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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15) … 발발 원인 제공, 유혈 진압에도 개입

 

4‧3의 진상을 조사하다보니 ‘불편한 진실’을 만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책임문제다. 나는 요즘 “4‧3의 발발 원인과 유혈 진압에 대해서 미국은 상당한 부분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표현을 하게 된 내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다.

 

오해가 있을까봐 한마디 더 한다면, 그렇다고 ‘남로당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역할은 서로 다르지만, 미국과 이승만 정권, 남로당 제주도당이 4‧3 발발과 유혈사태에 ‘더불어’ 책임이 있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1988년 4‧3취재반이 출범할 당시 젊은 기자들은 ‘민중항쟁론’을 주장했고, ‘미국의 책임’ 문제를 제기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몰고 온 들뜬 사회 분위기로 재야 진영에서는 당연시하던 담론이었다.

 

그러나 4‧3취재반장인 나의 입장은 달랐다. 그런 담론을 언론에서 당당히 이야기하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할 것이 아닌가? 먼저 선입견을 갖지 말자. 도대체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 그 진실을 찾아 나서자. 그러다 보면 4‧3의 본 모습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 아닌가?고 설득했던 것이다.

 

그래서 4‧3취재반의 취재는 ‘폭동’이나 ‘항쟁’같은 꼬리표 없이 ‘4‧3’이란 실마리를 앞세워 백지상태에서 시작했다. 미군정이나 주한미군고문단의 책임문제도 마찬가지였다.

 

4‧3 체험자들의 눈엔 보이지 않았던 미군

 

나는 4‧3취재에 나선 기자들에게 체험자로부터 증언을 채록할 때에는 반드시 미군관계에 대해서도 질문하도록 주문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제주도 할머니, 할아버지 등 사건 체험자들로부터 채록한 증언록을 검토하다보니, 미군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체험자들은 그런 질문에 다소 생뚱맞다는 듯이 “4‧3사태와 미군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고 되묻는 상황이었다. 100명 중 99명이 그랬다.

 

100명 중 한 명 정도가 “당시는 미군정 시절이기 때문에 미군이 개입했고 책임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해 줄 증언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미군 정보보고서를 입수해서 분석하면서 반전이 시작되었다. 매일 매일의 제주상황을 기록한 미군의 보고서를 보면서 4‧3취재반은 깜짝 깜짝 놀랐다. 결국 그들의 정보보고서는 미군 수뇌부가 제주사태를 얼마나 속속들이 알고 있었느냐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문건이 된 셈이다.

 

미군은 4‧3 발발 이전부터, 그리고 제주섬을 피바다로 만든 유혈사태를 몰고 온 초토작전에 이르기까지 개입하고 있었다. 심지어 제주도민들에게 악몽으로 남아있는 서청 단원의 제주 파견에도 관여한 사실이 밝혀졌다.

 

나는 4‧3취재반 활동에 이은 정부 진상조사팀의 활동을 통해서 더욱 확신을 얻게 되었다. 4‧3의 결정적 고비마다 그 배후의 정점에 미군이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 그것을 말이다.

 

남한 곳곳에 촘촘이 깔려진 미군 정보망

 

미국에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4‧3 관련 자료가 많았다. 특히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약칭 'NARA')에 많은 자료가 보관되어 있었다. 4‧3 발발이 미군정 통치시절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부터 대한민국이 수립되던 1948년 8월까지, 38선 이남 지역에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군이 통치한 것인데, 최고 책임자는 바로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 중장이었다. 그는 전술군인 24군단장이면서 군정 통치를 하는 남한 주둔 미육군 군정청 사령관직을 겸하였다.

 

 


미군정 장관 딘 소장은 그 휘하에서 군정업무를 전담했다. 주한미군사령부의 차상급 기관은 일본 도쿄에 있는 미육군극동군사령부(일명 ‘맥아더사령부’)이었다.

 

미군은 지방에도 전술부대를 배치했는데, 제주도는 전라도와 더불어 6사단의 관할 지역이었다. 그리고 제주도 군정업무를 전담하는 59군정중대를 따로 배치했다. 따라서 당시 지휘명령 계통상 제주도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의 미군 보고체계는 59군정중대→6사단→주한미군사령부→극동군사령부→미국 본토로 이루어졌다.

 

 


미군은 점령 직후 전국에 촘촘한 정보망을 깔아 놓았다. 그 정보망은 미군뿐만 아니라 경찰, 국방경비대, 서청 등의 우익청년단체 등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하는 체제로 가동됐다. 여기에 편지 검열, 전화도청 등도 가세됐다. 우리나라 군사정부 시절 중앙정보부가 모든 정보를 독점하던 체제와 유사했다.

 

매일매일 생산된 ‘G-2 보고서’

 

정보는 매일매일 보고됐다. 이 정보를 수합, 분석해서 보고서를 만드는 곳이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이다. 그래서 이 보고서는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일일보고서'(G-2 Periodic Report, 일명 ‘G-2 보고서’)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 주간의 정보를 정리한 '정보참모부 주간보고서'(G-2 Weekly Report)도 있었다. 6사단에서 작성한 정보보고서는 6사단 'G-2 보고서', 24군단에서 작성된 것은 24군단 혹은 주한미군사령부 ‘G-2 보고서’, 극동군사령부에서 작성된 것은 극동군사령부 'G-2 보고서'로 불렀다.

 

미군정 정보보고서 가운데 'G-2 보고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방첩대(CIC) 보고서다. 'G-2 보고서'는 매일매일 벌어지는 상황을 일지형식으로 정리(물론 주간보고서 등을 통해 정세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반면 'CIC 보고서'는 사안에 대한 정치적 분석 등 정보당국의 시각과 관점을 드러내는 보고 자료를 작성하는데 주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관점은 매우 우익적인 것이었다. 1947년 3‧10 총파업 직후, 제주도에도 미군 CIC 요원이 배치되었다.

 

미군 자료는 이밖에도 주한미군사령부 작전일지(G-3 보고서), 군사고문단 보고서, 주한미군사, 각종 공한 등이 있다. 미군정은 이런 거미줄 같은 정보망과 보고서를 통해 3년 동안 남한을 통치한 것이다.

 

이 같은 미군 정보보고서가 알음알음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1980년대다. 미국은 1975년에 제정된 '정보자유법'에 의해 그동안 비밀문서로 관리해 오던 미군 자료 등을 비밀 해제해 풀기 시작했다.

 

4‧3취재반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한 보고서

 

4‧3취재반은 1988년 출범 직후 이런 소문을 듣고 미군정 정보보고서 입수작업에 나섰다. 출판사 일월서각에서 1986년에 15권의 『미군 정보보고서』 영인본을 발행한 사실을 알고 그 책들을 사들였다. 이어 1989년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한 미군 보고서 영인본도 구입했다.

 

 


이 책들은 1945년부터 미군 철수가 있었던 1949년 6월까지 한반도 상황을 기록한 미군 보고서를 복제 인쇄한 것이다. 물론 영문 문서였다. 4‧3취재반은 이 영인본에서 제주4‧3과 관련된 미군 자료를 발췌하고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미군 정보보고서는 4‧3취재반을 깜짝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매일 매일의 제주상황을 아주 상세히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4‧3취재반에게 분명히 유용한 자료들이었다.

 

가뜩이나 4‧3 관련 국내자료의 빈곤함에 애를 태우던 4‧3취재반에게 하루하루 상황을 기록한 미군 정보보고서는 가뭄에 단비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취재반은 미군 보고서 내용을 당시 신문 등 기존의 국내자료와 채록된 증언자료 등과 교차 비교하면서 4‧3의 실마리를 풀어 나갔다.

     
 

 

겉과 속 다른 미군 보고서의 이중성

 

그런데 얼마 없어서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미군 자료의 이중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미군 보고서가 4‧3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1차 사료임에는 분명한데도, 동시에 보고서 작성자의 의도성과 그 속에 녹아있는 시각, 관점을 함께 짚어보아야 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미 ‘5‧1 오라리 방화사건’이나 딘 장군의 발언 기록 등을 취재하면서 미군 자료도 진실을 은폐‧조작할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한 바 있었는데, 미군 정보보고서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장군은 남한을 점령한 뒤 점령 목적을 ‘소련에 대한 보루 구축’이라고 천명했다. 이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과 소련은 제2차 대전 때만 해도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전후 세계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라이벌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국제적 냉전이 싹 텄다.

 

민주적 사고가 발달한 미국은 인권 등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는 유연했지만 소련과의 냉전 대립에서는 철저하리만치 냉정했고, 때로는 히스테리 반응을 보였다.

 

미군정은 해방공간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좌익과 외부(소련)의 사주와 선동에 의한 것으로 간주했다. 여기에는 민중운동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우리나라가 군부 통치 때 민주화나 통일운동을 벌이면 ‘북의 지령’으로 간주하는 사례와 비슷했다.

 

미군정 자료도 이러한 시각과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즉, 미군 자료는 미군의 정책적 태도와 입장, 이해관계에 따라 ‘국익적 관점’에서 작성되었다는 뜻이다.

 

4‧3을 둘러싼 제주상황을 기록한 미군 자료에서 몇 가지 사례를 보자. 4‧3의 도화선이라 할 수 있는 1947년 ‘3‧1 발포사건’과 이에 항거해서 일어난 ‘3‧10 총파업’ 사태를 조사한 미군 보고서는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분노가 광범위하게 일어났고, 이런 도민 감정을 남로당 조직에서 증폭시키고 있다고 그 원인을 두 가지로 분석했다.

 

그러고도 후속조치는 민심 수습보다는 좌익 척결에 무게를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응원경찰과 서청의 대거 파견, 제주에 미군 CIC 설치, 미군 보고서에 스스로 ‘극우주의자’(an extreme rightist)라고 표현한 유해진 도지사의 임명 파견, ‘붉은 섬’(red island) 규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초토작전도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

 

제주도의 유혈상황을 몰고 온 초토작전에 대해서도 미군 보고서는 우호적으로 기록했다. 1948년 10월 미군고문단이 ‘즉각적 수정조치’를 요구한 직후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신설됐고, ‘해안선에서 5km 이외 지역의 통행금지’를 골자로 한 초토작전 구상이 공포됐다.

 

미군 보고서는 9연대가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기록했다. 이어 초토작전을 전개한 9연대의 작전을 ‘성공적인 작전(successful actions)'으로 평가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미군은 제주도에서 악명을 떨쳤던 서북청년단 단원의 활용계획과 관련해 “제주도의 서청이 경찰과 경비대를 지원하게 된 것은 몇몇 미군 장교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고 자신들의 보고서에서 밝히고 있다.

 

미군 자료를 검색하다 보면 우롱당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강경진압의 빌미로 삼았던 ‘북한 소련 등의 선박 출현설’을 1949년 4월에 이르러서야 “이런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는 식으로 부정하는가 하면 1949년 5월에는 “‘반도(rebels)’ 중 다수는 명백히 결백하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따라서 4‧3취재반은 4‧3 진실규명 과정에서 미군 보고서를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작성자인 미군의 의도까지 간파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속에서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뜻이다.

 

“미국은 4‧3과 무관한가” 칼럼 발표
나는 『제민일보』 1992년 4월 3일자에 “미국은 4‧3과 무관한가”란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때까지의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미국의 책임문제에 대한 10개항의 질문을 던진 것이다.

 

 

 

즉 1947년 3‧1 발포와 3‧10 총파업과 관련해서 미군 대령이 현지 조사를 한 뒤 민심 수습책보다는 응원경찰과 서청 단원 등을 파견해 강경 진압을 한 이유, 미 CIC 요원들이 대동청년단 통합과 서청 단원 파견에 개입한 이유, 오라리 방화사건을 둘러싼 미군 보고서와 기록영화의 조작 의혹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또 제주에서의 5‧5 수뇌회의 직후 딘 장군의 외부 개입설 발언에 대한 진위,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이라고 밝히고 한 달 사이 6000명을 포로로 체포했다는 제주도최고사령관 브라운 대령 작전의 정당성, 초토작전의 구상이 미 CIC 장교에 의해 제기된 사실, 대량 학살극에 대한 미국의 책임문제 등을 따진 것이다.

 

1992년 시점에서 제기한 질문들이기에 한계가 있었다.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문제는 그후 정부 조사단 활동 등을 통해 더욱 구체적인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새로 발굴한 자료에 의해 주목된 인물이 바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인 로버츠 준장이다.

 

초토작전 칭찬한 로버츠 고문단장

 

1948년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하지 장군 사이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이 체결되었다.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지만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미군에 있다는 협정이었다. 이 협정에 의해 한국군을 지휘‧통제할 임시군사고문단이 발족되는데, 그 책임을 로버츠 장군이 맡은 것이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1948년 10월 9일 제주도 작전에 대한 수정조치를 지시한다. 그 지시 직후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제주도 중산간마을에 대한 초토작전이 전개되었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1948년 12월 18일 한국 대통령, 국방장관, 참모총장 등에게 공한을 보내 제주도에서 초토작전을 집행한 송요찬 9연대장이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하였다’고 칭찬하고 “이러한 사실이 신문과 방송, 그리고 대통령 성명에 의하여 크게 알려져야 한다”고 권고했다.

 

사흘 후인 12월 21일 채병덕 참모총장은 답신을 보내 “담화를 통해 송요찬 연대장의 활동을 소개하도록 할 것이며 대통령 성명을 발포하도록 추천할 것”이라고 화답하고, 더 나아가 송요찬에게 훈장을 수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 조사팀은 이런 내용이 담긴 비밀문서를 미국에서 찾아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주섬을 유혈 광풍으로 뒤덮게 했던 초토작전을 미군 고문단장은 자랑스러워했고, 그 작전을 집행한 연대장을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한 사람’으로 추천한 것이다.

 

이래도 미국은 제주도의 유혈 진압에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니 내가 1992년 “미국은 4‧3과 무관한가”란 칼럼을 썼을 때 미 국무부의 반응이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회에 자세히 밝히겠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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