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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1)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는 명배우 잭 니콜슨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이다. 과연 잭 니콜슨의 ‘악당’ 연기는 발군이다. 영화의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지만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은 상당히 심각하다. 잭 니콜슨은 대단히 비사회적인 염세가이자 독설가이며 강박증세를 가진 소설가인 멜빈 유달을 연기한다. 이렇게 복잡한 ‘캐릭터’를 물 흐르듯 소화해내는 잭 니콜슨의 연기가 과연 일품이다.

 

 

멜빈 유달은 로맨스 소설 분야의 베스트셀러 작가다. 당연히 생활은 풍요롭다.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서 ‘고급지게’ 살아가지만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다. 세상과 인간을 향한 혐오로 짜증과 분노가 충만한다. 당연히 독신이다. 거기에 더해 유달은 강박증 환자이기도 하다. 

 

집밖을 나서면 모든 문고리나 손잡이를 손수건으로 감싼 다음 잡아야 하고, 매일 들르는 단골식당에 갈 때도 집에서 식기를 챙겨가야만 할 정도로 위생에 대한 강박증이 심하다. 샤워를 한번 했다 하면 최소한 두어시간은 걸린다. 1박2일의 여행이라도 하게 되면 거의 이삿짐 수준의 짐을 꾸려야 한다.

 

이 정도면 당연히 사람을 만나는 것도,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극도로 꺼릴 수밖에 없다. ‘코로나 방역 수칙’이 따로 필요 없다. 사람들이 모두 유달 같다면 애초에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위생 강박증만이 아니다. 경계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묘한 강박증이 유달을 쩔쩔매게 한다. 집 밖을 나서면 보도블록의 경계선을 밟을까봐 지뢰밭을 통과하는 병사처럼 극도로 긴장해야 한다. 

 

그렇게 보도블록의 지뢰밭을 헤치고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건물 현관에서 작은 타일이 깔린 홀을 맞닥뜨린 유달은 망연자실한다. 10㎝ 간격으로 촘촘히 심어놓은 드넓은 지뢰밭은 대책이 없다. 세상이 온통 지뢰밭인 유달은 당연히 ‘비사회적’이 될 수밖에 없다. 위생 강박증에 경계선 강박증이 있는 유달이 자기 집에 박혀서 하루 종일 자판만 두드려도 되는 소설가의 길을 택한 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 같다.

 

 

삶에서 ‘로맨스’가 1도 없고 로맨스를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유달이 로맨스 작가로 성공했다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공상과학 소설가들이 화성이나 외계, 미래를 경험해 보지 않아도 사람들을 열광시킬 수 있다. 국민에 대한 사랑이 1도 없는 정치인들이 국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 이야기’로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고 정치인으로 성공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충분히 경험하거나 누리고 있는 것에 심드렁하고 관심이 떨어진다. 항상 자신에겐 없는 ‘미지(未知)의 세계’를 연구하고 온갖 상상을 한다. 서울에 가 본 사람보다 못 가 본 사람이 서울을 더 잘 알기도 한다. 사랑을 못 해본 사람이 사랑을 더 많이 알 수도 있겠다. 로맨스를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유달의 ‘공상로맨스 소설’도 충분히 사람들을 열광하게 할 수 있다.

 

다양한 강박증상을 보이는 유달의 치명적인 문제는 ‘솔직함’이다. 인간 자체를 믿지 못하고 싫어하는 유달의 ‘염세성’과 강박증에 ‘솔직함’이 더해져 그의 ‘비사회성’을 완성한다. 유달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마음을 거치는 법도 없고,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머리를 거치는 법도 없다. 음식도 입, 위, 장을 차례로 거쳐야 소화가 되는 법인데, 유달이 내뱉는 말은 입에서 곧바로 배설된다. 입으로 배설하는 인물이다.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입에 발린 소리도 하지 못한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게이 화가에게 게이에 대한 혐오감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쏟아붓는다. 뚱뚱한 여자를 보고 그녀가 뚱뚱하다는 것을 일러주고 자신이 뚱뚱한 여자를 혐오한다는 것을 또박또박 일러준다. 인종에 대한 차별과 혐오도 빠지지 않는다.

 

관객들은 유달의 모습을 보면서 유쾌하게 웃는다. 관객들을 한바탕 웃게 만들어서 이 영화를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분류한 모양이지만, 사실 그다지 유쾌하게 웃을 만한 영화는 아닌 듯하다. 관객들이 유달의 솔직함에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유달의 쏟아붓는 인종차별, 성차별 의식에 공감하기 때문일 듯하다. 

 

 

관객들의 마음속에도 자리 잡고 있지만 차마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다른 인종이나 성 그리고 성취향자들에 대한 혐오감을 ‘솔직한’ 유달이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유달은 관객들의 억눌린 욕망을 대리만족하게 해주는 또 다른 ‘영웅’인 셈이다.

 

우리는 모두 솔직해지고 싶지만 동시에 솔직해서는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것을 속시원하게 말할 수 없어 병이 난 우화 속의 이발사처럼 솔직해질 수 없어서 마음의 병이 생길 것 같은 세상이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병이 난 이발사는 결국 대나무 숲속으로 들어가 시원하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치고서야 병이 나았다고 한다.

 

오늘도 많은 누리꾼이 현대판 ‘대나무 숲’이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 댓글창으로 달려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온갖 혐오를 쏟아낸다. 악성댓글 논란이 많아서인지 특정한 분야나 기사의 댓글창은 아예 닫아버리기도 한다. 압력밥솥에서 어느 정도 김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밥솥은 폭발하고 만다. 익명성을 보장받는 악성댓글은 분명 ‘문제적’이지만 그 ‘대나무 숲’마저 차단할 경우의 부작용도 만만치는 않을 듯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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