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브레스트 감독의 ‘여인의 향기(1992년)’는 연기력이나 흥행성 면에서 ‘아카데미 상복’이 없기로 유명했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쌍벽을 이룰 만했던 알 파치노의 한을 풀어준 영화다.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만 7차례 올랐던 알 파치노는 마지막 도전에 나선 고시생처럼 ‘미친 연기력’으로 홀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2시간 30분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의 연기력 때문인 듯하다.
프랭크 슬레이드 중령(알 파치노)은 사고로 시력을 잃고 전역한 이후 실의에 빠져 술에 의지해 살아가는 인물이다. 괴팍한 성품 탓에 친구도, 가족도 없이 뉴햄프셔 교외의 허름한 주택에서 조카 부부에 얹혀살고 있다. 그 성격에 당연히 조카 가족들과의 관계도 아슬아슬하다. 함께 살지만 뚝 떨어진 별채에서 홀로 지낸다. 심지어 네댓살 조카손녀하고도 앙숙일 정도이니 거의 스크루지 영감급이다.
추수감사절 휴가를 앞두고 조카 부부는 자신들이 여행을 하는 동안 슬레이드 중령을 보살펴 줄 도우미를 찾는다. 지역의 명문 사립교에 재학 중이던 찰리 심스는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 휴가 때 고향으로 돌아갈 비행기값 300달러를 벌기 위해 도우미 구인광고를 보고 슬레이드 중령 집을 찾아온다.
순탄치 않았던 면접 과정을 거쳐 고등학생 찰리와 맹인 퇴역 중령의 기묘한 뉴욕여행이 시작된다. 그 여행은 슬레이드 중령이 뼛속까지 시린 고독과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끝내기 위해 기획한 ‘자살여행’이다. 영문도 모르고 ‘자살여행’에 따라나선 찰리가 처한 상황도 슬레이드 중령 못지않다. 부잣집 도련님들이 주류를 이룬 명문 사립고에서 찰리는 시골뜨기 가난한 모범생이지만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거의 ‘고학생’이다.
설상가상으로 의도치 않게 교내 말썽에 연루돼 퇴학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에 몰려있다.조카 부부네 집에서 ‘칩거’생활을 하는 슬레이드 중령은 넉넉히 나오는 군인연금을 쓸 곳이 딱히 없다. 잔뜩 쌓인 군인연금을 ‘자살여행’에 몰방한다. 찰리와 일등석 비행기를 타고 뉴욕의 최고급 호텔인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짐을 풀고, 최고급 리무진 서비스를 받는다.
돌아다니다 술 한잔이 생각난 슬레이드 중령은 플라자 호텔의 그 유명한 뉴욕시의 최고급 사교 클럽인 오크룸(Oak Room)에 들어서고, ‘여인의 향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탱고 시퀀스가 전개된다. 오크룸 밴드는 탱고 불후의 명곡 ‘Por Una Cabeza'을 연주하고 있다. 잃어버린 시각의 몫까지 대신하는 슬레이드 중령의 비정상적일 정도로 발달한 후각은 탱고 선율에 따라 어디선가 풍기는 ‘여인의 향기’를 맡는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다가가 탱고를 청한다.
탱고를 배우긴 했지만 스텝에 자신이 없다고 머뭇거리는 여인에게 슬레이드 중령이 명대사를 날린다. “인생과 달리 탱고에는 틀렸다는 것이 없다. 틀리니까 탱고다.” 스페인어 ‘Por Una Cabeza’는 기껏해야 머리 하나 차이란 뜻이다. 우리말로는 ‘간발의 차이’쯤 될 것 같다.
사실 존슨 대통령의 백악관 파티에도 초대될 만큼 ‘잘나가던’ 슬레이드 중령은 한순간의 객기와 수류탄 사로(사격장에서 표적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도록 구획된 장소)란 ‘간발의 차이’로 인생의 스텝이 꼬여버렸다. ‘자살여행’ 중 뉴욕 오크룸에서 만난 낯선 여인을 안고 탱고 ‘Por Una Cabeza’를 추는 슬레이드 중령의 얼굴에 그의 꼬여버린 인생 스텝에 대한 회한이 묻어나는 듯하다.
탱고에는 ‘꼬여버린 스텝’이라는 게 없는데, 인생은 한번 꼬여버리면 ‘틀린 인생’이 돼버린다. 인생도 탱고처럼 가끔 스텝이 엉켜도 괜찮으면 좋으련만 인생은 그렇지 못하다. 탱고에서 스텝이 꼬이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 누군가 스텝이 조금 꼬여도 상대가 나를 받아주고 나에게 맞줘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대방의 실수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스텝에만 몰두하면 자신이 아무리 완벽해도 상대의 작은 실수가 모두를 망친다. 반대로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의 실수까지 품어주는 것이 결국 자신이 사는 길이다. 슬레이드 중령의 모든 가족들은 그의 괴팍한 성정과 무례함을 문제 삼아 그를 기피하고 내친다. 함께 춤을 춰야 할 가족들이 그의 스텝이 한번 틀리는 순간 그를 내쳐버린 꼴이다. 스텝이 엉킨 그를 내친다고 가족들이 행복해진 것도 아니다.
우리가 서로 앙앙불락하는 모든 사람들은 어쩌면 함께 춤추는 동반자다. 그런데 모두 자기 스텝에만 충실할 뿐, 상대의 스텝이 꼬이면 질책하고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다. 동반자이면서 결코 그에게 맞춰주고 손잡아주는 법이 없다. “Shall we dance Tango?”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