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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톺아보기] 당신은 입도(入島) 몇 대? (3) 중앙정치 동경 버리고 지역사회와 소통

본격적으로 제주도 유배 문화를 말하려면 추사 김정희를 빼놓을 수 없다. 추사 김정희에게 있어 유배 생활은 그동안의 학문을 정리하고 독서에 매진하여 새로운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문화 엘리트로서 당대 지식인이었기에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스승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문적 기반이 약했던 제주도는 관료나 유배인을 통하지 않고는 유학을 접하기 어려웠다. 제주 유학자에게 유배인들은 학문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기회였다. 추사 김정희는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 그의 학문과 문화를 불모지에 전수한 효과가 크다. 추사를 가리켜 ‘탐라의 문화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하는 이유이다.

 

예술가로서 추사는 제자가 3000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교육 활동에 왕성하였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이상적, 소치 허련 등이 있으며, 추사의 내종사촌 민규호는 추사에게 배우러 제주도에 두 번이나 왔다. 그뿐 아니라 제주 지역 제자들도 그로부터 유학을 배우기도 했다.

 

추사는 유배 시절 대정향교에서 박혜백을 비롯한 제자를 길렀다. 박혜백은 추사가 아낀 인물이다. 그는 추사 인보(도장)을 망라한 『완당인보(阮堂印譜)』를 완성했다. 『완당인보』는 추사와 완당 등 약 180개에 달하는 추사의 인보를 모은 전집이다. 이들 인보는 추사 작품 감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자료다. 추사의 인보는 그 자체가 하나의 뛰어난 전각 예술이다.

 

추사는 제자 박혜백이 감자와 고구마 등에 새긴 전각을 보고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훌륭한 전각가로 키워냈다 한다. 추사각풍(秋史刻風)이라는 독특한 분야를 수립하여 자기 작품에 낙관(落款)으로 사용했던 추사는‘제주도 사람들이 각(刻)하는 손재주가 뛰어나다’라고 칭찬하며 그 방법을 전수했다. 이처럼 당시 제주도에서 추사를 통해 전각 보급이 활발했는데 이를 ‘전각 운동’이라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추사의 유배 생활은 제주 지역 유배 문화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추사 적거지(謫居地)가 복원되어 있고, 세한도를 모티브로 지어진 추사관이 건립됐다. 매년 대정읍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도내 일원에서 추사추모제, 서예 백일장 등 추사문화예술제가 열린다. 추사 김정희 발자취를 따라 걷는 ‘추사 유배길’이 2011년 생겼다. 추사 유배 생활을 다룬 드라마와 연극, 영상자료 또한 심심찮게 나온다.

 

이런 배경에는 추사체 같은 예술 작품보다도 유배 시설, 추사가 제주 사회에 보여준 학문적·문화적 공헌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조선조 500년 동안 200여 명 유배인이 제주를 다녀갔다.

 

대부분 유배인은 중앙정치에 대한 동경, 자신의 복권에 대한 갈망 등으로 정작 제주 사회와 제주 사람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제주도민을 하대하고 제주문화를 멸시하는 의식을 숨긴 채 제주 현실과 전혀 무관한 유학적 지식만을 뽐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추사는 독서와 창작 활동에 몰두하면서도 지역인재 발굴을 위해 지역사회와 소통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추사뿐 아니라 최초의 자발적 유배인 박영효의 유배 생활에서도 나타났다. 

 

개화파 주역으로 알려진 철종의 사위 박영효는 정변으로 일본에 두 번 망명하였고, 1907년 귀국 후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1년 형기를 마쳤다. 박영효는 1년간 유배 생활이 끝났지만 떠나지 않고 제주에 머물렀다. 박영효가 제주도로 유배된 1907년 9월부터 1년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했다. 그 후로도 유배 기간을 합쳐 3년 더 제주도에 머물렀다.

 

선왕의 부마였으면서 개화파 거두인 박영효가 서울에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자, 황성신문 1908년 8월 9일 자에는 '박영효 씨가 해배(解配) 후에도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봄에 개간한 과수원을 돌보기 위해 연말까지 제주도에 머물 예정'이라고 보도되기도 했다. 박영효 스스로 “선왕의 사위이자 전 영의정으로 정사에 진저리가 나서 스스로 이 섬에 은퇴하여 자기 나름대로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박영효는 온난하고 강수량이 많은 제주도 기후가 일본과 흡사하다 여긴 듯하다. 그래서 일반농사보다는 특수 원예 농업이 적합하리라 판단했다. 그리하여 원예작물의 재배와 보급에 나섰다. 직접 개량 감귤과 토마토, 가지 등과 비파, 대추, 석류 등 과수와 양배추, 양파, 토마토, 무, 당근 등을 재배했다. 재배에 성공한 작물은 주민들에게 적극 권장하여 심도록 했다.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주민들은 그를 따라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현재 제주도 감귤의 주요 품종인 온주밀감은 구한말 일본에 건너가 있던 박영효가 제주도로 가지고 와서 현재 제주시 구남동(독짓골)에 심었던 나무가 시초다.

 

박영효가 제주도에 끼친 영향은 원예 농사에만 머물지 않았다. 박영효는 제주 유배 시절, 제주도 최초의 근대 여성학교인 신성 여학교 설립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는 신성 여학교 설립의 재정적 걸림돌을 해결하는 데 역할을 했다. 또 국운과 국제정세 등의 시국관은 물론 근대사상의 강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박영효는 귀족이었지만 농민과 머슴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었으며, 동리 사람들과는 바둑 두거나 산지포에 나가 낚시하면서 어울리는 서민적 풍모를 드러냈다.

 

바로 이 점이 일본 후작 작위를 받은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영효가 비록 유배 중이기는 했지만, 한때 제주도민들에게 존경받는 ‘박판서’로 지낼 수 있었던 이유다. 제주 사람들은 훗날 박영효가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이 과수원을 ‘박판서 과수원'이라 불렀다. 박영효는 앞서 유배인들과 달리 내세울 만한 별다른 유배 문화 콘텐츠는 없지만, 농촌 생활과 농사에 확실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정책특보를 역임하고,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제주지식산업센터 센터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오달진 근대제주』(2019), 『오달진 제주, 민요로 흐르다』(2021), 『제주의 화전생활사』(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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