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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테넷 (7)

‘테넷’의 주인공과 요원들은 ‘현재’를 바꾸기 위해 ‘미래’로 들어간다. 미래를 조작해 인류의 운명을 통째로 바꿔버린다. ‘과거’로 돌아가 과거를 바꿔 현재를 바꾸는 주제들은 꽤나 익숙하지만, 미래를 바꿔 현재를 바꾸는 방식은 특히나 우리들에게는 조금은 신선하기도 하다. 그런데 왠지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테넷의 우리나라 흥행 성적표가 썩 훌륭하지 않았던 이유일까.

 

 

미래에 관한 관점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첫째,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며, ‘정해진 미래’는 우리의 희망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오는 것(coming)’일 뿐이라는 관점이다.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 없듯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미래도 바꿀 수 없다. 

 

운명론(fatalism)의 뿌리다. 둘째는 미래는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making)’이란 관점이다. 운명론과 대척점에 있는 의지론(voluntarism)의 인식 체계다. 정해진 미래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미래의 무엇인가를 희망하고 노력하면 그것이 미래가 된다는 거다. 이런 관점에서 과거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얼마든지 우리의 희망대로 만들 수 있다. 

 

동양이나 우리의 세계관이 다분히 ‘운명론적’이라면 서양의 그것은 반대로 ‘의지론적’이다. 우리는 흔히 ‘팔자타령’을 하고 ‘운칠기삼(運七技三)’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서양의 니체는 ‘운명아 비켜서라, 내가 간다’며 주어진 운명과 미래를 바꿔버릴 의지가 충만한 ‘초인(super-man)’을 갈망한다. 

 

이어령 선생은 우리말에 ‘어제’ ‘오늘’은 있는데 ‘내일’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점을 우리가 미래지향적이지 못하다는 근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내일이라는 말을 하는 빈도가 그다지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일에 대한 무감각이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무책임한 말도 가능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종교란 본질적으로 가장 미래지향적인 것인데도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모든 종교는 어느 순간 현세기복신앙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세계적인 미래학자라고 불리는 짐 데이터(Jim Dator) 교수는 “과연 한국인들에게 미래 DNA가 있는가”라는 다소 당황스러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테넷이 보여주는 세계관은 대단히 ‘의지론적’이다. 핵폭발로 인한 인류의 종말이라는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미래로 쳐들어가 핵폭발을 멈추게 한다. ‘주인공’을 미래로 파견해 우리의 의지대로 미래를 바꿔버린다. 니체처럼 ‘운명아 물러서라. 내가 간다’는 기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테넷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결하고 선명하다. 우리의 ‘현재’를 바꿀 수 있는 힘은 ‘현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의지라는 점이다. 

 

세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유태인들은 미래에 대한 그들 특유의 강고한 ‘선민사상’이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현재’의 고난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다. ‘지구 최강’의 미래지향적 국민이라는 미국인들은 신대륙에 발을 딛자마자 결국은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꿈과 희망을 품고 부지런을 떨었다. 그리고 차츰 그 꿈과 희망을 19세기 중반에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이론으로 정립하고 결국 미국 대륙을 모두 손에 넣었다. 

 

지금도 많은 캐나다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언젠가는 저들의 강고한 ‘명백한 운명론’에 따라 캐나다까지 손에 넣으려고 할 것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명백한 운명론’은 분명 캐나다까지 아우르는 북미대륙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캐나다 사람들이 불안할 만도 하다. 운명론이 꼭 동양적이거나 한국적인 것만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운명론이 다분히 현실도피적이었던 반면에 저들은 운명론을 미래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승화시켰다.

 

 

요란스러운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가 끝났다. 이어령 선생의 말처럼 ‘내일’에 대한 논의는 없고 오직 ‘어제’와 ‘오늘’의 논쟁만이 오고간 선거였던 듯하다. 더욱 의아한 것은 소위 ‘보수’는 그렇다해도 소위 ‘진보’를 대표한다는 지도자들의 외침에서도 우리의 미래에 대한 믿음이나 진지한 꿈과 의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미래 청사진도 찾아보기 어렵다. 누군가 비록 지금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더라도 미국인들의 ‘명백한 미래(Manifest Des tiny)’처럼 ‘미래에 대한 믿음’이라도 제시해 주지 않는다. 몇몇 ‘내일’에 대한 약속들도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을’ 듯한 푸짐하지만 무책임한 얘기들만 오고 갈 뿐이다.

 

이쯤 되면 짐 데이터 교수의 의문처럼 ‘과연 한국인들에게 미래 DNA라는 게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지만 미래를 잊은 민족에게도 당연히 미래는 없지 않을까.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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