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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테넷 (6)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들어낸 ‘시간여행’에는 이전의 시간여행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한다.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 혹은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가 충돌하고 뒤엉켜 싸우는 장면이다. 최신작 ‘테넷’에도 그런 장면이 등장한다.

 

 

인류의 미래를 구원하기 위해 미래로 출동했던 주인공은 현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미래로 출동하던 자신과 맞닥뜨려 뒤엉켜 싸운다. 똑같은 주인공이지만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현재의 주인공은 미래에서 오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저지하고, 미래에서 현재로 돌아가려던 주인공 또한 자신을 막아서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각자의 임무에만 충실한 채 뒤엉켜 죽기살기로 싸운다. 

 

나의 적은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는 타인들이 아니라 다른 시간대를 살았던 ‘나’와 다른 시간대를 살아갈 ‘나’일지도 모르겠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규정했다지만, 테넷이 보여주는 역사는 ‘아(我)와 아(我)의 투쟁’인 셈이다.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리는 수많은 사람이 과거에 저질렀던 자신의 행동과 판단, 과거에 내뱉었던 자신의 말들과 테넷의 주인공처럼 서로 발목을 잡고 뒤엉켜 싸운다. 예전 같으면 기록에 남지 않았을 행동과 말들이 이제는 인터넷에 고스란히 저장돼 그 싸움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더욱 격렬해진다. 이들 모두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를 알 수 없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내가 고위공직자가 될 줄 알았다면 ‘소소한’ 부동산 투기나 ‘소소한’ 엄마아빠 찬스로 자식들의 학교문제에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유명 운동선수나 연예인이 될 줄 알았다면 학교 동료들에게 함부로 주먹질이나 욕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미래의 나를 알았다면 그랬을 리 없겠다. 그렇게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저질렀던 일들과 싸우고 있다.

 

 

해방 후 친일행적으로 법정에 섰던 춘원 이광수는 법정에서 일제에 부역했던 이유에 대해 ‘조선이 해방될 줄 몰랐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보다 더 명쾌하고 군더더기 없는 답변이 있을 수 없다. 이광수가 테넷의 주인공처럼 타임캡슐에 들어가 미래를 보았다면 아마도 테넷의 주인공처럼 현재로 돌아와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창씨개명하고 ‘영광스러운 대동아 전쟁’으로 달려가라고 연설하는 이광수를 연단에서 끌어내리고 입을 막았을 것이다. 

 

아니면 영광스러운 대동아 전쟁을 부르짖던 이광수가 미래의 이광수의 말을 듣지 않고 서로 주먹다짐을 했을 수도 있겠다. 오늘도 많은 유명인들이나 고위공직자들이 속으로 춘원 이광수처럼 ‘내가 이렇게 유명인이 될 줄 알았나?’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미래에서 온 ‘내’가 ‘욜로(YOLO·You Only Live Once)’를 외치며 오늘 ‘플렉스(Flex)’해 버리려는 나의 지갑을 빼앗고 미래의 너의 모습을 생각해서 수입의 50%까지 저축하고 오늘의 모든 욕망을 포기하라고 윽박지르며 ‘파이어(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를 외친다.  모두 미래의 나와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다. 미래와의 그 싸움에서 현재의 내가 이기면 욜로족의 삶을 살고, 미래의 내가 승리하면 ‘파이어족’이 되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2개 도시에서 시장 보궐선거운동이 치러졌다. 두 거대도시의 ‘지도자(指導者)’를 선택한 선거다. ‘지도자’란 말 그대로 손가락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가리키고 그 미래로 이끌고 나가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미래를 제시하는 ‘선지자(先知者)’이기를 기대하는 이유다. 

 

 

선지자의 손끝은 도덕과 윤리의 미래를 가리킬 수도 있고, 물질의 번영과 발전을 향할 수도 있겠다. 도덕과 윤리를 따르든 물질적 번영과 발전을 선택하든 그것은 유권자들의 판단에 맡길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선지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모든 후보자는 어찌 된 일인지 미래와의 투쟁은 사라지고 오로지 과거와의 투쟁으로 점철된 듯하다. 테넷의 주인공처럼 미래를 먼저 보고 온 ‘선지자’라면 당연히 자신이 보고 온 미래를 가리키면서 현재와 미래의 투쟁을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선지자(先知者)’들의 손끝은 미래가 아닌 지나간 과거만을 시시콜콜히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선지자’가 아닌 ‘후지자(後指者)’의 모습이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가리켜야 할 ‘지도자’라면 과거와의 대화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미래와의 대화가 조금이라도 더 중요하지 아니하겠는가.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춘원 이광수가 ‘조선이 해방될 줄 모르고’ 미래에도 ‘식민지 조선’의 백성으로서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리켰던 아픈 과거가 되풀이되지는 말아야겠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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