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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아포칼립토 (3)

마야의 대제사장은 인신공양의 한바탕 ‘축제’를 벌이기 위해 노예상인들을 고용한다. 노예상인들은 밀림을 헤치고 평화로운 마을들을 습격한다. 기껏해야 멧돼지 사냥이나 하던 평범한 ‘작은’ 마을 주민들의 전투력이나 무기로는 고도로 훈련된 노예상인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작은 것들은 아름답지만 대개 야만적인 힘에 굴복하곤 한다. 마을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고 양민들은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한다. 노예의 시조는 처음부터 노예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노예의 자식은 대대로 노예가 된다. 노예상인들에 끌려 지옥의 행군 끝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도시’ 치첸잇자(Chichen Itza)의 악명 높은 ‘쿠쿨칸(Kukulkan)’ 피라미드다.

 

천문에 밝았던 마야인들은 ‘쿠쿨칸’ 피라미드 동서남북 4개의 계단을 91개씩 만들어 364계단을 구축하고, 꼭대기 계단 하나를 더해 정확히 365계단을 쌓았다. 그다음 매년 춘분과 추분에 꼭대기의 그림자가 계단을 타고 내려와 마야인들이 섬기던 날개 달린 거대한 뱀(쿠쿨칸)의 형상이 되도록 설계했다. 오후 3시 45분에 계단 꼭대기에 뱀의 머리가 나타나고 계단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해서 4시 45분에 완전한 뱀 형상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7대 불가사의(2007년)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손색이 없다.

 

로마의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콜로세움 앞에서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자랑하지 말고, 아시리아인들은 바빌론을 자랑하지 말라”는 시를 남겼다. 아마도 마야인들은 쿠쿨칸 앞에서 “로마인들은 함부로 콜로세움을 자랑하지 말라”고 기염을 토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쿠쿨칸이 됐든, 피라미드가 됐든 콜로세움이 됐든, 그것이 과연 웅장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들일까. 영화 ‘아포칼립토’ 속에서도 신전 건축을 위해 수많은 노예들이 횟가루를 뒤집어쓰고 피를 토하고 죽어간다.

 

노예상인들과 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노예들을 확보하고 그들을 착취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파라오의 영광을 위한 피라미드 건축을 위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집트 노예들이 강제노동으로 죽어갔을까. 로마 문명의 기념비라 할 만한 콜로세움은 예루살렘을 정벌하고 약탈한 전리품과 노예들의 눈물과 피, 원한이 서린 곳이다. 하나의 문명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것들을 착취하고 파괴해야만 한다.

 

 

문명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Nobert Elias)는 ‘문명과 폭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불편한 진실을 밝힌다. 우리가 찬미하고 찬탄하는 수많은 ‘문명’의 이면에는 어김없이 잔혹한 ‘폭력’이 있다. 폭력적인 노동력의 착취 없이 이뤄진 거대한 도시와 조형물은 없다. 찬란한 문명을 가능케 한 집단이 이룬 거대한 부는 예외 없이 전쟁과 살육으로 얻어진 것들이다.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도경」에 기록한 당시 고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제국 송나라의 사신 서긍은 고려 개경의 왕궁을 ‘삼각산 아래 작은 기와집’이라고 대단히 가소롭게 기술한다. 어마무시한 송의 대궐에 비하면 어쩌면 개경의 왕궁은 말 그대로 송나라의 웬만한 양반들의 ‘작은 기와집’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

 

혹자는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나 마야의 쿠쿨칸 만 한 ‘찬란한’ 건축물도 세우지 못한 우리네 조상들의 옹색함과 ‘쪼잔함’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아마도 무지막지한 ‘폭력’을 동원했다면 우리네 조상들도 피라미드나 콜로세움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앙코르와트나 쿠쿨칸 정도는 세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비폭력적인 ‘삼각산 아래 작은 기와집’에 만족하고 살았던 우리네 권력자들의 높은 의식에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의 소박한 궁궐들이 적어도 쿠쿨칸보다는 훨씬 자랑스럽다. 요즘 지자체들의 신축 건물들이 거대해지고 화려해진다며 말이 많더니,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거대한 조형물과 기념물을 세우지 못해 안달이 난 듯하다. 걸핏하면 작은 시군구를 통합해 거대도시를 만들려고도 한다.

 

 

엘리아스의 개탄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것들은 항상 ‘폭력’에 의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폭력’에 의해 유지되고 반드시 ‘폭력’에 의해 무너진다. 영화 ‘아포칼립토’의 쿠쿨칸의 시작과 끝이 그렇고,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시작과 끝이 그렇다. 콜로세움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거대주의는 항상 자기파괴로 이어진다.

 

모두가 거대한 것을 찬미하는 요즘 프리드리히 슈마허(E. F. Schumacher)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외침이 다시 떠오른다. “인간들은 기술의 위력에 고무되고 흥분해서 자연을 파괴하는 생산체제와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사회를 만들었다… 이것은 결국 자기파괴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것이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효과적이며 편하고 즐겁고 또 영원하다. 인간은 작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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