위원 2명’으로 설정함으로써 진상조사와 보고서 작성도 공무원들이 주도하겠다는 것이냐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던 조사인력이 상근 전문위원 5명과 조사요원 20명 채용으로 바뀐 것은 획기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에는 청와대의 입김도 작동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수정안이 반영되면서 당초 4월 25일 국무회의에 상정하려던 4‧3특별법 시행령 심의는 다시 연기됐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4‧3특별법 시행령은 5월 2일 최종 확정됐다.

 

이날 김대중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시행령은 16개 조항과 부칙으로 이뤄졌다. 정부는 5월 10일 4‧3특별법 시행령을 대통령령 제16803호로 제정 공포함으로써 제주4‧3특별법이 실질적인 시행에 들어가게 됐다. 시행령안 파동으로 당초 시행 예상일보다 한 달 가량 늦어진 것이다.

 

4‧3특별법 제정 이후 시행령 파동이 제1막이었다면 이제 제2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위원회와 기획단, 조사 인력 등 인적 구성의 문제였다. 여기에서도 여러 차례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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