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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바벨 (7)

영화 ‘바벨’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크고 작은 ‘불통’에 답답해하거나 분노하거나 좌절하고 극단으로 치닫기도 한다. 바벨탑을 쌓아 올리다 제대로 신에게 응징당한 모습들이다. 이럴 때 불통을 해소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상책(上策)인지도 모르겠다. 중간에 있는 사람이 불통의 늪을 더 깊게 만들 수도 있어서다.

 

 

샌디에이고에 사는 리차드와 수잔 부부는 서로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고 서운함만 쌓인다. 산티아고가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는 길목에서 맞닥뜨린 미국 경찰은 ‘원칙’과 ‘매뉴얼’대로 움직인다.[※참고: 산티아고는 리차드 부부의 가사도우미 아멜리아의 조카다.] 하지만 경찰은 원칙과 매뉴얼대로 움직일 뿐 산티아고의 사정에 귀 기울여 줄 생각이 없다. 

 

영화 속 등장인물의 답답한 모습들을 보다 보면, 문득 사이먼과 가펑클의 명곡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 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떠들기만 할 뿐, 자기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냥 흘려들을 뿐,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노래를 만들지만 사람들이 불러주지는 않는다(People talking without speaking. People hearing without listening. People writing songs that voices never share).” 

 

지독하고 절망적인 소통 단절의 시대다.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모든 말과 글은 서로에게 소음일 뿐이다. 소음만 가득 찬 세상이다. 리차드 부부에게 서로 어렵게 꺼낸 말들도 상대의 귓속으로만 들어갈 뿐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공유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소음이다. 산티아고가 경찰에게 열심히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지만 그의 말은 들어줄 마음이 없는 경찰에게는 소음일 뿐이다.

 

서로의 말과 마음이 통하지 못하는 등장인물들의 소통의 부재와 단절을 보노라면 그들 사이에 제3자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중간에서 그들이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헤아리고 해석해서 전달해 줄 수 있는 제3자 말이다. 

 

바벨탑의 재앙 이후 말과 글, 문화가 나뉜 이래 인류에게는 ‘통역’과 ‘번역’이 필요불가결한 요소가 됐나 보다. 우리는 오늘도 외국어 공부에 열을 올리지만, 이방인의 말은 여전히 들리지도 않고 입에 붙지도 않는다. 이런 문제는 고대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미 그리스 신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헤르메스(Hermes)’는 변방의 경계지역에 거처하면서 말과 글이 통하지 않는 세계를 오가면서 서로의 뜻을 전달하고 풀어줬다고 한다. 헤르메스(Hermes)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돌무더기를 뜻하는 Herma라고 한다. 그리스 지방은 경계에 돌무더기를 쌓아 표시했다고 한다. 최근 떠오르는 사회과학 분야인 ‘해석학(Hermeneutics)’ 역시 헤르메스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통역의 신’ 헤르메스의 형상은 흥미롭다. 헤르메스 신의 모자와 신발에는 날개가 달려있다. 경계 지역에 살면서 양쪽 세계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닌다. 또한 헤르메스가 쥐고 다니는 지팡이에는 두마리의 뱀이 한데 얽혀 화합하고 있다. 헤르메스는 뱀의 혀처럼 간교한 말재주로 서로 다른 세계들을 화합하도록 한다. 화합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뱀처럼 간교한 혀놀림을 동원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헤르메스는 속임수에도 능하다. 어찌 보면 우리네 전통의 ‘매파(媒婆:혼인을 중매하는 노파)’와 닮았다. 서로 모르고 이질적인 양가를 오가며 혼인을 성사시킬 수만 있다면 현란한 혀놀림으로 거짓말도 불사한다.

 

매파의 입을 건너면 곰보도 보조개가 귀여운 처자로 둔갑한다. 이쯤 되면 거의 사기에 가깝다. 이렇다 보니 통역의 신 헤르메스는 종종 ‘장사의 신’ 혹은 ‘상업의 신’으로 모셔지기도 하지만 사기꾼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장사와 사기의 경계는 실로 아슬아슬하다.

 

대선을 앞두고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후보가 저마다 캠프를 차리고 있다. 그런 캠프마다 몇명의 대변인이 후보들의 ‘입’이 돼 현란한 말솜씨를 자랑한다. 듣도 보도 못한 ‘전언(傳言) 정치’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다. 그런 대변인들은 유권자가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한 인물의 됨됨이와 생각까지 ‘헤르메스’처럼 전한다.

 

 

어디 대변인들뿐인가. 무수한 유튜버와 언론들도 특정한 후보의 생각과 됨됨이를 헤르메스처럼 혹은 매파처럼 전하기 바쁘다. 가히 헤르메스 전성시대다. 이 수많은 헤르메스가 전하는 말을 들어보면 세상 어디에도 이들처럼 완벽하고 훌륭한 인물이 없고, 또한 이들만큼 사악한 인간도 따로 없다. 어지럽다.

 

혹시나 이들의 통역과 번역이 헤르메스 신의 지팡이에 그려진 뱀의 혀처럼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간교한 유혹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브가 그랬던 것처럼 유권자들이 뱀의 간교한 유혹에 넘어가는 건 아닐까 개운치 못하다.

 

지금도 어느 후보의 곰보 자국이 매력포인트 보조개쯤으로 보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통의 부재와 단절의 시대에 헤르메스 신은 참으로 필요하지만 그는 위험천만하기도 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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