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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포레스트 검프 (1)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1994년)’는 설명이 필요 없는 걸작이다. 누가 어떤 기준에서 선정하든 영화 역사상 100대 명작에 반드시 포함될 만한 작품이다. 인생에서 소위 ‘천재’와 ‘그렇지 않은 이들’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영화는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새털로 시작해서 다시 바람에 날리는 새털로 끝난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바람에 날리던 새털은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는 검프의 발치에 내려앉는다. 바람결을 따라 정처 없이 이리저리 날리던 새털의 목적지는 검프의 발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 검프가 아들을 학교버스에 태워 첫 등교를 시키고 버스 정류장에 하염없이 앉아 있을 때, 다시 하늘에 새털 하나가 이리저리 떠돌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새털은 어디에도 내려앉지 않고 하늘 멀리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번 새털은 예정된 목적지가 없었던 모양이다. 언젠가 그리고 어디에선가 내려앉겠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지 어디가 될지 알 수 없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과연 결정돼 있는 것인지 아닌지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묻는다. 바람에 날리는 새털 하나의 운명도 그것이 어디에 내려앉을지 결정돼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일 뿐일까. ‘운명론(fatalism)’과 ‘결정론(determinism)’은 항상 어지럽다. 운명론에 따르면 사람의 운명은 이미 결정돼 있어서 아무리 기를 써도 그것을 피해갈 수 없다고 믿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나폴레옹도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숨을 거둘 때 “내 살아보니 내가 태어날 때 내 운명은 천문에 쓰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허허로운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폴레옹에 버금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죽음에 임해서 “내 평생 이룬 것의 7할은 운이고, 나머지 3할 중 7할도 내 주변 사람들이 한 것일 뿐”이라고 입맛을 다셨다고 한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렇게 운명론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결정론’도 여전히 호소력이 있다. 결정론자들은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고, 모든 일은 ‘인과관계’로 엮여있어 노력하면 그만한 보상이 주어진다고 믿는다. ‘초인철학’을 부르짖은 니체는 “운명아 비켜서라. 내가 간다”고 소리친다.

 

검프는 경계성 지능을 갖고 태어난다. 지능뿐만 아니라 다리도 철제 보조기구를 해야만 한다. 억척스러운 홀어머니는 ‘숙박업’을 하며 가계를 꾸린다. 태생도 환경도 그다지 순조롭지 못하다. ‘일반학교’의 입학도 순조롭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입학은 했지만 학생들의 따돌림이 기다리고 있다. 

 

대단히 불행할 ‘운명’을 타고났지만 그의 인생이 그다지 불행하게 흐르지는 않는다. 악동들에게 쫓겨 달리다 보니 보조기구에서 해방되고, 발군의 달리기 실력을 배양해 ‘무려’ 풋볼 명문 앨라배마대에서 4년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백악관에 초대돼 케네디 대통령과 인사도 나눈다. 

 

군대에서는 동료들을 사지에서 구해 전쟁영웅이 되고, 탁구에 소질을 보여 미국 핑퐁외교의 주역도 된다. 제대한 다음 도전했던 새우잡이는 극적인 성공을 거둬 통조림 회사까지 설립하고, 애플 컴퓨터에 투자해 거부가 된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잔디나 깎으며 지낸다. ‘천재’가 기를 써도 거두기 힘든 성공을 검프가 거둔 셈이다. 

 

그러나 검프가 아무리 노력하고 간절히 원해도 그의 사랑 제니는 그의 곁을 떠나고, 그의 유일한 친구 버바도 베트남전쟁에서 잃는다. 아마도 ‘장애’는 극복할 수 있는 운명이었지만 제니와 버바의 죽음은 피해갈 수 없이 정해진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검프는 마치 ‘양념 반, 튀김 반’처럼 인생의 운명도 반쯤은 이미 결정돼 있고, 반쯤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고 독백한다. 아마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운명론’을 따른다면 인간이 딱히 할 일이 없다. 노력한 만큼 보답이 있어야 사는 의미도 있고 보람도 있다. 그런 사회가 정의롭다.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을 쓴 존 롤스(John Rawls)는 모든 사람의 앞날이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에 가려진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한다. 특정계층이나 특정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본인의 능력이나 노력과 상관없이 사회적인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면 그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어수선하고 답답한 시절에 고관대작들과 부자들의 ‘엄마 찬스’ ‘아빠 찬스’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강남 출신 학생들의 명문대 진학률이 점점 높아만 간다는 보도도 나온다. 무지의 장막이 걷히고 출생환경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되는 사회가 된다면 그 사회가 과연 제대로 작동하고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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