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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25) ... 한국언론사에 남을 456회 장기연재 기록

제주 전마을 돌며 초토화피해 조사

 

『제민일보』 연재물 「4‧3은 말한다」는 1996년 10월에 340회를 넘기면서 대규모 유혈사태를 몰고 온 초토화 작전의 실체와 그 참상을 다루게 되었다. 광란의 한복판에 들어선 것이다.

 

나는 이 무렵 초토화 상황의 취재 방향을 놓고 고심에 빠졌다. 초토화 피해가 컸던 몇몇 마을을 선정해 상징적으로 다뤄야 할지, 전수조사하여 제주도 전체 마을의 피해상황을 두루 보여줘야 할지 선택해야 했다.

 

김종민 기자 등은 초토화 작전 기간에 전도에 걸쳐 워낙 많은 사건이 동시에 벌어졌기 때문에 초토화의 실상을 제대로 파헤치기 위해선 전수조사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 취재안은 초토화 작전의 실상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반면, 연재가 장기화되는 부담이 있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은 당초 6명에서 3명(양조훈, 김종민, 김애자)으로 재편되어 있는데다, 내가 그해인 1996년 8월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현장 취재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2명의 기자가 이 일을 감당해야만 했다.

 

또 다른 이유는 경영주와의 관계였다. 제민일보사는 1990년 사원주와 도민주 22억5000만원을 모아 창간되었지만, 지속적인 경영 안정을 이유로 대주주를 영입했다. 그런데 1995년 대주주의 개인 회사가 부도나면서 오히려 신문사마저 위기에 빠졌다.

 

“연재 빨리 끝내라” 새 경영주 압력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재일동포인 새 경영주를 맞게 되었는데, 그 경영주가 나에게 “4‧3연재를 언제까지 할 것이냐?”고 여러 차례 물어왔다. 공안정보기관의 입김이 작동되고 있음이 감지되었다.

 

연재를 빨리 끝내라는 안팎의 압력에다가 2명의 기자가 전수조사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은 전수조사 안을 채택했다. 압력에 굴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싫었지만, 그것보다는 그 때까지 밝혀지지 않은 마을마다의 초토화 실상을 이 때가 아니면 밝히기 어렵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96년 10월부터 ‘초토화 작전의 배경’이 10회에 걸쳐 심층적으로 연재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4‧3 전개 과정에서 가장 참혹하고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인 초토화 작전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제주도와 국내 상황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전략을 깊게 분석했다. ‘불법 계엄령’ 문제도 집중적으로 해부했다. 이런 토대 아래 초토화 작전이 제주도 전체 마을에 어떤 참상을 입혔는지 추적했다.

 

초토화 피해에 대한 연재는 시계방향에 따라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런 연재 내용이 재정리되어 1998년 3월에 『4‧3은 말한다』 제5권으로 출간되었다.

 

‘핏빛으로 물든 성산포 앞바다’, ‘18세부터 40세까지 학살당한 토산리’, ‘군경으로 변신한 서청의 학살극’, ‘흑심 못 채우자 아버지를 살해’, ‘우는 아기 입 틀어막아 질식사’ 등 제목만 봐도 얼른 연상되는 참상과 절절한 사연들이 실렸다.

 

큰 용기를 준 김수환 추기경 추천 글

 

이 책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기쁜 소식을 들었다. 한국 가톨릭의 큰 별이자, 우리 사회의 양심으로 존경받던 김수환 추기경이 책 출간에 대한 ‘추천의 글’을 써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연재과정에서 쌓였던 심적 어려움이나 피로감을 한방에 날려 보내는 낭보였다.

 

『4‧3은 말한다』를 출간할 때마다 3명 정도의 현대사 전문학자나 문인들로부터 추천의 글을 받았다. 4‧3 발발 50주년을 앞두고 펴내는 제5권에는 누구의 글을 실을까 고심하던 중이었는데,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이 책을 만드는 출판사 ‘전예원’ 편집인인 김진홍 교수(한국외국어대‧작고)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김 추기경의 글을 받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제안에 긴가민가하면서도 그렇게만 됐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뜻을 전했다.

 

그런데 그걸 성사시킨 것이다. 가톨릭 신자인 김 교수는 김 추기경에게 추천의 글을 부탁하면서 특별히 4‧3이 50주년을 맞는 해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그걸 의식해서인지 추천의 글 제목을 ‘제주4‧3 50주년 기념 「4‧3은 말한다」 5권 출간에 부쳐’로 달았다.

 

추천의 글은 “올해는 제주4‧3사건이 발발한 지 5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5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해를 ‘희년(禧年)’이라고 합니다. 희년이 되면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되찾게 해줍니다.”로 시작됐다.

 

김 추기경은 이어서 “해방공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불행한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왜 제주섬은 초토화되었고, 그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숨져 갔는가? 어찌하여 정부에서는 오랜 기간 이런 중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은폐해 왔는가? 의문은 지금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의 단결과 진정한 화합의 계기로 삼기 위해서 그 진상은 규명되어야 합니다.”

 

김 추기경은 제민일보 4‧3취재반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제주의 지방지 「제민일보」 기자들이 10년 동안 이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 왔다는 것은 진상규명에 있어서 한 가닥 빛이 되고 있습니다. 그 노력의 결정체가 몇 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왔습니다. 역사의 진실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참된 역사로 복원될 날이 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그 직후 김 추기경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고마움을 전했다. 특히 ‘4‧3’이라는 예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을 추천해줬고, 취재반에게도 커다란 용기를 준 데 대해 감사의 뜻을 표현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 선종했다. 향년 87세로 생을 마친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의 생애와 업적을 추모하는 물결이 전국적으로 일었다. 나는 빈소가 마련된 명동성당을 찾아가 유리관에 안치된 김 추기경의 명복을 비는 한편 다시 한 번 고마운 뜻을 전했다.

 

제민일보에 연재됐던 『4‧3은 말한다』가 책으로 출간될 때마다 김수환 추기경 이외에도 한국의 내로라하는 현대사 관련 학자들과 문인 등이 보내온 추천의 글을 실었다. 그만큼 이 기획연재는 제주도내 뿐만 아니라 국내외 학계와 전문가 등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었다.

 

1994년에 동시에 발간된 『4‧3은 말한다』 제1권(608쪽)에는 강재언(일본 교토 花園대 교수), 정윤형(홍익대 교수), 현기영(소설가), 제2권(1994년‧485쪽)에는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송지나(‘여명의 눈동자’ 극작가), 김정기(외국어대 교수‧한국기자상 심사위원장)의 추천 글이 실렸다.

 

제3권(1995년‧446쪽)에 강만길(고려대 교수), 김진균(서울대 교수), 김석범(재일 소설가), 제4권(1997년‧517쪽)에는 리영희(한양대 교수), 최장집(고려대 교수), 김중배(전 동아일보‧한겨레신문 편집국장)의 추천 글이 실렸다.

 

그리고 4‧3 50주년을 맞아 나온 제5권(492쪽)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추천 글을 길게 싣게 된 것이다.

 

김대중 현직 대통령도 ‘4‧3작업’ 호평

 

한편, 현직 대통령이 4‧3취재반의 활동을 높이 평가한 일도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6월 2일 「제민일보」 창간 8주년을 맞아 “특히 제민일보가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앞장서 온 것은 항상 진실의 편에 서려는 정론지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내용의 축하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지방지 창간기념호에 대통령의 메시지를 보내오는 것은 드문 일이다. 더군다나 구체적으로 4‧3의 진상규명 작업을 적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메시지였다.

 

4‧3취재반의 활동도 어느덧 10년을 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이었다. 채록한 증언자만 6000명을 넘어섰고, 입수한 관련 자료만도 2000종에 이르렀다.

 

이 무렵부터 중앙 언론계에서도 4‧3취재반의 활동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겨레신문』과 『한국일보』 등에서는 사설을 통해 제주4‧3의 진실규명 과정을 언급하면서, 『제민일보』 4‧3취재반의 활동을 소개했다.

 

1997년 일본 『아사히신문』이 4‧3취재반의 활동상을 국제면 톱기사로 다룬 것에 비하면 때늦은 감은 있지만 중앙 언론계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언론 전문지 「미디어 오늘」은 1998년 4월 8일자에 “언론, ‘4‧3’ 망각의 50년…중앙언론 진상규명 여전히 ‘팔짱’”이라는 제목의 박스 기사를 실었다.

 

내용인즉 제주4‧3 50주년을 맞아 『중앙일보』, 『한겨레신문』, 『한국일보』에선 4‧3을 기획기사로 다루었지만, 다른 중앙지들은 관련 기사가 뜸했다는 지적이다. 그에 비해서 『제민일보』와 제주MBC‧제주KBS 등 제주지역 언론들은 진상규명에 많은 힘을 쏟고 있다는 비교 기사였다.

 

나는 오히려 이 대목에서 금석지감이 들었다. 종전에는 중앙지 중 겨우 『한겨레신문』만 4‧3 기사를 다뤄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50주년을 맞았다고 해서 보수 성향의 『중앙일보』가 특집기사를 실었고, 특히 『한국일보』(4월 1일자)는 2개 면 전체를 4‧3 기획기사로 채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렇게 잘 나가던 『4‧3은 말한다』 연재가 중단되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이다.

 

4‧3연재 중단은 공안기관과 기관장들 합작품

 

나는 1999년 8월 23일 제민일보를 떠났다. 당시 지면에는 ‘의원면’으로 발표됐으나 실상은 ‘해직’이었다. 그리고 『4‧3은 말한다』 연재도 중단됐다.

 

재일동포인 새 경영주가 사장(김지훈), 상무이사(양조훈), 편집국장(조맹수) 등 간부 세 사람을 한꺼번에 그만 두도록 했다. 표면적 이유는 경영주의 뜻에 안 맞는 기사를 썼다는 것이다. 세 사람 모두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나에게는 기사 관리를 잘못했다는 것에다 자신의 4‧3 연재 중단 요구를 차일피일 미뤄왔다는 괘씸죄가 추가됐다. 나는 이런 해직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새 경영주가 「4‧3은 말한다」 연재에 부정적인 표현을 한 것은 1996년부터였다. 나에게 던진 첫 질문은 “4‧3연재를 언제까지 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면에 공안정보기관의 입김이 작동되고 있음이 감지됐다. 당시 경영주에겐 남과 북으로 갈린 가족사가 있었다. 팔순이 넘은 경영주의 부친은 원래 일본에서 줄곧 살다가 그 무렵에는 가족 관계로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다.

공안기관은 이를 약점 삼아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곧잘 경영주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는 “춘부장은 잘 계시냐?” 식의 질문으로 경영주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 무렵 일부 기관장들도 이에 편승, “제민일보는 다 좋은데, 4‧3연재가 지루하고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1998년 정권이 바뀌어 진보정권이 들어섰는데도 반공을 앞세우는 정보기관 하부조직이나 보수 성향의 기관장들은 변함이 없었다. 현직 대통령이 제민일보의 4‧3 진실규명 활동을 호평했는데도 말이다. 지금도 그 점은 이해가 잘 안 된다.

 

경영주의 해직 요구에 가슴 속에서 울컥 분노가 치밀었지만 나는 순순히 사표를 냈다. 그 경영주는 1995년 대주주의 개인 부도로 제민일보가 위기에 빠졌을 때, 우리의 간청에 의해 새로운 경영자가 됐다. 그 후로 적자를 메우기 위한 많은 액수의 투자가 이뤄졌다.

 

연재 마무리 못한 채 신문사 떠나

 

나는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다 어느덧 신분 보장을 요구할 수 없는 임원의 위치에 있었다. 4‧3 연재도 경영주가 처음 중단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힌 이후에도 3년간을 더 버텨왔던 셈이다.

 

그래서 「4‧3은 말한다」 연재는 『제민일보』 1999년 8월 28일자 ‛초토화작전-삼양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1990년 6월 제민일보 창간 이래 10년 동안 456회가 연재된 것이다.

 

초토화 이후의 1949년부터 4‧3이 종료되는 1954년까지 약술한다고 해도 족히 100회 가량은 더 연재해야할 시점에서 막을 내린 것이다. 아쉬웠다. 그래도 『4‧3은 말한다』는 한국 언론 사상 매우 드문 장기 기획 연재물로 기록됐다.

신문에 연재됐던 『4‧3은 말한다』는 ‘전예원’에서 한글판 제5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그런데 그 후 도쿄 ‘신간사’에서의 일본어판(「濟州島 四‧三事件」)은 제6권까지 출간됐다.

 

제5권 출간 이후 신문에 연재됐던 내용이 책으로 엮으면 한 권의 분량이 됐기 때문에 신간사 측의 독촉에 따라 일본에서 먼저 제6권을 출간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글판이 제5권까지만 나온 것은 아직 신문에 연재하지 못했던 제7권 해당 분까지 기술해 제6·7권을 한꺼번에 발간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사 조치에 편집국 내부의 일부 동요가 있었으나 오히려 내가 만류하는 입장이 되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여행을 떠났다. 교편을 잡고 있던 아내가 때마침 방학 중이어서 동행했다.

 

여행지로는 그때까지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경주를 택했다. 그 여행지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가 제민일보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손해배상 소장 날아와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4·3연재를 대표 집필하고 있던 4‧3취재반 김종민 기자가 경영주의 부당한 인사 조치와 연재 중단에 항의하기 위해 공개질의서를 작성했다는 것이다.

 

기자협회와 언론노조 기관지, 그리고 일부 중앙지에 게재될 공개질의서에는 그동안 경영주에게 4·3연재가 못마땅하다는 의사를 피력하면서 연재 중단을 압박한 조직과 사람들이 모두 실명으로 거론돼 있었다고 한다.

 

도정과 교육행정을 맡은 수장을 비롯해서 그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유력자들과 조직이어서 질의서가 공개될 경우 제주사회에 큰 파문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그 질의서를 신문사 밖에서 출력해서 발표하려는 바로 그날, 김 기자는 회사 측으로부터 긴급 연락을 받았다.

 

이승만의 양자가 “‛4‧3계엄령은 불법이었다’고 보도한 제민일보의 기사가 잘못됐다”면서 신문사를 상대로 정정보도 및 3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으니 빨리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경영주가 4‧3 연재를 못마땅하게 여겨온 마당에, 4·3계엄령 보도로 파생된 3억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만에 하나 신문사가 지는 날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4‧3취재반에게 날아올 불똥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예견됐다. 공개질의서 발표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에 ‘불법 계엄령’을 둘러싼 본격적인 소송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그때부터 4‧3취재반 기자 출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재판의 승리를 위해 뛰기 시작했다. 해직된 나도 회사 밖에서 승소를 위한 일에 힘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운명의 장난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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