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력이 출중하다고 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은 작은 것을 관찰하는 데에 능하여 치밀한 것에는 깊은 경지에 이르지만 어떤 때에는 큰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리지차(毫釐之差)를 아주 분명하게 잴 수 있는 사람은 천하 형세를 이해하는 데에 소홀할 수 있다. 작은 일 한 가지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은 큰일에는 늘 혼란스러워 한다.
항우(項羽)가 젊었을 때, 글공부도 중도에 그만두고 검술 배우는 것도 중간에서 흐지부지 그만두었다. 그러자 숙부 항량(項梁)이 화를 내자 항우가 말했다. “글공부는 자기 이름을 쓸 정도면 되는 것입니다. 검을 배우는 것도 한 사람과 우열을 가리는 데에 필요한 것일 뿐으로 검을 배우는 것보다 만인과 겨룰 수 있는 무술을 배워야합니다.” 항량이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여러 가지 면을 전체적으로 관리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전체적인 것을 알고 대세를 읽어야한다. 자질구레한 사소한 일을 버릴 줄 알아야한다. 이 법칙은 대단히 중요하다. 동한(東漢) 명신 진번(陳蕃)이 말했다. “대장부는 마땅히 천하를 일소해야지, 어찌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을 치우는 데에 마음을 쓰겠는가?”
예전에 어떤 사람이 신문방송에 1주 동안 신문방송을 보지 말자는 운동을 제창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는 1995년부터 ‘TV 안보는 주간 운동’을 펼쳐 현재까지 여러 학교가 동참하고 있다. 동참했던 사람들은 창조력과 상상력이 더 생겼다고 느꼈다.
방송을 보지 않거나 신문을 읽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매일매일 ‘뉴스’ 속에 파묻히면 오히려 진정으로 주의해야할 것에는 소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우 세밀하고 두루 미치는” 그런 자질구레한 소식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시간을 남겨둬 사색하고 세상이 어떻게 발전해 나가고 있는지 발전하는 데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찰한다면? 좋은 점이 많고도 많을 것이다.
여단(呂端), 자는 이직(易直), 하북 사람이다. 후진(後晉, 936~947) 때 병부시랑을 지낸 여기(呂琦)의 아들이다. 후주(後周, 951~960) 때 일찍이 저작좌랑(著作佐郞)을 지냈고 송(宋, 960~1279) 왕조가 들어서자 성도부(成都府), 채주(蔡州, 현 하남성 여남汝南현)주관을 지냈다. 995년에 여몽(呂蒙)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송 태종이 여단을 재상 자리에 앉히려 할 때 어떤 사람이 태종에게 말했다. “여단은 사람됨이 어리석습니다.” 그러자 태종이 말했다. “여단은 작은 일에는 어리석지만 큰일에는 어리석지 않다네.”
『송사·여단전』기록을 보면 997년에 송 태종의 병이 위급하자 여단은 매일 황태자(송 진종)를 수행해 증세를 살피고 안부를 물었다. 내시 왕계은(王繼恩)이 뛰어난 자질을 갖춘 황태자가 싫어 사사로이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창령(李昌齡), 전전도지휘사(殿前都指揮使) 이계훈(李繼勛), 지제고(知制誥) 호단(胡旦)과 결탁해 방화로 궁을 불태워 폐위된 태종의 장자 초왕(楚王) 조원좌(趙元佐)를 태자 자리에 앉히려하였다.
어느 날, 여단이 전례에 따라 궁에 들어가 황제의 병세를 살필 때 태자가 황제 곁에 없는 것을 발견하고 어떤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곧바로 홀(笏) 위에 “병이 위급함”이라는 글자를 써서는 믿을 수 있는 관원에게 주고는 태자에게 빨리 입궁해 시중들도록 전하라고 보냈다.
태종이 죽자 이(李) 황후는 왕계은에게 여단을 궁에 들도록 전하라하였다. 여단은 상황이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각에 있는 일찍이 태종이 남긴 태자를 옹립한다는 친필 조서를 확인하여야 한다면서 왕계은을 데리고 서각으로 갔다. 먼저 서각으로 들여보낸 후 문을 잠가 왕계은을 남겨두고 입궁하였다.
황후가 말했다. “폐하께서 이미 붕어하셨소. 장자(조원좌)를 세우는 것이 전통에 맞는다고 보오. 그대는 어떻게 하여야한다고 보시오?”
여단이 답했다. “선제께서 태자를 세우신 것이 바로 작년 오늘이었습니다. 천자께서 방금 붕어하셨습니다. 천자께서 세상을 뜨시자마자 어찌 천자의 명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설마 왕위 계승 문제에 다른 의견을 제시하시겠다는 말씀은 아니시지요?” 말을 마치자마자 태자를 옹립해 복녕궁(福寧宮)으로 데리고 간 후 병사를 파견해 엄중히 보호하라고 명했다.
송 진종(眞宗)이 왕위를 계승해 등극 의식을 거행할 때 천자 좌위 앞에 휘장을 치고서 여러 신하들을 맞았다. 여단이 조용하게 어전 아래에 서서 먼저 천자에게 예를 올리지 않고 천자에게 휘장을 걷어주시라 청한 후 어전 위에 올라 자세하게 살펴 확실히 원래의 태자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어전에서 내려와 여러 신하에게 천자에게 예를 올리라고 말했다. 여러 신하는 그제야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곧이어 여단은 큰칼과 도끼를 휘두르듯이 과감하게 반대파를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시켰다. 이계훈을 진주(陳州)로 보내버렸고 이창령을 충무군사마로 강등했으며 왕계은을 우감문위장군으로 삼아 균주(均州)에 안치하고 호단을 심주(潯州)로 유배시킨 후 가산을 몰수해 국유화하였다.
여단은 넓게 생각하였고 태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노련하고 용의주도하였다. 왕계은 등의 책략을 미리 알아차리고 신중하게 방비하였다. 먼저 과감하게 왕계은을 서각에 몰아넣고 문을 잠가 이외의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그런 후 선제의 유명과 대국적인 견지라는 이유로 이 황후를 설득하였다. 진종이 즉위할 때 휘장을 쳐서 정확한 신분을 확인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었다.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행위이기는 하지만 비상시국에 소홀히 할 수 없는 순서였다. 자신도 모르게 뒤바뀌었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진종을 위하여 반대파를 제거해 황위를 안정시켰다.
여단이 실행한 절차를 볼 때 여단은 분명 “큰일에는 어리석지 않다”는 명예를 주어도 부끄럽지 않다. 작은 일을 어리석지 않게 처리하는 것은 식견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큰일을 어리석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지혜다. 게다가 결단력까지 있었으니.
전국시대에 공자의 학생 복불제(宓不齊)가 단보의 현장을 지냈다. 제(齊)나라가 노(魯)나라를 치려면 반드시 단보를 거쳐야했다. 제나라가 군대를 일으키자 복불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대비하였다.
그때 단보의 백성들이 복불제에게 요청하였다. “밭의 보리가 이미 다 익었습니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 수확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누가 심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보의 백성이 먹을 양식을 더 마련할 수 있습니다. 밭에 남겨두면 적들이 수확해 가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빨리 수확하게 해주십시오.” 백성들이 여러 번 요청했으나 복불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제나라 병사들이 들어와 밭에 익은 보리를 모두 수확해 가버렸다. 계손씨(季孫氏)가 그 소식을 듣고는 너무나 애석한 마음이 들어 복불제에게 사람을 보내 에둘러 욕을 하였다. 복불제는 화가 나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올해 보리를 수확하지 못하면 내년에 다시 씨를 뿌리면 되오. 만약 씨를 뿌리지도 않은 사람이 기회를 틈타 남이 뿌린 보리를 수확해 양식으로 삼으면 그들에게 매해에 제때에 적들이 쳐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오. 단보에서 1년의 보리를 수확하지 않는다하여도 노나라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소. 그런데 만약 백성들이 요행으로 타인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다는 심리가 생기면 세상 풍속이 나빠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노나라에 끼치는 손해는 몇 대를 지나도 회복하기가 어렵게 되오.”
계손씨는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졌다. “내가 복불제를 볼 낯이 없구나.” 복불제의 행동은 위난을 벗어나는 데에는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를 유지하고 오랫동안 평안을 유지하는 데에는 실로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복불제처럼 그렇게 원대한 안목을 가지고 총체적으로 파악한다면 눈이 하나 더 달려있는 것과 같다. 그 눈은 몸을 뛰어넘어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다. 문제에 당면할 때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상대방도 살펴볼 수 있다. 사건의 내면을 알 수 있고 사건의 전개 방향도 살필 수 있다. 현재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뛰어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인물]
○ 항우(項羽, BC232~BC202), 본명 항적(項籍), 자는 우(羽), 사수(泗水) 하상(下相, 현 강소성 숙천宿遷시 지역) 사람이다. 진(秦)나라 말기 농민봉기의 영수요 걸출한 군사전문가이다. 초(楚)나라 명장 항연(項燕)의 후손이다. 스스로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고 불렀다.
○ 진번(陳蕃, ?~168), 자는 중거(仲擧), 여남(汝南) 평여(平輿, 현 하남성 평여 북쪽) 사람이다. 동한시기 명신으로 두무(竇武), 유숙(劉淑)과 더불어 ‘삼군(三君)’이라 불렸다.
○ 여단(吕端, 935~1000), 자는 이직(易直), 유주(幽州) 안차(安次, 현 낭방廊坊 안차安次 지역) 사람이다. 북송 초기의 재상, 시인이다. 후진(後晋) 때 병부시랑 여기(吕琦)의 아들이요 상서좌증 여여경(呂餘慶)의 동생이다. 송(宋)나라 태종(太宗, 976~997 재위)과 진종(眞宗, 997~1022 재위) 때 재상을 지냈다.
○ 복불제(宓不齊, BC522 혹 502~BC445)는 복자천(宓子賤)으로 더 알려진 공자 제자다. 자는 자천(子賤), 노(魯)나라 사람이다. 일설에는 송(宋)나라 출신이라고도 한다. 단보(單父, 현 산동성 단單현)의 재(宰) 벼슬을 지냈는데 백성이 무척 존경했다고 전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