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문득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이반 데니소비치가 시베리아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보내는 하루를 그렸다. 특별한 날도 아닌 평범한 ‘하루’가 참으로 다사다난하고 길고도 길다.
‘포레스트 검프’의 이야기 전달 방식은 대단히 단순하다. 제니를 만나러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서 제니에게 줄 초콜릿 한 상자를 들고 버스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옆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수다’를 떠는 것이 전부다. 검프 옆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3번 바뀐다. 첫번째 청자聽者는 피곤한 간호사다. 아마 야간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퇴근하는 간호사인 모양이다. 극도로 피곤한 간호사는 검프의 ‘수다’에 일일이 반응할 기운도 없다. 검프의 수다를 피하기 위해 책을 읽는 척하지만 검프의 수다는 막무가내로 집요하다.
두번째 청자는 한가한 중년 남성이다. 남는 것은 시간뿐인 듯한 남성은 검프의 황당한 수다에 귀를 기울여준다. 두번째 청자가 자기 버스를 타고 떠나고, 세번째 청자로 할머니가 등장한다. 미국 할머니야말로 아무 수다나 귀 기울여 주고 맞장구쳐줄 최상의 파트너다. 버스정류장이든 코인세탁방에서 무료한 미국 할머니의 말씀에 몇마디 장단을 맞춰주다가는 헤어날 길이 없어진다. 검프도 버스 기다리던 중 남의 말을 무한정 들어주고 맞장구쳐주는 이 할머니를 만나 마침내 자신의 30평생 총정리를 마친다.
버스정류장에서 그렇게 3명의 청자들에게 검프는 자신의 기구한 일생을 요약한다. 짧게는 10분 길어야 20분 정도 되는 시간일 듯하다. 검프의 나이가 서른 안팎쯤 됐을 테니 30년 세월을 10~20분으로 요약한 셈이다. 60평생이라면 대략 1시간 이내로 요약 가능할 듯하다. 흔히들 자신의 기구한 일생을 글로 적으면 족히 책 몇권은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검프의 일생은 길어야 1시간으로도 정리 가능할 듯하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책 한권이라면, 데니소비치의 일생은 적어도 책 2만권 분량의 기록이 될 텐데 검프의 일생은 A4 용지 서너장의 내레이션으로 정리될 듯하다.
왜 이토록 하루는 길고 일생은 짧을까. 일일(一日)이 여삼추(如三秋)로 느껴지기도 하고, 일생이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당나라 심기제의 풍자소설 「침중기」에 나오는 노생지몽(盧生之夢)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메조밥을 앉힌 노생이 쪽잠이 들었다. 그 쪽잠 속에서 그는 80년 일생을 살았다. 하지만 깨어나보니 메조밥은 아직도 덜 돼 있었다.”
80평생이 메조밥이 익는 시간보다 빨리 지나감을 풍자한 글이다. 상대성 원리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아인슈타인도 ‘연인과 함께하는 영화관람 2시간은 한순간처럼 지나가지만, 지루한 수업 2시간은 영원과 같다’고 말했다. ‘시간’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일 뿐인 모양이다. ‘동서남북’은 불변의 절대적인 존재이지만 ‘상하좌우’는 가변적이고 상대적이다. 자신이 있는 곳에 따라 상하좌우는 바뀐다.
상하좌우처럼 시간이라는 것도 상대적이다. ‘존재’는 절대적이지만 ‘시간’은 상대적이다. 존재론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절대적인 존재는 상대적인 시간과 함께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존재도 상대적인 존재가 된다고 한다. 인간에게 ‘기억’이 없다면 인간의 머릿속엔 ‘현재 이 순간의 존재’만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나간 ‘나’는 이미 ‘나’가 아니다. 이런 설정에서라면 하루는 길게 느껴지지만 긴 하루가 모인 일생은 너무나 짧게 느껴진다. 지나간 ‘나’는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기억이 없다면 사람의 일생도 하루살이의 일생과 다를 바 없겠다.
지나간 ‘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나’도 존재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영화 속 아스퍼거 증후군의 검프의 30년이 그토록 짤막하게 요약될 수 있는 것도 아마 검프의 관심사가 지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인 듯하다.[※참고 : 아스퍼거 증후군은 발달장애의 일종으로, 사회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관심사와 활동에 상동증이 나타나는 증상을 가진 사람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누구나 하루보다 짧은 일생을 살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지나간 ‘나’를 기억하기 위해 열심히 기념품도 사서 모으고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면서 발길 닿은 곳마다 열심히 기념사진도 찍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마도 일생을 길게 사는 더 중요한 방법은 검프처럼 모든 것에 무심한 것이 아니라 많은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많은 것들을 사랑하는 일일 듯하다.
사랑의 기억들은 굳이 사진으로 남겨놓지 않아도 ‘현존재’와 똑같은 ‘나’로 남는다고 한다. 아마도 가장 충실한 삶을 산 사람들은 위인전 속의 사람들이 아니라 참 많은 것들을 사랑한 사람들일 듯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