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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1917 (5)

에린모어 장군으로부터 적진을 돌파해 최전방 영국군 부대에 긴급명령서를 전달하라는 특명을 받은 베테랑 병사 스코필드 하사와 블레이크 일병. 냉정한 스코필드 하사와 달리 마음이 따뜻했던 블레이크 일병은 적군을 구해주려다 되레 사망한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최후처럼 보인다. 하지만 착한 사마리아인이 비극을 맞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를 두고 하는 말이다.

 

 

1차 세계대전 최대의 격전으로 기록된 ‘솜(Somme)강 전투’에도 참가했던 베테랑 병사 스코필드 하사는 에린모어 장군으로부터 적진을 돌파해 최전방 영국군부대에 긴급명령서를 전달하라는 특명을 받는다. ‘솜강 전투’는 바로 1년 전인 1916년 7월부터 11월까지 프랑스 서부 솜강 근처에서 벌어졌던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전투였다. 전투 첫날 영국군 희생자가 무려 5만8000명을 기록했고, 석달간의 전투가 끝났을 때,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희생자 60만명, 독일군 희생자 40만명을 기록했다.

영화 속 에린모어 장군과 스코필드 하사는 바로 그 처절했던 솜강 전투를 함께했던 기억을 안고 있다. 에린모어 장군은 독일의 기만전술에 속아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전방의 1600명 영국군 부대에 긴급하게 공격중지 명령을 하달해야 한다. 제때 명령이 전달되지 못하면 1600명이 개죽음당할 판이다. 그런데도 그토록 중대한 긴급명령을 내리는 에린모어 장군이나 그 명령을 받는 스코필드 하사나 그다지 긴장하거나 절박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면 말고’식이다. 심드렁하다.

아마도 하루에 6만명이 죽어나가는 솜강 전투를 치러본 에린모어 장군이나 스코필드 하사 모두 병사의 죽음에 무척이나 둔감해진 듯하다. 얼마 전 전투에서는 하루에 6만명도 죽어나가고, 석달 동안 60만명이 죽는 것도 봤는데, 까짓 1600명이 대수이겠는가. 그래서인지 에린모어 장군은 스코필드 하사에게 혼자 가기 뭣하면 아무나 한명 데리고 가라고 참으로 무성의한 지시를 한다. 스코필드는 그 형이 최전방 부대 중위로 복무하고 있다는 블레이크 일병을 데리고 길을 떠난다. 나무 밑에서 낮잠 자다가 그렇게 차출돼 엉겁결에 길을 떠나게 된 블레이크에게는 그것이 마지막길이 된다.

 

 

전쟁 통에 모두가 피난을 가버린 농가에서 수통에 우유도 담으면서 한숨 돌리던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는 하늘에서 영국군과 독일군 전투기들이 벌이는 공중전을 에어쇼 관람하듯 한가롭게 올려다보는데, 전투기 한대가 ‘관중석’을 향해 추락한다. 황급히 자리를 피해 화는 겨우 면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추락한 것은 독일군 전투기이고 전투기 조종사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위기에 빠졌다.

블레이크 일병은 고민하거나 주저함 없이 곧바로 추락한 독일 전투기로 뛰어가 조종석에 갇힌 독일군을 구하려 한다. 블레이크 일병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한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비록 자신들을 천대하고 적대시하는 유태인이지만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모든 힘을 다해 그를 돕는다. 

성경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예수님도 감동한 미담으로 남아있지만, 전쟁터는 그렇지 않다. 도움 받던 독일인은 ‘착한 영국인’ 블레이크 일병을 칼로 찔러 죽인다. 처절한 ‘솜강의 전투’를 경험한 베테랑 병사 스코필드 하사는 주저하지 않고 독일 조종사를 쏴 죽이고 비극으로 끝난다.

곤경에 처한 이웃에게 기꺼이 손을 내민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블레이크 일병처럼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이웃이 처한 곤경과 위험에 점점 각박해지는 우리나라도 몇년 전 ‘착한 사마리아인 법(Good Samaritan Law)’ 도입을 둘러싸고 설왕설래한 적이 있다.

 

프랑스는 매우 엄중한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법률에 규정하고 있다. “곤경에 처한 다른 사람을 구조하는 일이 자신에게 특별한 위험을 초래하지 않고, 제3자의 위험을 초래하지 않고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을 구조할 수 있음에도 고의로 구조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 5년 이하의 구금 및 7만5000 유로의 벌금을 매길 수 있다.” 

 

 

이밖에 폴란드·독일·스위스·네덜란드 등 많은 유럽국가들이 법으로 규정해 처벌하고 있다. 유럽사람들이 어지간히도 이웃과 ‘남’들의 절박한 상황에도 ‘쿨’한 모양이다. 독일의 법학자 예링(Rudolf von Jhering)은 “강제성 없는 규범은 타지 않는 촛불과 같다”는 법철학을 고수한다. 우리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바람직한 수많은 도덕규범이 있어도 그것이 법으로 ‘강제’되기 전에는 실효성이 없다는 개탄이다.

코로나 사태를 지나는 미국과 유럽의 ‘민낯’을 보면 예링의 개탄이 지나치지 않았음을 알 것도 같다. 나 자신과 이웃을 위험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을 법으로 강제하기 전에는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 모양이다. 프랑스를 필두로 유럽국가들이 ‘착한 사마리아인’을 법으로 강제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알 것도 같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한 사람이 자신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은 의심이 들어 검사 받으러 보건소를 가는데, 남들을 혹시라도 감염시킬까 걱정돼 마스크 쓰고 먼거리를 혼자 걸어갔다는 기사를 봤다. 그 사람이야말로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닐까. 폭염에 아무리 불편해도 얼굴 가득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는 우리 모두가 ‘착한 사마리아인’이다. 우리 사회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야만적인’ 유럽처럼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규범을 법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뿌듯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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