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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아포칼립토 (7)

멜 깁슨의 ‘아포칼립토’는 두려움에 대한 보고서다.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두려움으로 일관한다. 사냥한 멧돼지 한 마리를 막대기에 매달고 의기양양하게 마을로 돌아가던 ‘표범 발’ 일행은 숲속에서 두려움에 질려 마을을 버리고 길을 떠난 다른 부락 사람들을 마주친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깨진다.

 

 

공포에 짓눌린 이웃부락 사람들은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지만 ‘표범 발’ 일행에겐 그 공포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전염된다. 모두의 마음속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자라기 시작한다. 말을 잃은 그들은 저마다의 생각에 빠진다.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 일행의 리더격인 ‘표범 발’ 아버지 ‘단단한 하늘’이 ‘표범 발’을 단속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눈에 서린 ‘막연한 두려움’을 경계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가 본 것을 말하지 마라. 공포는 전염되는 것이다.”

 

마을 잔치 중에도 ‘표범 발’의 뇌리에 박힌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은 떠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한다. 새벽에 마을을 덮친 노예상인들에게 마을은 불타고 부락민들은 노예로 끌려간다. 굴비처럼 엮여 끌려가는 마을 사람들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자신들에게 닥칠 ‘무엇’에 대한 공포에 질린다. 정체가 드러나거나 확실한 불행보다도 정체를 알 수 없고 불확실성이 가득한 ‘무엇’이 더욱 두렵다. ‘표범 발’은 만삭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우물속에 숨겨놓고 끌려가는 중이다.

 

그가 돌아가지 못하면 아내와 아들은 우물속에서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비가 쏟아지면 물에 잠겨 죽을 것이다. 그것 역시 확정된 불행은 아니다. 그러나 불확실한 두려움이 ‘표범 발’을 질식하게 한다. 공포는 이들만의 것은 아니다. 노예상인들도 공포에 휩싸이기는 마찬가지다.

 

‘쿠쿨칸’에 도착할 무렵, 역병에 걸려 죽은 엄마를 안고 있던 한 소녀가 노예상인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역병이 두려운 노예상인들은 역병 걸린 이 소녀를 작대기로 거칠게 밀어낸다. 그 순간 소녀에게 신이 내린다. 소녀가 초점 잃은 눈빛으로 이들에게 ‘저주의 계시’를 퍼붓는다. “태양이 사라지고, 표범 앞에서 달리는 남자가 너희들 모두를 죽일 것이다.” 범상치 않은 소녀의 ‘저주의 계시’를 받은 노예상인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번져간다.

 

 

‘신의 계시’란 불확실한 것이다. 그렇지만 불안하고 두렵다. 인신공양이 벌어지는 쿠쿨칸의 사원 앞에 모인 마야의 백성들은 신이 두렵고, 신의 ‘말씀’을 전하는 제사장이 두렵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할지 몰라 불안하고 두렵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고 불안하다. 이들의 불확실한 예상과 예감이 모두 두렵다. 백성들의 ‘두려움’을 거둬야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 백성들의 ‘두려움’을 거두기 위해 제사장은 인신공양의 한바탕 잔혹극을 펼치고 개기일식을 이용한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페인의 거대한 전함이 마야의 해안에 모습을 드러낸다. 도망치던 ‘표범 발’과 ‘표범 발’을 기를 쓰고 쫓던 노예상인 모두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아무도 그 전함의 정체를 모르고 그것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그것이 두렵다. 넋이 나간 그들의 눈에 절망적인 두려움이 서린다. 모든 질서가 무너져 내리던 1500년대 초 마야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고 온갖 두려움에 빠져 허우적댄다. 그 모습은 문득 이상李霜의 난해시 ‘오감도烏瞰圖’의 몇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
제1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13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그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코로나19 팬데믹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팬데믹 속에서 모두가 불확실한 두려움에 전염되는 듯하다. 모두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무서운 아해’가 누구이고 ‘무서워하는 아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누가 누구를 피해 질주하는지도 모르겠다. ‘백성’의 두려움을 거두기 위해 아포칼립토의 제사장이 벌이는 인신공양의 희생양을 만들거나 개기일식을 이용해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는 행위 없이 이 꽉 막힌 공포의 골목을 벗어나기를 소망한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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