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녀 [제주도 제공]](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730/art_17533351504969_a74afe.jpg?iqs=0.3987831910561893)
1970년 당시 23살 제주도 구좌읍 평대리 해녀 김옥순씨는 결혼한지 한 달 만에 독도로 물질을 갔다. 신랑 역시 결혼 직후 군에 바로 입대했다. 당시 독도에는 전복이 많아 어른 주먹만큼한 전복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울릉도는 오징어, 독도는 문어’이던 시절이라, 가끔 동해안 마을 잔칫상 단골 메뉴인 대왕 문어도 잡았다.
이름에 글월 문(文)이 들어갈 만큼 무척추동물 중 지능이 가장 높고, 뇌와 신경조직이 발달했으며, 시력이 좋아 바다의 유인원이라고도 했던 ‘북태평양 대왕문어’는 ‘참 문어(왜문어)’보다 몸집이 커서 ‘대문어’, ‘대왕문어’ 혹은 살이 물러 ‘물 문어’라고도 불린다. 대왕문어는 수심 150m에 서식하며 최대 길이 2m, 무게는 30kg까지 달한다. 수심이 깊은 독도 인근 바다가 대왕문어의 좋은 서식처다.
문어 다리에 발달한 원형 발판은 아주 힘이 세고 세 가지 근육이 있어 무엇이든 잡으면 진공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사냥할 때 다리를 우산처럼 펼치는데,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
그래서 대왕문어를 잡을 때는 반드시 2인 1조로 작업해야 한다. 먼저 한 해녀가 문어 정수리를 내리쳐 죽이고 나면, 다른 해녀가 뒤로 돌아 문어 다리들을 망사리에 담아 물 밖으로 꺼내왔다. 그 무게가 보통 20kg이 넘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김옥순 해녀는 대왕문어 잡을 때 짜릿함을 잊지 못했다.
제주 해녀들은 일제강점기부터 독도에 물질하러 갔다. 보통 한해에 30명에서 40명, 해녀들이 울릉도를 거쳐 독도로 가서 물질했다. 처음 독도에 물질 간 사람들은 협재 해녀들이다. 이후 제주 한림, 구좌 등 해녀들이 독도로 건너가 조업을 했다.

지금도 독도에는 일명 ‘동키 바위’라는 해녀바위가 있다. 독도 바다를 개척해 온 제주 해녀들의 삶이 녹아있는 바위다. 제주 한림읍 마을회관 인근에는 이들의 활동을 기리는 ‘울릉도 출어 부인기념비’가 있다.
‘출가(出稼)’는 국내·외 다른 지역 바다에 가서 물질 작업하여 소득을 벌어들이는 경제 활동을 말한다. 제주에서는 이런 해녀의 출가 노동을 ‘바깥 물질’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제주의 출가 해녀들은 한반도 연안 곳곳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동북아시아 일대 여기저기 안 가는데 없이 여러 지역으로 물질을 다녀왔다.
17살에 처음 충무의 어느 섬으로 출가물질을 다녀온 김옥순 해녀(78)는 이후 울산, 독도, 가거도, 감포, 포항 등 한반도 여러 ‘바당 밭’에 물질 을 다녀왔다. 일부 해녀는 거기서 살림을 차리고 눌러살기도 했다.
조선 시대 제주 해녀들의 채취물인 전복, 소라, 해삼, 미역 등은 대부분 진상품이었다. 당시 해녀 물질은 부역과 다를 바 없었다. 1900년대부터 부산과 목포를 근거지로 하는 일본 상인의 등장으로 해조류, 조개류 수요가 급속히 증가했다. 이에 따라 그 시장 가치가 높아져 최상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제주도 주변에 일본 잠수기업자가 일찍부터 출어해 오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제주 바다에 출어하면서부터 제주도민과 충돌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1884년 9월부터 1891년 11월에 걸쳐 제주 바다에 출어 금지 조치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불법어로작업(密漁)이 계속되어, 제주도 연안 어장은 급속히 황폐해 갔다.
이러한 제주 연안 황폐화로 새로운 생산지인 ‘바다 밭’을 찾아 해녀들이 바깥 물질을 나가기 시작했다. 제주도 해녀의 출가물질은 1895년 부산 앞 영도에서 최초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후 해녀들은 한반도 전역과 일본의 태평양 연안 지역, 대련(大連), 청도(淸島)까지 바깥 물질을 갔다.
제주도 해녀의 출가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먼저 객주 모집에 의한 방법이 있었다. 그들은 절영도에 정착하며 일본인 무역상 밑에 있으면서, 매년 음력 12월경 제주도 각지에서 해녀를 모집하여 전대금(轉貸金)을 건네주고 계약한다. 해녀는 기선으로 가고, 뱃사공과 감독자 역할을 하는 남자는 어선으로 육지에 건너간 다음 부산에서 합류한 후 출가지(出稼地)로 떠난다.

다른 형태는 독립 출가다. 해녀의 남편 2~3명이 공동으로 ‘통통배’를 매입하여 가족, 친척 등 마을 해녀들을 태워 출가지로 가는 방법이다. 1970년 김옥순 해녀는 독립 출가 형식으로 독도로 물질을 다녀왔다.
1920년대 말 김녕 사공 김병선이 제주 해녀를 고용하여 동경 미야케지마 지역에 출가해 조업하였다. 바로 제주 해녀 최초의 일본 출가물질이다. 그 후 능력을 인정받아 1932년 현재 동경 미야케지마에서 240명 해녀가 고용되어 작업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를 역임하고,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천사나래 주간활동센터 시설장을 맡아 일하며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학기 중에는 제주한라대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오달진 근대제주』(2019), 『오달진 제주, 민요로 흐르다』(2021), 『제주의 화전생활사』(202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