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9 (화)

  • 구름많음동두천 -0.4℃
  • 맑음강릉 5.2℃
  • 맑음서울 2.4℃
  • 맑음대전 2.7℃
  • 맑음대구 4.8℃
  • 맑음울산 4.4℃
  • 맑음광주 4.9℃
  • 맑음부산 5.2℃
  • 맑음고창 3.6℃
  • 구름조금제주 9.8℃
  • 맑음강화 1.1℃
  • 맑음보은 -1.0℃
  • 맑음금산 -0.3℃
  • 맑음강진군 5.9℃
  • 맑음경주시 4.4℃
  • 맑음거제 5.2℃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제주 톺아보기] 대학나무의 진화 (2) 제주감귤의 원조 ... 1911년 에밀 타케 신부

 

현재 우리가 즐겨 먹고 있는 온주 밀감과 만감류가 도입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02년 프랑스 출신 에밀 타케 신부는 제주에 와 ‘홍리(서홍)’성당에 13년간 근무하며 식물학자로서 제주산 식물을 연구하며 벚나무 원종을 한라산에서 발견하여 벚나무 원산지가 제주임을 밝혔다.

 

1911년 그는 제주산 왕벚나무 몇 그루를 일본에 있는 친구 포리 신부에게 보내주었는데, 그 보답으로 받아 심은 미장 온주 14그루가 현재 제주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는 온주 밀감의 효시(嚆矢)로 알려져 있다. 이 나무들은 그동안 서귀포시 서홍동 면형의 집에서 관리되었다.

 

조선 말기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박영효가 1907년에 제주도로 유배 온 후 제주읍 구남동에 머물면서 과수원을 만들어 일본에서 들여온 온주 밀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박영효는 개화파 주역으로 정변으로 일본에 두 번 망명하였고, 1907년 귀국 후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1년 형기를 마쳤다. 유배가 끝난 뒤에도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제주에 정착하고 땅을 매입하여 농사지었다.

 

1911년 서홍동 출신 김진려가 일본으로 가서 구마모토에서 접목 강습을 받은 뒤 돌아올 때 온주 밀감과 워싱톤 네이블을 가지고 들어와 심었다고 한다. 최초로 일정 규모를 갖춘 큰 농장은 서귀읍 서홍리에 살던 일본인 미네(峰)가 개원한 현 제주농장이다. 1913년 온주 밀감 2년생 묘목을 도입해서 심었다고 한다. 이후 일본인 농장주가 경영하다 1944년 고 강창학 선생의 부친인 강서구 선생이 농장을 매입했다. 강창학 선생이 직접 관리하기 시작한 1948년 이후 우리나라 최대 감귤농장으로 알려져, 수학여행단과 정부 관료들이 제주에 오면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1945년 광복 이후 우장춘 박사가 감귤 품종 개량을 시도하였지만 한국 전쟁으로 혼란한 와중에 무산되었고, 제주4·3은 제주도 농촌을 폐허로 만들어 이미 심어있던 감귤마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제주4·3 여파가 다소 가라앉은 1955년부터 감귤재배에 관심 가지게 되었다.

 

1965년부터 재일동포들이 감귤 묘목을 기증하여 고향 돕기 운동이 재일동포 사회에 일어났으며 이 무렵 ‘제주 개발회’, ‘제주도민회’, ‘제주친목회’, ‘경제인회’ 등 단체와 마을 단체친목회를 통하여 ‘고향 감귤 묘목 보내기 운동’이 전개되었다. 지금도 제주도 마을마다 이를 기리는 재일 교포 공덕비가 즐비하다.

 

1964년 2월 제주도를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미악산 아래까지 감귤나무를 심을 수 있을 수 있는 땅이면 다 감귤나무를 심어라. 제주도는 온난한 지역인 만큼 식량 증산보다 감귤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라”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이 때문인지 지금도 서귀포시 서홍동 속칭 ‘멀 왓’ 지경에는 오르내리기도 힘든 급경사지에 자연석을 쌓아 단단한 돌담을 쌓고 경사지 흙을 일구어 감귤나무 한 그루 한 그루 심으며 정성껏 잘 돌봐왔던 덕에 지금은 대표적인 감귤원 경관이 되고 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감귤을 재배하면 자식을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내 공부시킬 수가 있다고 해서 엄청난 재배 붐이 일어났다. 1970년대는 감귤 농업인에게 가장 ‘역동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지속적인 재배면적 확장과 기술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노지 감귤 재배기술이 제주도 전체로 확장되어 나갔던 시기다.

 

50년 전 온 동네가 나서 과수원을 조성하던 당시, 우리 집에서도 어머니 혼자 밭에 나가 과수원을 만들었다. 초기 감귤원 조성은 시간이나 공력이 많이 든다. 먼저 울타리 밭담을 쌓고 담 주변에 편백이나 삼나무로 방풍림을 심었다. 밭에 가로, 세로 일 미터, 깊이 일 미터로 구덩이 파고 거기에 탱자나무에 접붙인 온주 밀감 묘목을 심는다. 주중에는 어머니 혼자, 주말에는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와 초등학생이던 나와 형제들 모두 과수원에 가서 해 질 때까지 일하다 오곤 했다.

 

1980년대엔 재배면적 증가보다 생산량이 증가했다. 이 당시 품종도입에 의한 작형(作型)을 늘렸다. 1990년대는 생산량 증가에 따른 가격 불안정으로 생산보다 판로에 관심을 가지는 시기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정책 특보를 역임하고,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제주지식산업센터 센터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오달진 근대제주』(2019), 『오달진 제주, 민요로 흐르다』(2021), 『제주의 화전생활사』(2022) 등이 있다.
 


추천 반대
추천
1명
100%
반대
0명
0%

총 1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26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