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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신세계 (2)

‘골드문’ 조직원들이 조직의 배신자를 바지선에 태우고 인천 앞바다쯤으로 보이는 가까운 바다에서 죽을 만큼 두들겨팬다. 그다음 산 사람 입에 강제로 ‘콘크리트’를 부어 넣고 드럼통에 넣어서 다시 드럼통을 콘크리트로 채우고 뚜껑을 밀봉해 바다에 수장한다. 영화 ‘신세계’는 이런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렴풋이 동트는 바다를 뒤로하고 조직원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항구로 돌아와 시침 떼고 세상 속에 섞인다.

 

 

관객으로선 저런 무시무시한 조직이 우리 이웃에 평범한 얼굴로 돌아다닌다는 것이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다음 장면에서 구속됐던 ‘골드문’ 회장이 가석방으로 풀려나는 뉴스가 나온다. 회장님은 개선장군처럼 구치소를 나서며 대자대비한 미소를 머금고 미끈한 승용차에 오른다. 악마의 조직의 ‘대마왕’이 감방에 갇혀있어도 그 조직원들이 생사람의 배 속을 콘크리트로 채워 수장하고 날뛰는데 이제 ‘대마왕’이 봉인 해제됐으니 세상의 종말이 올 것같이 불안하다.

 

소위 ‘코로나 목사’로 비난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어느 목사님이 법원의 보석허가로 만면에 웃음을 띠고 구치소를 나서는 장면과 흡사하다. 민주국가의 법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인지, 민주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헷갈리고, 민의民意와는 동떨어진 판사님들의 심오한 뜻도 헤아리기 어렵다.

 

‘10명의 범죄자를 놓치는 한이 있어도 단 한명의 시민도 억울하게 처벌받아서는 안 되는’ 민주주의 법체제 아래에서 ‘골드문’의 우두머리들을 잡아넣어 조직을 무력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 법질서 아래에서 허가받은 뛰어난 ‘법 기술자’들은 ‘법 기술 사용료’만 넉넉히 지불하면 살인자도 무죄를 만드는 미친 신통력을 발휘해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천신만고 끝에 잡아넣은 ‘대마왕’이 민주주의적 법절차에 의해 풀려나자 허탈해진 경찰은 특단의 ‘비민주적’ 조치를 강구한다. ‘골드문’의 후계 구도를 둘러싼 ‘골드문’의 혼란기를 이용해 아예 경찰이 ‘골드문’ 조직을 장악할 기발한 발상을 한다. 경찰의 발상 대전환이다. 3명의 경찰 수뇌부는 밀실에서 가장 비민주적으로 작당한다. 몇년 전부터 ‘골드문’ 조직에 정보원으로 심어놓은 경찰 끄나풀 이자성을 이참에 아예 ‘골드문’의 새 회장으로 앉힐 작전을 시작한다.

 

 

신세계’ 작전이다. 미국에 적대적인 외국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미인사를 새 정부의 우두머리로 옹립시키곤 하는 미국 CIA의 불법 해외공작을 방불케 한다. CIA가 종종 벌이는 해외 정권붕괴 공작은 가장 ‘민주적’으로 운영된다는 미국이 다반사로 저지르는 가장 ‘비민주적’인 공작이다. 영화 ‘신세계’에서, 그리고 미국 CIA 국장에게서 민주적 절차와 규정에 충실해선 시급하고 특수한 국가적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절망감이 묻어난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을 경고한 한스 페터 마르틴(Hans Peter Martin)은 그의 신간 「게임 오버」에서 이번에는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피로감’을 경고한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 수많은 국가에서 우리가 수백년에 걸친 투쟁의 결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실패하고 국민에게서조차 외면당하고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민주사회’에 만연한 민주주의의 피로감은 사라져야 할 민족주의를 다시 불러온다. 미국·러시아·브라질·필리핀 모두 민주적 지도자 대신 강력한 전제군주와 같거나 포퓰리스트 성향의 트럼프·푸틴·보우소나루·두테르테 같은 민주주의적 관점에선 대단히 당황스러운 인물들이 전면에 부상한다.

 

여기에 미국과 세계패권을 놓고 경쟁할 정도로 성장한 중국은 민주주의는 개나 줘버리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만으로 사회가 유지되고 성장할 수 있는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감과 피로감이 더욱 확대된다면,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본주의적 전체 공산주의’란 거대한 실험의 결과가 전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 민주주의의 수호국이라고 하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종신집권이 가능한 중국의 시진핑이 부럽다고 공공연히 목청을 높인다.
민주적 절차에 따른 협의에 의한 합의에 도달하기 점점 힘들어지는 사회경제적 상황 속에서 소모적 논쟁과 정쟁만 난무한다. 이 과정에서 양극화는 점점 극단적으로 치닫는 모양이다. 서민일수록 민주주의 피로감이 심각하다.

 

‘신세계’의 ‘뜻있는’ 경찰 고위간부들처럼, 혹은 CIA처럼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불법으로라도 특단의 대책을 세워 서민들의 시급한 문제들을 풀어주기를 바라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게 본질적으로 조금은 답답한 것인데 어찌할 것인가.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절대 최선의 제도는 아니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기에 민주주의를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영화 속 ‘신세계’ 프로젝트는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결국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미국 CIA의 숱한 불법적인 해외공작들도 대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하거나, 간혹 단기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결코 지속가능한 해법들은 되지 못했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답답하고 피곤하다 해도 현재로써는 함부로 폐기처분할 수도 없으니 딱한 노릇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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