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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30) ... 4·3해결 촉구 전국순례 홍보단 활동

지방의원 등 81명으로 꾸려

 

1999년 4월 4일 4‧3특별법 제정운동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출정식이 제주도의회에서 열렸다. 제주도의회(의장 강신정)가 주최하고, 도의회 4‧3특위(위원장 오만식)가 주관한 ‘4‧3문제 해결 촉구를 위한 대국민 홍보 및 국회 방문단’ 출정식이었다.

 

기대를 걸었던 김대중 정부에 대한 불만이 서울에서는 4월 3일 마로니에공원에서 3000여 명이 모인 ‘제주4‧3 명예회복 촉구대회’로, 제주에서는 지방의회와 4‧3관련단체 등이 공동 참여한 홍보단이 전국을 누비며 4‧3문제의 심각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정부와 국회를 압박하는 전략으로 표출됐다.

 

이 전국순례 출정에는 도의원 14명 이외에도 제주시의회(의장 강영철) 6명, 서귀포시의회(의장 한건현) 5명, 북제주군의회(의장 윤창호) 4명, 남제주군의회(의장 이종우) 5명 등 지방의회 의원 34명이 참여했다.

 

또한 4‧3희생자유족회(회장 박창욱), 4‧3도민연대(공동대표 김영훈‧양금석‧임문철), 4‧3범도민위원회(위원장 조승옥), 백조일손유족회(회장 김정부) 임원들까지 가세하다보니 모두 81명의 매머드 팀이 구성됐다.

 

이른바 운동권 출신인 오만식 도의회 4‧3특위 위원장이 “4‧3문제 해결에 지지부진한 중앙 정치권을 압박하기 위해서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면서 이렇게 판을 키운 것이다.

 

4박 5일의 일정으로 전국 순례에 나선 이들은 방문 첫날에는 광주 5‧18희생자 망월동 묘역을, 다음날에는 거창사건 희생자 묘역 등을 참배하고 그곳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거창에서는 거창사건 등의 특별법 제정과정을 설명 듣는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상경투쟁을 통해서 특별법 제정을 얻어낸 줄 아느냐”는 쓴소리를 듣기도 했다.

며칠새 투사로 변한 홍보단원들

 

대구‧대전‧청주‧천안‧수원을 거쳐 7일 서울에 입성할 때에 홍보단에는 새로운 결의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전국을 순례하면서 국민들이 4‧3의 실상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그동안 제주도에서 우리만의 ‛4‧3’을 외쳤던 것이 아닌가”하는 회한이 스쳐갔다. 그런 가운데도 홍보물을 받아본 사람들로부터 “제주도민의 아픔이 이렇게 큰 줄 몰랐다. 하루 빨리 치유되기를 바란다.”는 격려를 받고는 새로운 힘을 얻었다.

 

서울에 입성한 순례 홍보단은 곧바로 4‧3범국민위원회 관계자들과 재경 유족들이 5일째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는 명동성당 현장으로 향했다. 명동성당 벽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4‧3 공약내용을 열거하고 공약 이행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이 자리에서 감격적인 조우를 한 참석자들은 “이젠 정치인에게 호소할 때가 지났다.”면서 “도민이 하나 되어 4‧3해결을 쟁취하자”고 뜻을 모으고 의지를 다졌다.

 

나흘 전 제주도의회에서 출정식을 가질 때만 해도 일부 참석자들은 사회자가 구호를 소리쳐 외쳐도 손들기를 쑥스러워했다. 어떤 참석자의 손은 겨우 어깨까지 갔다가 멈추어버렸다. 그런데 며칠 새 그들은 ‘투사’로 변해 있었다. 명동성당 앞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앉아 구호를 외치는 그들의 손은 하늘로 치솟았다.

 

이런 열기는 그 다음날 국회를 방문했을 때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제주출신 국회의원 3명이 모두 참석한 자리인데도 “연내에 4‧3특별법이 제정되지 않는다면 제주출신 의원들의 정치생명은 끝난 것”이란 경고의 말도 서슴지 않았다.

 

‘정치생명’ 담보로 여야대표 압박

 

날이 갈수록 강도를 높여가는 이들의 활동에 정치권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홍보단은 4월 8일 여당인 국민회의와 야당인 한나라당 중앙당사 앞에서 ‘제주4‧3 해결을 위한 국회 특위 구성 및 특별법 제정 촉구대회’를 동시에 가질 예정이었다.

 

정치권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촉구대회를 열기 전 각 정당 대표단과 홍보단 대표간의 간담회가 이뤄졌다.

 

국민회의 대표와의 만남은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회의 중앙당사 총재실에서 열렸다. 국민회의 측에서는 안동선 지도위원회 의장과 김진배 4‧3특위 위원장, 추미애 의원 등이 참석했다. 국민회의 측이 간담회를 ‘총재실’에서 마련한 것은 그만큼 홍보단 대표들을 배려하는 인상을 주기 위한 조치였던 것 같다.

 

홍보단 측에선 김영훈 도의회 부의장, 강영철 제주시의회 의장, 한건현 서귀포시회 의장, 윤창호 북제주군의회 의장, 이종우 남제주군의회 의장, 박창욱 4‧3유족회장, 양금석 4‧3도민연대 공동대표와 서울에서 합류한 고희범 4‧3범국민위 운영위원장 등이 자리를 같이 했다.

이 자리서 홍보단 대표들은 “4‧3 해결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공약이 10여 차례 있었으나 1년이 넘도록 가시적 조치가 없었다.”면서 4‧3문제 해결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을 밝히라고 강도 높게 요구했다.

 

이에 대해 안동선 의장은 “4‧3문제 해결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하다.”고 전제하고 “국회가 정상화되는 즉시 국회 4‧3특위를 구성하고 연내에 4‧3특별법이 제정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같은 시각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한나라당 대표와 홍보단 대표와의 간담회도 열렸다. 한나라당 측에서는 이부영 원내총무와 제주출신 국회의원인 변정일‧양정규‧현경대 의원이 참석했다.

 

양당에서 “연내 특별법” 약속 받아내

 

홍보단 측에서는 제주도의회 강신정 의장, 오만식 4‧3특위 위원장을 비롯한 도의원들과 조승옥 4‧3범도민위 위원장, 김두연 4‧3유족회 부회장 등이 자리를 같이 했다.

 

홍보단 대표들은 “정치권은 지난해 위령제 때도 4‧3 해결을 약속했으나 1년이 지나도록 국회에서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다.”면서 강한 톤으로 성토했다. 더 나아가 박희수 도의원은 국회의원들 면전에서 “연내에 특별법이 제정되지 않는다면 제주출신 의원들의 정치생명은 끝난 것”이라고 윽박질렀다.

 

이에 대해 이부영 총무는 “이회창 총재로부터 4‧3 해결을 직접 지시받았다.”면서 “4월 내 총무회담을 열어 특위 구성을 제안할 것이며, 연내에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홍보단의 강경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양 당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내긴 했지만, 홍보단 대표들은 그래도 여당인 국민회의 중앙당사 앞에서는 당초 계획대로 4‧3특별법 제정 등의 촉구대회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오후 2시부터 열린 촉구대회에는 제주에서 올라간 홍보단 이외에도 4‧3범국민위 회원과 재경 유족 등 200여 명이 참석해 “김대중 대통령은 4‧3 해결 공약을 이행하라”, “국민회의는 국회 4‧3특위 구성과 특별법 제정을 즉각 추진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쯤해서 홍보단은 4박 5일의 일정을 통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뿌듯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스스로도 며칠 사이에 ‘투사의 모습’으로 변한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홍보단 폄훼한 신문사 바로 사과

 

그런데 돌출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제주에서 발행하는 모 일간지가 “도민 혈세로 전국순례…81명으로 대규모 편성 취지 무색”이라는 제목 아래 마치 홍보단이 전국 관광여행에 나선 것인 양 홍보단을 폄훼하는 기사를 실은 것이다.

 

홍보단은 발끈했다. 홍보단은 즉각 참가단체 연명으로 규탄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해당 신문사를 찾아가 의자를 집어던지는 등 거칠게 항의했다.

 

이 소동은 신문사 측이 바로 사과하면서 하나의 해프닝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 홍보단 폄훼기사를 썼던 기자는 “홍보단이 방대한 규모로 구성돼 그 취지가 무색하다는 뜻으로 기사를 쓴 것인데, 제목이 과도하게 자극적으로 붙여지면서 문제가 확산됐다.”면서 “종합적으로 볼 때 그 기사가 숲보다는 나무만 본 측면이 있다.”고 회고했다.

 

홍보단의 국회 방문 닷새 후인 4월 13일 국회의장 집무실에서 여야 원내총무회담이 열렸다. 박준규 국회의장이 주재한 이날 총무회담에서 국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 구성안 통과에 원칙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국민회의 손세일, 자민련 강창희, 한나라당 이부영 등 3당 원내총무는 제주4‧3문제의 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오히려 야당인 한나라당이 적극적

 

이날 총무회담에서 야당인 한나라당 이 총무가 국회에 계류 중인 4‧3특위 구성안을 조속히 처리하자는 제안을 하자 공동여당인 국민회의‧자민련 총무도 원칙적인 동의를 했다. 다만 여당 측은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정부와의 협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을 달라는 취지의 단서를 달았다.

 

국회의장이 주재하고 여야 원내총무가 원칙적인 합의를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제주지역 언론은 저마다 “국회 4‧3특위 구성된다”고 대서특필했다. 4‧3연구소‧도민연대 등 4‧3 관련단체들도 일제히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이번 합의가 지금까지의 국민적 비난을 피하기 위한 모양새 갖추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연구소), “내년 총선을 의식한 정치인들의 면피용으로 이용할 경우 정치투쟁을 벌일 것”(도민연대)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제주도민과 4‧3 유족들에게 잔뜩 기대를 걸게 했던 정치권의 립 서비스는 여기까지였다. 임시국회가 열렸지만 4‧3특위 구성안 논의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5월 17일 제주도의회와 4개 시‧군의회 의장은 공동명의로 “4‧3 홍보단이 국회와 여야 정당 등을 방문했을 당시 약속했던 ‘국회 4‧3특위’를 조속히 구성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국회의장과 각 정당 대표들에게 발송했다. 그런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기다림에 지친 4‧3진영은 정치권을 압박하기 위해 7월 2일 다시 국회를 찾았다. 이 방문단은 도의회 4‧3특위 의원과 유족회‧도민연대를 비롯한 4‧3 관련단체 임원 등 10여 명으로 구성됐다.

 

방문단의 행보에 자극을 받은 여야 원내총무 3명은 그날 오후 다시 회동, 4‧3특위 구성문제를 협의했다. 이날 회의에서도 한나라당 이부영 총무가 적극 나선 반면 국민회의 손세일, 자민련 강창희 총무는 “양당의 의견 조율이 안 된 상황”이라며 추후에 다시 논의하자는 식이었다. 공동 여당 간의 의견 차이가 있음이 노출된 것이다.

 

미스제주 김은희 양의 당찬 답변 화제

 

이 무렵 신선한 화제를 모은 일도 있었다. 그해 5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미스코리아 본선대회에 출전한 미스제주 진 김은희 양(이화여대 재학)이 “만일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면 무엇을 물어볼 생각인가?”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통령의 선거 공약인 제주4‧3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관해 묻고 싶다”고 당차게 답변한 것이다.

 

미스코리아 대회 성격상 놀라운 대답이었다. 도의회 4‧3특위와 도민연대가 공동으로 김 양에게 감사패를 전할 정도로 그녀의 발언은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정작 김대중 대통령은 그 무렵 과거사 해결과 인권법 제정문제로 괴로운 처지에 있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수첩에 메모해서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장관들을 독려하고, 정당 또는 시민사회단체들을 만나 수없이 토론했지만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다.

 

여소 야대의 정치 환경, 보수성향의 자민련과의 공동정부 운영, 보수단체의 반발, 해당 장관들의 소극성 등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런 가운데 1999년 가을 정기국회가 착착 다가오고 있었다.

 

특별법 위해 거리로 나선 4‧3운동

 

드디어 1999년 10월 4‧3도민연대가 제주4‧3특별법 제정 촉구의 강도높은 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해 3월 출범한 4‧3도민연대가 한글날인 10월 9일 오후 제주시청 옆 어울림마당에서 개최한 첫 거리행사의 이름은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1차 도민대회’였다.

 

그동안 4‧3도민연대는 유족회, 범국민위와 함께 김대중 대통령에게 드리는 청원서를 발표했는가 하면 도의회 등과 연대하여 중앙정부와 정치권을 압박하는 전국순례 홍보단 활동도 벌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회 등을 방문해 국회 4‧3특위 구성과 특별법 제정 등을 촉구했다.

 

그때마다 여야 정치권은 곧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번번이 구두선에 그쳤다. 별 소득이 없이 정기국회 시즌이 다가오면서 도민연대 관계자들은 초조해졌다. 제15대 국회의 마지막이자 20세기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정기국회여서 더욱 그랬다.

 

그 시점에 이르자 국회 4‧3특위 구성은 별 효력이 없어 보였다. 막상 국회에 특위를 구성한다고 해도 이듬해 봄 총선 직후 바로 특위가 해체되는 수순을 밟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민연대는 국회 4‧3특위 구성안을 접고 오로지 특별법 제정운동에 매진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이런 의지를 결집하고 도민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거리로 나선 것이다.

 

제주출신 한나라당 의원 특별법 시안 공개

 

제1차 도민대회에서 주최 측인 4‧3도민연대는 먼저 제주출신 세 국회의원을 향한 공개질의서로 포문을 열었다. 당시 제주출신 국회의원 3명은 모두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도민연대는 이들 국회의원에게 “4‧3에 대한 한나라당의 당론은 무엇인지, 올해 정기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하겠다는 약속은 변함이 없는지, 국민회의가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독자적으로 법안을 제출하겠다고 했는데 그 시기는 언제인지?” 등을 따져 물은 것이다.

 

그런데 4‧3도민연대 관계자들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공개질의서 발표 이틀만인 10월 11일 제주출신 국회의원 3명이 공동발의로 이번 정기국회에 4‧3특별법안을 상정하겠다면서 그 시안을 전격적으로 공개한 것이다.

 

도민연대를 비롯한 4‧3단체들은 즉각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도 ‘내년 총선을 앞둔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의 정치적 책략이 아니냐’는 의구심도 떨치지 못했다.

 

“여당은 뭐하나?” 공세에 국민회의 화들짝

 

이런 정치적 파장이 일어나는 가운데 제2차 도민대회가 10월 16일 제주시 중앙로 주택은행 앞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국민회의가 타깃이 됐다. 먼저 “4‧3특별법 제정과 정부차원의 해결을 약속한 대통령의 진심을 믿고 표를 몰아주었다.”면서 DJ의 공약 이행을 촉구했다.

 

이어 “국민회의 제주도지부장과 각 지구당 위원장들은 돌부처처럼 꿈쩍도 않은 채 무소신‧무관심‧무책임으로 일관하고 있다.”면서 “이런 행태에 대해 준엄한 정치적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런 공격이 주효했는지 화들짝 놀란 국민회의 제주도지부에서 독자적인 특별법 시안을 만드는 등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제3차 도민대회는 10월 23일 역시 중앙로에서 열렸다. 이날 대회에서 눈길을 끈 사람은 인기가요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이었다. 전남대 출신인 그는 1980년 5‧18 민주항쟁 당시 고립무원의 궁지에 빠져 상처와 슬픔으로 가득한 광주를 그래도 사랑할 것이라는 뜻을 담아 ‘바위섬’을 작사‧작곡했다고 한다. 그는 상처를 입은 광주와 제주의 연대 필요성을 강조하며 ‘바위섬’을 불러 참석자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이런 4‧3도민연대의 가열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민사회는 4‧3특별법 제정운동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냉담한 분위기’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이름은 ‘도민대회’라고 붙였지만 참석자는 수십 명에 불과했다. 진보적 인사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가 대부분이었다. 행사장에서는 4‧3유족들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때까지도 ‘4‧3’이란 문제를 안고 거리로 나서는 게 생소했다. 더군다나 4‧3특별법이 제정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이래저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24개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10월 28일 출범한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는 이런 과정을 겪은 후 태동한 것이다. <31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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