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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가을의전설 (6)

도회로 나간 하버드 유학생인 막내아들 새무얼이 몬태나의 아버지 목장으로 약혼녀 수잔나를 데려온다. 아버지 러드로 대령과 큰아들 알프레도가 정장을 차려입고 기차역까지 마중을 나가 예를 갖춰 맞이한다. 그 자리에 둘째 아들 트리스탄은 없다. 목장에 도착했을 때 저 멀리서 말을 탄 트리스탄이 천천히 다가온다.

 

 

알프레도가 수잔나에게 트리스탄을 소개하지만, 트리스탄은 ‘만나서 반갑다’거나 ‘환영한다’는 간단하고 상투적인 인사조차 없이 수잔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빙글빙글 웃기만 한다. 대단히 무례하다. 알프레도가 수잔나에게 그런 트리스탄을 가리켜 ‘원래 이놈은 우리 목장의 동물들보다 무례하다’고 양해를 구하지만, 정작 수잔나는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최고의 환영을 받은 듯 흐뭇하기만 하다. 잘생기면 좀 무례해도 모두 용서되는 모양이다. 얼굴이 ‘열일’한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새무얼이 전사하고 수잔나는 미망인 아닌 미망인이 된다. 러드로 대령은 전쟁에서 돌아와 죽은 동생의 약혼녀에게 구애하는 알프레도에게 분노한다. 사실은 이미 둘째 트리스탄이 수잔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분노한 듯하다. 알프레도는 트리스탄만 편애하는 아버지에게 분노한다. “나는 아버지 말씀도 잘 따르고, 신도 잘 섬기고 사회의 질서도 모두 따르면서 성실히 살아왔다. 트리스탄은 신의 질서도 인간의 질서도 따르지 않는데 어째서 아버지와 모두는 트리스탄만 사랑하냐”고 퍼부어대고 집을 떠난다.

 

영화의 마지막에 내레이터인 ‘한칼’이 러드로 일가의 ‘가을의 전설’을 총정리한다. “트리스탄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았다. 그는 모든 것과 부딪치면서 거침없이 살았다. 모두 그런 트리스탄이 부서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트리스탄이 부서진 것이 아니라 트리스탄과 부딪친 모든 것들이 부서졌다.”

 

 

알프레도의 한탄처럼, 그리고 ‘한칼’의 총정리처럼 트리스탄은 신을 경외하지도 않고, 인간이 만든 법과 질서도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 신도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 영구불변하고 보편타당한 ‘자연’은 아니다. 동물 밀렵과 밀매를 금지하는 법이 엄연히 있지만 트리스탄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남아와 아프리카를 떠돌며 토인들을 이끌고 동물사냥으로 번 돈으로 쇠락해가는 아버지의 목장에 수십마리의 말떼를 몰고 돌아온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0년 미국에 서슬 퍼런 금주령이 내려지지만 트리스탄은 전혀 개의치 않고 주류밀매업에 나선다. 동물을 밀매하든 술을 밀매하든 트리스탄은 전혀 거리낌 없고 죄책감도 없고 자신이 범죄자라는 인식도 없다. 그것은 모두 인간들이 그때그때 만들어낸 ‘실정법’일 뿐 자연의 명령인 ‘자연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자연법에 따라 사랑하는 동생 새무얼을 죽인 독일군들을 죽여 머리가죽을 벗겨내고, 또한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책임있는 경찰과 장사꾼을 가차없이 처단한다. 원수에 대한 응징과 복수를 소심하게 실정법에 호소하지 않는다. 트리스탄은 자연법을 따르며 살고자 하지만 실정법은 그를 군대로 내몰고 주류밀매 범죄자로 내몬다.

 

반면에 알프레도는 철저하게 실정법을 따르며 사업을 번창시키고 하원의원까지 승승장구한다. 재력과 신분의 후광으로 사랑하는 여인 수잔나를 실정법상의 아내로 맞는다. 그러나 수잔나의 사랑을 얻지는 못하고 불행하다. 실정법이 사랑까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상으로는 트리스탄을 사랑하지만 실정법상으로는 트리스탄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결국 수잔나는 자살로써 알프레도 곁을 떠난다. 그렇게 모두 부서진다. 자연법과 실정법은 그렇게 부딪치고 갈등한다.

 

 

자연법은 실정법에 대비되는 법 개념이다. 실정법이 민족이나 사회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것에 비해, 민족·사회·시대를 초월해 영구불변의 보편타당성을 지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 자연법과 실정법의 관계는 항상 편치 못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불꽃이나 페르시아의 불꽃이나 똑같다”고 자연법을 최상위의 개념으로 파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법은 항상 똑같은 효력을 지니므로 환경과 상황에 따른 인간의 판단에 근거한 실정법의 정의와 항상 일치하지 못함을 개탄한다.

 

자연의 법칙은 보편타당하고 영구불변하지만,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수많은 법들은 보편타당할 수 없어 누구에게는 편하고 누구에게는 불편하다. 그래서 또한 변덕스럽다. 아테네의 불꽃과 페르시아의 불꽃이 다르지 않듯, 평양과 서울의 불꽃도 다를 리 없고, 교회와 모스크의 불꽃도 다를 리 없겠는데, 그 속의 실정법은 같지 않다. 그래서 트리스탄도 불행하고 알프레도도 불행하다. 모두 하나의 ‘자연법’ 속에서 사는 것은 정말 불가능할까.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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