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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늑대와 춤을 (5)

영화의 배경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수우족의 근거지였던 지금의 사우스 다코타주와 미네소타주 어디쯤이 되는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862년 미국을 남북전쟁의 한가운데라고 기억하겠지만, 여기엔 다른 역사도 숨어 있다.

 

 

1862년. 미국 역사를 조금 아는 이들은 대번에 ‘남북전쟁’을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1862년은 미국 선조들이 신대륙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300년 가까이 계속된 인디언 전쟁(1622~1890년) 기간이기도 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수우족 대학살 연도도 1862년이다. 1860년대 미국은 대륙의 원주인을 완전히 축출하고 남북의 분열도 극복함으로써 세계 최강의 기틀을 다진다.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은 아마도 ‘미국 인디언=야만’이란 고정관념을 따르지 않은 거의 최초의 할리우드 영화일 듯하다. 던바 중위가 내부자가 돼서 관찰한 인디언의 삶의 방식은 야만적이 아니라 대단히 문화적이고 합리적이다. 오히려 그 자신이 몸담았던 백인들의 그것이 야만에 가깝다고 던바 중위는 느낀다.

 

영화는 수우족 인디언들이 1862년 미군의 대공세를 앞두고 마을을 버린 채 눈 덮인 산 속으로 이주하는 장면이 펼쳐지면서 막바지에 이르고, ‘그로부터 13년 후 인디언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는 던바 중위의 독백으로 끝난다. ‘문화적’인 인디언들을 ‘야만적’인 미국 군인들이 대학살하는 장면은 어디에도 없다. 영화만 보면 ‘평화적’이고 ‘문화적’인 인디언들이 스스로 알아서 땅을 내어주고 점점 사라져간 듯 그려진다. 2000만명 북미 인디언들을 도륙하고 땅을 빼앗았던 미국의 ‘야만’은 얼버무리고 은폐한다.

 

위대한 미국은 비옥한 땅과 풍부한 금을 차지하기 위해 그 땅의 원주인인 인디언을 격리, 박해, 더 나아가 멸종하면서 건설됐다. 저항한 인디언은 총칼에 죽었고, 투항한 인디언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보호구역이라는 이름의 불모지에 백인들이 조악하게 지어준 벽돌집에서 굶주려 죽었다.

 

 

인디언과의 평화로운 공존은 애당초 백인들의 머릿속에는 없는 개념이었다. 인디언과 백인들은 애초에 공유 불가능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재화’로 여기는 자연을 ‘우리의 일부’ ‘소유할 수 없는 존재‘ ‘우리의 부모’라고 불렀다. 초원의 풀과 나무를 ‘대지의 머릿결’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은 또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누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이는 인디언의 토지를 매입하겠다면서 찾아온 미국 관리들에게 인디언 부족장이 건넨 대답으로 기록돼 있다. 가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인들은 ‘물과 공기, 대지는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는 인디언의 인식을 ‘미개’와 ‘야만’으로 규정했다.

 

백인들은 무기, 전염병, 속임수와 거짓, 여기에 가장 큰 무기인 ‘편견’을 퍼뜨려 그들을 정복했다. 인디언은 짐승과 다름없는 야만인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문명화’해야 하는 존재이며, ‘문명화’를 거부하면 어쩔 수 없이 제거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규정했다.

 

미국이 인디언에게 구사한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인디언들이 갖지 못한 신식무기가 아니라 어쩌면 인디언을 향한 편견의 확대재생산이었을지 모른다. 편견은 쉽게 ‘악마화’로 발전하곤 한다. ‘악마화’된 존재는 나치에게 유대인처럼 ‘소각(홀로코스트)’의 대상이 된다.

 

 

미국인 디 브라운(Dee Brown)이 기록한 인디언 수난사 「나의 심장을 운디드 니에 묻어다오(Bury My Heart at Wounded Knee)」는 인디언에 대한 편견과 궁극적인 ‘악마화’를 개탄한다. 

 

그중 인상적인 장면 하나. 인디언 궤멸작전을 지휘하던 셰리던(Philip Sheridan) 장군은 자신이 누구에게도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착한 인디언’이라고 주장하는 한 인디언에게 “내가 아는 착한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 뿐(The only good Indian is a dead Indian)”이라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명(名) 막말’을 날린다. 편견의 절정이다.

 

우리나라 선거캠프들이 대변인으로 탐낼 만한 인물이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당시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인디언을 향해 셰리던 장군이 내려준 이 명쾌한 ‘정의’는 서부에서 인디언들을 ‘소각’하는 ‘서부개척 시대’ 내내 위력을 발휘한다. 아무도 인디언 사냥에 일말의 가책도 가질 필요가 없다. 셰리던 장군은 수백만 인디언들을 ‘착한 인디언’으로 만들어준다.

 

참으로 섬뜩한 건 1860년대 셰리던 장군의 끔찍한 혐오와 악마화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무차별적으로 패러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착한 일본인은 죽은 일본인밖에 없다’ ‘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밖에 없다’는 인종적 혐오에서부터 이념과 종교, 지역 차별, 성性, 세대 차별에까지 동원된다. 우리들 중 히틀러와 셰리던 장군에게 자신있게 돌을 들어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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