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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바벨 (6)

리차드와 그의 아내 수잔은 관광버스를 타고 무료하게 모로코 사막지대를 달리던 중 느닷없는 총격을 당한다. 수잔이 사경을 헤매지만 병원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다. 어쩔 수 없이 급한 대로 마침 가까운 곳에 있는 관광가이드의 동네로 버스를 몰아간다.

 

 

피투성이가 된 아내를 안고 병원 응급실로 달리는 남편 리차드는 황당하다. 통역을 맡은 관광가이드가 있지만 아내를 부탁해야 할 마을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의사, 간호사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 통역을 통해서 주고받는 의사소통이란 장화 신고 가려운 발을 긁어대는 꼴이다. 리차드는 좌절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오로지 희망은 ‘영어가 통하는 병원’뿐이다.

 

그러나 사실 리차드를 미치고 환장하게 만드는 소통의 문제가 오직 ‘언어’의 문제만은 아니다. 관광가이드의 영어는 유창하고 마을 사람들과의 ‘언어적’ 소통은 가이드를 통해서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문화’의 소통은 절벽이다. 

 

마을의 의사라는 노파는 서구영화에서 ‘마귀할멈’의 형상을 닮은 주술사에 가깝다. 그 ‘마귀할멈’이 총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아내를 치료하겠다고 하니 환장할 일이다. 불결하기 짝이 없는 할멈과 방구석 꼴을 보면 멀쩡한 사람도 죽어나갈 것 같다. 서구인들과 모로코 시골사람들이 생각하는 ‘청결의 문화’는 관념부터 다르다.

 

리차드 부부가 관계가 모로코 여행을 떠나야 했을 만큼 소원해진 것도 분명 ‘언어의 문제’는 아니었다. 부부가 모두 유창한 영어를 말하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의 ‘문화’가 다르다. 아이를 잃었을 때의 슬픔의 표현방식도 다르고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 ‘다름’이 서로를 지치게 한다.

 

리차드 부부의 아이들을 돌보는 아멜리아는 멕시코에서 아들의 결혼식을 보고 미국으로 돌아오려 한다. 국경에서 입국검사를 받는 아멜리아나 운전대를 잡은 그녀의 조카 산티아고의 영어는 미국 경찰과의 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미국 국경 경찰은 산티아고의 얼굴에 마치 안과의사처럼 플래시를 비춘다. 무례하기 짝이 없다.

 

 

미국 경찰은 평상시에는 무척 예의 바르지만 일단 의심 가는 자들에게는 무척이나 무례하고 거칠어진다. 멕시코와는 문화가 다르다. 젊은 혈기 충만한 산티아고는 빈정 상하고 슬슬 열 받기 시작한다. 결국 못 견디고 거칠게 액셀을 밟아 국경을 돌파하는 사고를 치고 만다.

 

일본에 사는 농아 여고생 린코는 ‘농아의 언어’가 통하는 농아 친구들과 여느 여고생들처럼 농담도 하고 깔깔거리고 지낸다. 당연히 ‘비농아’들과의 소통을 어려워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린코에게 있어서도 소통의 문제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만은 아니다. 비록 듣고 말하지는 못해도 기본적인 소통은 ‘필담筆談’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소통의 절벽은 결국 ‘농아의 문화’와 ‘비농아의 문화’ 차이에서 발생한다. 서로 마음을 표현하는 소통의 방식이 다르다. 린코는 공원에서 만난 한 남학생에게 호감을 느낀다. 남학생이 린코가 농아라는 것을 알고 질겁을 해서 뒷걸음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린코가 자신에게 표현하는 호감의 ‘표현방식’에 당황한다.

 

하늘까지 닿은 탑을 쌓아 감히 신의 위치에까지 오르려 한 인간들에게 신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만들어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다. 그리하여 다시는 서로 합심하지 못하게 했다(이하 바벨의 저주). 그러나 신의 응징과 달리 인간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것은 어쩌면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는 아닌 듯하다. 말보다는 서로의 문화를 다르게 만들어버린 것 같다. 

 

 

아무리 ‘언어’가 통해도 ‘문화’가 통하지 않는다. 서로의 ‘언어’는 열심히 공부하면 어느 정도 알 수도 있고, 요즘 같으면 ‘구글 번역기’ 돌리면 아쉬운 대로 소통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의 차이는 언어처럼 공부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남녀가 서로 ‘남성학’과 ‘여성학’ 강좌를 듣는다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한국 사람들이 정말 기독교문화로 이뤄진 서양을 이해하고, 이슬람문화를 이루는 무슬림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문화’는 단순히 언어의 산물이 아니라 기억의 산물이다. 우리 모두 각자의 마음속·머릿속에 담긴 ‘기억’들이 다르다. 문화의 다양성과 문화 간의 소통에 점점 어려움을 느끼게 되면서 ‘문화적 유창성(cultural fluency)’에 대한 필요와 요구가 점점 강해진다. 영어나 중국어에 유창한 사람들은 더러 있지만 영어권 문화와 소위 ‘중화문화’에 유창한 사람은 참으로 찾기 어렵다.

 

혹시 미국과 중국의 ‘문화적 유창성’이 완벽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고 미국인이거나 중국인일지도 모르겠다. 구글번역기가 완성돼도 바벨의 저주는 풀지 못할 듯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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