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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가을의 전설 (7)

러드로 대령은 정의롭지 못한 ‘인디언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젊음을 바친 군대를 떠난다. 러드로 대령이 보기에 그것은 ‘전쟁’이라기보단 ‘학살’이었다. 군인의 명예는 당연히 적군과 맞서 싸워 조국을 지키는 것일 텐데, ‘인디언 전쟁’은 그렇지 않았다. ‘인디언 전사’들과의 전투가 아니라 인디언 마을을 덮쳐 마을을 불태우고 인디언 아녀자들을 몰살했기 때문이다.

 

 

러드로 대령은 명예롭지 못한 ‘전쟁’에 분노하고, 그 ‘학살명령’을 내린 미국정부에 대해서도 분노한다. 정의롭지 못한 ‘인디언 전쟁’에 치를 떨게 된 러드로 대령은 ‘반전주의자’가 되고, 또한 전쟁을 조장하는 정부에 분노하는 ‘반정부 인사’가 된다. 말 그대로 ‘anti-’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antism’ 긍지까지 느낀다.

 

명문 하버드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막내 새무얼. 대학에서 ‘시민의 자유정신’을 배운 그는 자유시민을 억압하면서 전행을 일으킨 독일에 분노하고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가 싸우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정의롭지 못했던 인디언 전쟁’에 치를 떨었던 러드로 대령은 ‘시민전쟁이나 인디언 전쟁이나 똑같은 전쟁일 뿐이고, 모든 전쟁은 더러운 것’이라고 광분한다.

 

새무얼은 자신이 ‘정의로운 전쟁’으로 규정한 전쟁에 나가 전사하고, 전쟁에서 살아돌아온 큰아들 알프레도는 ‘대처’에 나가 사업에 성공하고, 성공한 사업가가 흔히 그렇듯 정치에 입문한다. 알프레도는 자신의 ‘정치적 동지’들을 데리고 아버지 러드로 대령에게 인사시키러 찾아온다. 이번에도 러드로 대령은 아들의 정치적 신념이나 포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불문곡직 ‘나랏일은 더러운 짓’이라고 고함을 지르며 모두 ‘내 집’에서 내쫓아버린다. 그렇게 극단적인 ‘앤티주의자’의 면모를 과시한다.

 

 

문제적인 것에 반대하는 것은 항상 쉽다. 전쟁은 분명 ‘문제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은 일견 그럴듯하다. 정부가 하는 일도 항상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반정부적’ 자세도 간혹 상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반대’가 공허해지거나 위험해지는 것은 ‘대안 제시’가 없기 때문이다.

 

러드로 대령도 일견 대단히 올곧고 대쪽 같은 ‘참군인’처럼 보이지만, 무조건적인 ‘반전’의 신념은 공허하거나 위험하다. ‘전쟁’은 절대악이고 ‘반전’은 절대선이 돼버린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나라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무조건 ‘나랏일’에는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퇴행적일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소’는 누가 키우나.

 

근대 이후 우리의 의식세계를 알게 모르게 지배하고 있는 논리체계는 다분히 ‘이항대립(二項對立·binary opposition)’ 구조다. 흑백논리의 전형이다. 크지 않으면 작고, 높지 않으면 낮고. 춥지 않으면 덥고 식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고,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는 그런 식이다. 가난한 자는 부자와 대립하고, 남자는 여자와 대립한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고 악마화할 뿐, 화합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 ‘이항대립’의 모순의 정점은 ‘반공反共’에서 발현됐다. 절대악인 공산주의만 반대한다면 반민족도 용서되고, 독재도 용서되고, 인권탄압에도 얼마든지 너그러워진다. 오늘도 우리 사회 곳곳에 러드로 대령과 같은 수많은 ‘antism’이 기세를 떨친다. ‘반공’도 여전히 서슬이 퍼렇고, 그 와중에 ‘반미(反美)’도 만만치 않고 ‘반일(反日)’도 새삼스럽게 기세를 떨친다. 특정한 대통령을 반대하는 ‘반박(反朴)’ ‘반문(反文)’ 구호도 호소력을 발휘한다. 어지럽다.

 

 

나의 정체성을 ‘반공’이나 ‘반일’ ‘반미’ 혹은 ‘반문’이라고 대답한다면 과연 나의 정체성이 있는 것일까. 마치 ‘사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사과는 배가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꼴이다. 사과는 분명 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배 아닌 것’이 곧 ‘사과’는 아니다. ‘포도 아닌 것이 사과’도 아니고 ‘감 아닌 것이 사과’도 아니다. 사과를 정의하라고 하면 사과만의 특성을 설명해야 하는데, 우리네 ‘보수’는 ‘보수’를 설명하라고 하면 ‘반공’과 ‘반문’을 들먹이고, 우리네 ‘진보’는 ‘진보’를 설명하라고 하면 ‘반일’과 ‘반미’를 외친다.

 

‘부정(否定)의 정의(定義)’는 ‘정의(定義)’가 아니다. 쓰레기장에는 무엇이 대단히 어지럽게 널려있는데 쓸모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오래전 가래천식약 ‘용각산’ 광고는 ‘이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고 차별화된 ‘부정(否定)’을 먼저 하고 마지막에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정의’라도 해주는데, 우리네 보수와 진보는 용각산 광고보다도 불친절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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