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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1917 (2)

영화 ‘1917’은 분명 전쟁 영화인데 왠지 전쟁영화답지 않다. 전쟁영화라면 대개 병사들의 처절한 전투 장면과 전쟁으로 고통받고 죽어가는 비극적 인간들의 모습이 담기기 마련인데, 묘하게도 ‘1917’에서는 이런 장면들을 찾기 어렵다. 그저 북부 프랑스 평원에 독일과 영국이 끝없이 파놓은 흙구덩이 참호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영국 병사들 모습뿐이다. 상대인 독일군들 역시 참호 속에 웅크리고만 있기는 마찬가지겠다. 소위 ‘교착상태’다.

 

 

‘교착상태(stalemate)’란 원래 서양장기인 체스(chess) 용어다. ‘체크메이트(check mate)’의 반대상황이다. King이 지금 직접 공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King을 어디로 움직이든 공격당하고 죽게 되는 상황이다. 한마디로 움직이면 죽는다.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다. 참호 속 병사들의 모습은 애국심에 불타는 것도 아니고, 독일을 향한 적개심에 불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임박한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나 비장함이 흐르는 것도 아니다. 우리도 함부로 적을 공격할 수 없지만, 적들도 함부로 우리를 공격해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양쪽 모두 뻔히 알고 있다. 지휘관이나 사병들이나 딱히 할 일이 없다. 그저 진흙 구덩이 속에서 종이 씹어먹듯 전투식량만 꾸역꾸역 먹어가면서 시간만 죽이고 있다. 참호 속을 오가며 마주치는 병사들은 서로 말을 건네거나 눈길 마주치는 것조차 귀찮다. ‘무기력감’이 참호 속의 공기를 압도한다.

 

참호 속 병사들을 휘감고 있는 ‘무기력’은 어쩌면 ‘학습된 무기력감(learned helpless ness)’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열심히 작전도 짜보고 공격도 해봤지만 사상자만 늘어났을 뿐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심리학자 셀리히만(Seligman)은 실패의 경험이 누적될 경우, ‘노력해도 어쩔 수 없다’는 무기력감이 학습돼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하게 되는 심리현상을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명명한다.

 

셀리히만은 24마리의 개들을 3그룹으로 나눠 전기충격 실험을 한다. 첫번째 그룹의 개들은 코로 단추를 누르면 전기충격을 멈출 수 있다. 두번째 그룹의 개들은 코로 단추를 눌러도 전기충격이 계속되도록 설계된다. 세번째 그룹의 개들에게는 전기충격이 없다. 이렇게 전기충격에 학습된 후, 개들을 다른 3개의 방에 나눠 놓고 전기충격을 가한다. 그러면서 칸막이만 뛰어넘으면 전기충격을 피할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된다.

 

 

첫번째, 세번째 그룹 개들은 열심히 칸막이를 뛰어넘어 도망치는데, 두번째 그룹 개들은 그 자리에서 눈 질끈 감고 전기충격을 감수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학습했기 때문이다. 개들에게 참으로 미안한 끔찍한 실험이다. 마음 같아서는 죄 없는 개나 원숭이 등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들은 모두 불법화하고 금지했으면 좋겠다.

 

전세계가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다. 가히 ‘세계대전’급이다. 외계인의 지구침공 같은 느낌이다. 재난 영화에서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면 무조건 미국 뉴욕부터 공격하는 것이 공식이더니,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미국에서 가장 기승을 부리는 모양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전세계가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 어느 나라에서도 승전보가 쉽게 들리지 않으니 갑갑한 일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예방하기 위해, 혹은 퇴치하기 위해 모두 당국의 지시에 따라 손도 열심히 씻고, 숨쉬기 불편한 마스크도 열심히 쓰고, 여행과 모임도 포기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도 열심히 실천한다. 그런데도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란 진지를 향해 총공격하는 방법은 아마도 전국을 완전봉쇄하는 길이겠지만, 경제가 회생불능의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차츰 참호 속 병사들처럼 ‘학습된 무기력’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이 지겨운 ‘참호전’을 종식시킨 것은 바리케이드와 참호를 뭉개버리면서 돌진하도록 설계된 ‘탱크’의 개발과 투입이었다. ‘탱크’가 지루한 참호전의 치료제이자 백신이었던 셈이다. 탱크처럼 확실한 치료제와 백신 개발 소식은 여전히 들려오지 않는다.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열심히 지켜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 때문일까. 산으로 들로 바다로 사람들이 모인다.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이 몇번의 실패 경험이 ‘학습화’돼 전기충격으로부터 도피할 노력조차 포기해 버린 ‘셀리히만의 개’들의 무력감과 동일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때 ‘노력’해도 안 되면 더 ‘노오력’하라고 다그치면 ‘라떼 타령’이 되는 것일까.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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