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진 목사는 하멜 일행에 대한 심문을 마치자, 이들을 ‘국왕 숙부의 집'에 머물게 했다. 『하멜 표류기』에는‘지금 국왕(효종)의 아저씨(광해군으로 추정)가 왕위를 찬탈하려다가 갇혀 죽은 곳’이라 기록하고 있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처음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병자호란 발발 다음 해인 1637년 제주로 유배됐다. 그는 제주성에 위리안치되어 여러 모욕과 암살의 위험을 견디며 쓸쓸히 여생을 보내다가 병으로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12년 후, 36명 네덜란드 선원은 광해군이 유배 생활 도중 머물렀던 적거(謫居)에 수용되었다. 당시 그 인원을 수용할 만한 규모의 시설이 거기 외엔 없었나? 하는 의문이 들지만, 어쨌거나 현재 이를 문화 콘텐트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제주시 용담공원에는 ‘용담1동 하멜 길’이 있다. 17세기 제주를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을 소재로 한 ‘하멜 길’이 제주시 용담1동에 들어섰다. 하멜 일행이 제주에서 지낸 10개월간 역사의 기록을 용담1동에 맞게 스토리텔링 했다. 하멜 길은 제주읍성 서문, 배고픈 다리, 선반 내, 동한두기, 용연, 부러리길 등을 둘러보는 총 2km 구간으로 정했다. 하멜 일행은 약
370년 전 제주 해안서 표류한 하멜 일행의 구세주는 포도주였다. “한 통의 붉은 포도주를 들고 가서 우리가 바위틈에서 발견한 회사용, 은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들은 포도주를 맛보더니 좋은지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는데 나중에는 대단히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와인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당시 제주 목사 이원진은 그들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난파선에서 건진 물건들을 하멜 일행에게 되돌려주었고 겨울 겹옷과 바지 신발 등을 제공했다. 제주도 사람들은 점차 하멜 일행을 관대하게 대했다. 지닌 음식이 베이컨과 고기뿐임을 알고, 너무 굶주린 상태에 많이 먹으면 탈이 날 것을 염려해 쌀죽을 조금씩 가져다줄 정도였다.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 제주 목사였던 이원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총독(이원진 목사)은 우리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잔치와 그 밖의 여흥을 베풀어주었다. 날마다 그는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국왕의 답신이 도착하면 우리가 일본에 보내진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교도로부터 기독교인이 무색할 정도의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그는 우리를 자주 밖으로 내보내 주었고, 그 앞에서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2리 해안에 ‘하멜 일행 난파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이곳은 남방큰돌고래가 매일 두 차례 보인다는 대정읍 노을해안로에 있다. 남방큰돌고래를 보려고 가족과 함께 이곳을 찾은 어느 관광객은 “아, 여기가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하멜이 표류해왔던 곳이네!”라고 하며 관심 있어 했다. 이어 그는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하멜 일행이 우리나라에 표류해왔다. 하멜 일행은 15년 동안 억류되었다가 네덜란드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지어 조선의 사정을 서양에 전하였다”라고 적혀 있다고도 말했다. 1653년 하멜은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대만을 경유 일본 나가사키로 출항했다. 배에는 목향 2만 근, 명반 2만 근, 용뇌, 대만산 녹피(사슴 가죽) 2만 장, 영양 가죽 3천 장, 산양 가죽 3천 장, 설탕 9만 근 등 일본과 거래할 화물이 가득했다. 일본으로 가던 중 태풍을 만나 닷새 동안 악전고투 끝에 배는 부서졌고, 일행은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해안에 표착(漂着)했다. 선원 64명 중 선장을 포함한 28명이 죽고 36명이 살아남았다. 하멜은 처음부터 본국으로 돌아 갈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당시 하멜은 23살이었고 훗날 1666년 탈출할 때는 3
“씨앗과 싸우러 가니 산을 넘어 싸우러 가니, 동산 밭에 메밀꽃같이 번듯이 앉았는데 씨앗을 보니, 내 눈에도 저만큼 고운데 임의 눈에야 오죽하리.” 출발할 땐 머리 체 잡고 목 비틀 참으로 갔건만, 막상 메밀꽃처럼 고운 그녀 모습을 보니‘자신이 보기에도 저리 고운데 남편 눈에야 오죽이나 할까?’ 싶어 단념하는 대목이다. 마치 어느 드라마에서처럼, 남편의‘숨겨 놓은 그녀’을 반쯤 죽여 버리려고, 명품 정장 꺼내 입고 미용실 들러 마사지 받고 머리 힘주며 교양 있게 갔는데, 막상 ‘상간녀’ 모습을 보니 젊고 건강한‘그 젊은 년’의 자연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초라해지는 아내의 심정과 비슷하다. 돌아오면서“평생 나밖에 모르는 순둥이 내 남편이 나처럼 우아한 조강지처 놔두고 실수로 아주 잠깐, 눈 돌릴 적에야 그 정도 되니까 그랬겠지?”라며 애써 자신을 합리화한다. 우뚜릇뚜 룻뚜우 우뚜릇뚜 룻뚜우~ 저 꿩이나 잡았으면 저 꿩이나 잡았으면~ 살찐 날개 쪽은 시엄마나 드렸으면~ 힐끔 보는 눈 쪽 일랑 씨아방을 드렸으면~ 혹 이 노래를 아시는 분이 계실까? 아마, 들어본 거 같다고 기억하시는 분조차 거의 없을 거다. 이런 노래도 있었나? 갸우뚱할 정도. 이 노래는 197
1988년, 재일교포와 결혼하여 현재 일본 나가노현 우에다시에 거주하는 우리 누나는 그곳에서 딸 넷을 낳았다. 조카들이 태어날 때마다 제주에 있는 친정엄마, 우리 어머니가 몇 개월 동안 누나네 가서 산후조리와 육아를 도와주다 오시곤 했다. 몇 해 전 일본 동경 사는 큰 조카가 자기 신랑이랑 두 살 딸을 데리고 외가인 우리 집에 다녀간 적이 있다. 그때 조카의 어린 딸이 하도 졸려 하자, 한국어는 고사하고 제주말을 전혀 못하는 조카의 입에서 어설프게나마 제주 민요 ‘웡이 자랑’이 흘러나왔다. 조카는 제주말을 전혀 못 하지만 어릴 적, 자기 외할머니가 자신을 재우기 위해 불러줬던 자장가만은 원어로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히 기억하는 차원을 넘어 자기 딸에게 그 자장가를 불러주는 게 아닌가? 생전에 누나에게 자식들 한국어 교육 안 시킨다며 역정 내시던 아버지가 그 장면을 보셨다면 뭐라 하셨을까? 웡이 자랑 노래듣기 자랑 자랑 웡이 자랑 어서 자랑 어서 자랑 어서 자랑 저리로 가는 검둥개야 이리로 오는 검둥개야 우리 아기 재워 주라 검둥개야 울지 말라 암 닭이랑 울지 말라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아주 예전에 제주 여성들은 집일, 밭일, 물질에 이르기까지 두루 일했다.
제주댁으로 잘 알려진 국악 가수 양지은은 TV조선 ‘금요일은 밤이 좋아’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제주 민요 ‘너영 나영’을 불렀다. 이 무대는 제주 민요를 현대 리듬에 맞춰 섬세하게 감정표현을 하여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처음 듣는 제주 민요의 색다름과 청아한 양지은의 음색이 더해져 제주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많은 이들의 귀를 즐겁게 했다. ‘너영 나영’이란‘너랑 나랑' 의 의미를 지닌 제주어로 너와 내가 함께 어울린다는 뜻이다. ‘너영 나영’은 ‘오돌또기’, ‘이야홍 타령’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제주 민요 중 하나다. “너영 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 낮이나 밤이 밤이나 참사랑이로구나.” 여기까진 알겠는데, “백록담 올라갈 땐 누이동생 하더니 한라산 올라가니 신랑 각시가 된다.” 이 대목에선 제주토박이인 나도 자세한 내막을 잘 모르겠다. ‘너영 나영’은 노래 앞부분은 원곡의 감성을 살려 편안한 리듬으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잔잔히 어루만지며, 뒤로 갈수록 사물놀이로 흥을 돋우는 반전 멜로디가 있다. 곡의 서사를 따라 완급을 조절하며 세밀하게 감정선을 전달하는 제주 양씨 양지은의 목소리는 삶에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을 정화 시켜 준다. 그래서 그녀
고온다습한 기후를 갖는 제주도에서는 어떤 시설이나 구조물, 형상을 나무로 만들 경우, 목재 부분이 쉽게 부식되어 1~2년마다 한 번씩 새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모든 걸 돌로 만들자, 주의였다. 제주도 각 마을 중요한 곳에, 세워지는‘거욱’이나 읍성 취락 입구에 세워졌던 돌하르방 역시 그랬다. 제주도의 대표 캐릭터 돌하르방의 주요 기능은 수호신적 기능, 주술 종교적 기능, 위치 표식 및 금표 기능 등이다. 우석목, 무성목, 벅수머리, 돌영감, 수문장, 장군석, 동자석, 망주석, 옹중석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그중에서도 우석목, 무성목, 벅수머리, 완옹중 석상에서 유래했다 해서 옹중석(翁仲石)이라는 이름이 많이 통용되었다. 북촌 돌하르방공원에서 만난 김남흥 돌하르방 장인(1967년생)은 먼저 인문학적 소양 얘기부터 꺼내 들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가 15년 전 돌하르방에 인생을 걸면서 처음 매달린 일이 돌하르방에 관한 인문학적 탐구였다. 돌하르방이 어떤 연유로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유래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71년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돌하르방은 1754년(영조 30년)에 제작되었다고 추측된
제주는 자타가 인정하는 완벽한 석다도(石多島)다. 사방이 온통 돌 천지인 ‘돌의 나라’다. 화산섬 제주는 돌 문화가 섬 문화의 핵심이다. 지천에 널린 제주 돌은 예전부터 제주 사람들의 의식주 전반에 독특한 생활 문화를 만들어냈다. 제주 사람들은 돌에서 왔다가 돌로 돌아간다. 돌 구들장 위에서 태어나 산 담에 둘러싸인 묘에 묻혔다. 소금 생산도 갯벌이 아닌 돌바닥 위 돌 염전에서 이루어졌다. 옛 제주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다 ‘돌챙이(석수장이)’ 기질을 타고났다. 제주도는 신생대 제3기 말에서 신생대 제4기에 걸친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섬이다. 신생대 제3기 말 용암이 바다에서 분출되기 시작해 제4기 동안 화산활동이 계속됐다. 모두 79회 이상에 달하는 용암 분출이 관찰됐다.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제주는 '돌 박물관'이다. 섬은 산과 들은 물론 바다까지도 온통 돌밭이다. 1601년 안무어사로 제주에 파견된 김상헌이 쓴 『남사록』(1601년) 풍물 편에는 '제주 땅에는 바위와 돌이 많고 흙이 덮인 것이 몇 치에 불과하다. 흙의 성질은 부박(浮薄)하고, 건조하며 밭을 개간하려면 반드시 소나 말을 달리게 해서 밟아줘야만 한다. 흙 속에 몇 치만 들어가도 모두 바위와 돌
본격적으로 제주도 유배 문화를 말하려면 추사 김정희를 빼놓을 수 없다. 추사 김정희에게 있어 유배 생활은 그동안의 학문을 정리하고 독서에 매진하여 새로운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문화 엘리트로서 당대 지식인이었기에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스승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문적 기반이 약했던 제주도는 관료나 유배인을 통하지 않고는 유학을 접하기 어려웠다. 제주 유학자에게 유배인들은 학문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기회였다. 추사 김정희는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 그의 학문과 문화를 불모지에 전수한 효과가 크다. 추사를 가리켜 ‘탐라의 문화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하는 이유이다. 예술가로서 추사는 제자가 3000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교육 활동에 왕성하였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이상적, 소치 허련 등이 있으며, 추사의 내종사촌 민규호는 추사에게 배우러 제주도에 두 번이나 왔다. 그뿐 아니라 제주 지역 제자들도 그로부터 유학을 배우기도 했다. 추사는 유배 시절 대정향교에서 박혜백을 비롯한 제자를 길렀다. 박혜백은 추사가 아낀 인물이다. 그는 추사 인보(도장)을 망라한 『완당인보(阮堂印譜)』를 완성했다. 『완당인보』는 추사와 완당 등 약
제주에서도 유배 문화를 지역문화 콘텐츠화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광해를 콘텐츠로 한 영화, 오페라, 연극, 유배길, 테마 상품, 각종 체험 프로그램 등이 많다. 광해의 흔적을 쫓아 광해 유배길, 유배 생활 중 광해가 즐겼다고 알려진 육고기와 잡채, 김치 등 광해의 밥상, 제주에서 입었던 옷 등 광해군 테마 상품, 임금님께 올리는 작은 상 한상차림 ‘광해 소반’, 나들이 음식‘광해 행반’, 광해군의 시를 담은 유리 문진 등 광해 기념품 등. 제주 유배 문화 콘텐츠의 꽃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제주 여인 홍윤애와 유배인 조정철의 목숨을 건 사랑 이야기다. 최장기 유배인 조정철은 제주와 인연이 깊다. 그의 할아버지 조정빈이 1723년 정의현에 유배되었고, 1731년에는 작은할아버지 조관빈이 대정현에 유배되었었다. 그의 아버지는 1754년 탕평책을 거론하다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조정철 자신도 27년 유배 생활 대부분을 제주에서 보냈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아내가 자결하는 절망적 상황을 맞이한 조정철은 20살 홍윤애(洪允愛)를 만나게 된다. 육지에서 지원해 줄 가족이 없던 조정철의 처지가 궁지에 몰렸다는 걸 알게 된 홍윤애는 용기를 내어 의탁지(地) 김윤재의 아낙을
현대 도시인의 필수 버킷리스트인 ‘한달살이’ 메카 제주는 조선 시대 유배의 섬이었다. 유배(流配)는 죄인을 귀양 보내던 형벌이다. 유배인을 귀양 보낼 때는 죄가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원근(遠近)의 등급이 있었다. 등급에 따라 2000리, 2500리, 3000리 밖으로 적소(謫所)를 정했다. 따라서 제주는 서울에서 3000리, 바다 한가운데 섬이라 가장 중죄인들이 유배를 오는 곳이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200여 명 가까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들 중에는 임금 자리에서 축출된 광해군을 비롯해 역모 사건에 휘말린 왕족부터 송시열, 김정희, 박영효, 김윤식 같은 정계 및 사림의 거목들과 제주 여인과의 러브스토리로 유명한 조정철까지 다양하다. 이 중 일부는 후손을 남겨 제주 입도 조(祖)가 되기도 했다. 제주 여인과 가정을 이뤄 자손을 낳거나, 유배를 올 때 가족들이 같이 와서 정착한 경우다. 폭군이면서 개혁가, 개혁가이면서 폭군, 이처럼 양극단의 역사적 평가를 받는 광해군은 500년 동안 제주에 유배를 온 유배인 중 유일한 임금이다. 광해는 폐위된 후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병자호란 발발 다음 해인 1637년 제주로 유배를 왔다. 폐위된 임금 광해군은 도착
1985년 이후 제주지역에서 바나나가 시설재배로 생산되었다. 그러나 1990년도 이후 바나나 수입 자유화가 되면서 일시에 바나나 생산은 어렵게 되었다. 바나나 대체작물로 감귤을 시설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고유의 과수시설 재배가 이루어졌다. 하우스 감귤은 시설(비닐하우스)에서 난방으로 온도를 조절해 재배한 감귤이다. 노지 감귤보다 당도가 높고 산도가 낮으며 속껍질이 부드럽고 과즙이 많아 식미감이 좋다. 2000년대 이후 제주에는 온주 감귤과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 황금향, 청견 등 다양한 감귤을 재배하고 있다. 품종별로 수확하는 시기와 맛있는 시기가 다르다. 만감류의 선두주자는 단연 한라봉이다. 청견과 폰칸을 교배해 육성한 품종으로, 제주에서는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재배되었다. 2000년대 초 제주에서 본격 재배된 천혜향은 청견·앙콜에 마코트라는 품종을 교배해 육성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제주에서 재배한 레드향은 서지향과 한라봉을 교배해 육성한 품종이다. 레드향은 당도가 높고 과육이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껍질을 벗기기도 쉽다. 황금향은 남향과 천초, 청견은 궁천 조생과 크로비타 오렌지를 교배한 만감 품종이다. 청견은 과실 표면이 일반 감귤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