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항과 산지천을 잇는 용진교 옆 광차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제이누리=김영호 기자]](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833/art_17551474680192_ce7bbb.jpg?iqs=0.29053748927335)
제주시 건입동, 산지천 물결이 바다로 흘러드는 자리.
형형색색의 방호벽이 늘어선 곳에 검은빛의 비석 하나가 단단히 서 있습니다.
"산지축항 공사 때 암석을 운반하기 위해 광차(鑛車)를 운행했던 곳이다."
2020년 3월 건입동 주민자치위원회가 기존 표석을 철거하고 새로 세운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 산지항 매립과 방파제 축조에 동원된 '광차(도록고)'의 역사를 증언합니다.
광차는 금산언덕 절개지나 토목 공사 현장에서 채석한 돌과 흙을 실어 나르던 무동력 궤도차로입니다. 사람 손에 밀리거나 끌려 움직였습니다. 그 레일은 부두와 내륙을 연결하며 자원 수탈의 동맥이자 섬 사람들의 땀과 노동이 깃든 길이었습니다.
![제주도 순환궤도 노선도다. [1969 제주연감]](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833/art_17551331650647_586373.png?iqs=0.21355517051955397)
1929년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토시가 김녕에서 한림까지 55.5㎞ 철로를 부설하며 '제주도 순환궤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본래 계획은 섬을 한 바퀴 도는 193.1㎞ 순환 철도였지만 일부 구간만 개통됐습니다.
지금은 '광차'로 불리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도록고(トロッコ)'라 했습니다. 트럭의 일본어 명칭은 궤간 610㎜ 협궤 위를 달리는 무동력 궤도차를 뜻했습니다.
동력기관 없이 오르막은 인부가 밀고, 내리막은 중력에 의지했습니다. 자갈 없이 목재 침목 위에 레일만 얹은 단선 철로 위를 달리는 모습은 '근대화'보다는 '착취'에 가까웠습니다. 제주시 관덕정을 기점으로 동쪽 김녕, 서쪽 협제까지 이어진 노선 중 김녕 구간은 주로 사람을, 옹포리~한림항 1㎞ 구간은 제빙·통조림공장의 얼음을, 애월항에서는 방파제 공사용 돌을 날랐습니다.
옹포리 구간에서는 전남에서 건너온 노동자와 마을 주민들이 함께 인부로 일하며 광차를 밀었고, 당시 10여대 이상이 상시 운행됐습니다. 어린이들이 장난삼아 타거나 등하굣길에 인부들에게 얻어 타는 경우도 있었지만 김녕 구간은 일본인 부유층과 고관들만 이용 가능한 '특권 교통수단'이었습니다.
평지에서는 사람 뛰는 속도였으나 내리막길에서는 아찔할 만큼 빨랐다고 전해집니다. 구조적 위험, 잦은 사고, 유지비 부담으로 1931년 9월 개통 2년 만에 전 구간 운행이 중단됐지만 광복 전까지 일본군의 진지와 항만 공사 현장에서 운반 수단으로 계속 쓰였습니다.
![1930년 제주항에 연결된 철로다. [출처=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 발췌]](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833/art_17551344332556_b6bb19.jpg?iqs=0.368992798850446)
광차가 닿았던 건입포·산지항 일대에서는 1926년부터 대규모 항만 공사가 벌어졌습니다. 성담을 허물어 나온 돌과 사라봉 남측 금산언덕의 현무암 암반을 절개해 광차궤도로 부두 매립지로 실어 나르며 방파제를 축조했습니다. 1928년 2차 확장, 1935년 3차 확장을 거치며 오늘날의 서부두·동부두 형태가 갖춰졌습니다.
![마음에온건입 클린하우스 옆 옛 대한통운 제주화급소 터 [제이누리=김영호 기자] ](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833/art_17551474816037_f6034d.jpg?iqs=0.38576043112411273)
이와 함께 건입포 역시 중요한 물류 거점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건입포는 예부터 육지와 제주를 잇는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1933년 대한통운 제주화금소가 들어서며 정기 화물 운송 체계가 확립됐습니다.
'시보레' 트럭 1대가 정기 운송을 맡았고, 인근에는 해군경비부와 해군헌병대가 주둔했습니다. 이는 건입포가 단순한 어항이 아니라 군사와 물류가 결합된 거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육상에서는 광차가 화물과 인력을 항만까지 실어 날랐고, 해상에서는 건입포·산지항이 일본 본토와 연결된 정기 항로로 이어졌습니다. 두 시설은 하나의 흐름 속에서 맞물리며 제주를 자원·인력 수탈 네트워크의 출발지로 만들었습니다.
항 주변에는 어시장·세관·선박회사·제재소·통조림공장·전분공장·조선소 등이 들어섰고, 일본인 거류민촌과 신사가 세워져 항만은 일본인의 생활·문화권으로 재편됐습니다. 산지항과 건입포는 '지방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제주산 자원과 인력을 대규모로 반출하는 전진기지로 기능했습니다.
![1929년부터 2년간 운행한 제주도 순환궤도 철도다. [출처=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 발췌]](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833/art_17551331680877_2b0c74.png?iqs=0.5354253546324288)
1923년 일제는 제주~오사카 정기 항로를 개설해 제주를 해상 교통망 속에 본격 편입시켰습니다. '제1군대환'(669톤)과 '제2군대환'(919톤) 같은 노후 여객선이 약 20년간 수십만 명을 실어 날랐고, 1934년 한 해 도항자만 5만명에 달했습니다.
이 항로의 첫 관문이 산지항이었으며 그 부두를 완성한 것은 바로 광차가 운반한 암석과 토석이었습니다.
운임 체계는 제주 전역 어느 포구에서 승선하든 오사카까지 3엔 균일제가 적용됐습니다. 먼바다에 정박한 대형 선박에서 종선(나룻배)으로 사람과 화물을 부두로 실어 날랐습니다. 그러나 이 배편은 단순한 여객·화물 이동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도록고와 항만 공사로 구축된 식민지형 운송 인프라의 최종 종착지이자 육상과 해상을 잇는 동일한 수탈 시스템의 두 축이 맞물려 완성된 길이었습니다.
![제주 궤도열차 노선의 동쪽 종착역이었던 '광차집(도록고집)'의 현재 모습이다. [제이누리=김영호 기자]](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833/art_17551344338416_fe469f.jpg?iqs=0.9901787734348098)
'출가물질'과 '출가노동'은 가계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공동체 구조를 약화시켰습니다. 결국 제주 경제를 일본 중심의 산업·유통 구조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결국 광차에서 산지항, 그리고 오사카로 이어진 이 노선은 교통의 편리함이 아니라 인력과 자원을 외부로 빼내는 거대한 수탈의 통로였습니다. 철로 위에는 기관차 대신 사람의 손과 발이, 항만의 부두 위에는 지역 발전 대신 일본 본토로 향하는 물류와 인력이 있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제주인은 단순한 이용자가 아니라 '노동 그 자체'였고, 편리함과 번영이라는 말 뒤에는 공동체 해체와 고향을 등지는 이별이 자리했습니다.
![제주 탑동 거리에 걸려있는 태극기다. [제이누리=김영호 기자]](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833/art_17551474891635_01e54b.jpg?iqs=0.2900155451519092)
광복 80년이 지난 지금 철길과 궤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도로와 매립지가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증언과 구술, 옛 신문과 사진 속 기록은 여전히 '근대화'라는 포장 뒤에 숨은 식민지의 얼굴을 드러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역사는 오늘날 제주에서 논의되는 도심 트램 도입 논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환경 친화적 교통수단'이라는 이름 아래 90여 년 전 도심을 달렸던 광차궤도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당시의 궤도는 일제의 침략과 수탈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그 선로 위를 달리던 광차는 제주 안에서 머무르지 않고, 제주 밖 일제 식민지 지배의 중심부로 향했습니다.
지금 다시 선로를 놓으려는 움직임 속에서 과거와 다른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운영 구조와 이익 배분, 그리고 지역 사회의 주도권이 반드시 제주 안에 있어야 합니다. 90년 전 철로 위를 달린 '광차'가 남긴 교훈을 우리는 되새겨야 합니다. 잠깐만요!! 오늘 우리가 다시 놓으려는 그 선로,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향하고 있나요? [제이누리=김영호 기자]
*** <잠깐만요!!>는 <제이누리>만이 아닌 여러분의 생각도 전하는 코너입니다. 한 컷 또는 여러 컷의 사진에 담긴 스토리와 생각해볼 여지를 사연으로 담아 보내주십시오. 저희가 공유의 장을 마련하겠습니다. 보낼 곳은 제이누리 대표메일(jnuri@jnuri.net)입니다.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에 전시돼 있는 1948년 5월 1일 제주항이다. [출처=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 ](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833/art_17551487792036_f32dba.jpg?iqs=0.101486121121818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