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어떤 목표를 추구하면서 일을 성사시키는 데에 자기 실력이 모자랄 때 외부의 힘을 빌리거나 외력을 끌어들이면 승리를 거두는 지름길을 찾는 방법이 된다. 자기 힘이 부족함을 메꿀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 장점을 강화시켜 적은 힘으로 큰 것을 이룰 수 있고 약함으로 강함을 이길 수 있다. 목표를 향하여 가는 교량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475~BC221) 때, 중산국(中山國, BC414~BC296)의 왕에게 두 명의 비(妃)가 왕후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 한 명은 음희(陰姬)요, 다른 한 명은 강희(江姬)였다.
내시 사마희(司馬喜)가 양쪽 가운데에서 발붙일 틈이 있음을 보고 주동적으로 음희의 아버지를 찾아가 말했다. “음희가 왕후가 되면 자연스레 첫째 부인이 돼 비할 수 없이 귀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왕후가 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도마 위 고기가 돼 자기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온 가족이 연루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음희가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어찌 나를 찾아오지 않소.”
그래서 음희의 아버지는 사마희를 찾아가 음희가 어떻게 하면 왕후가 되도록 도와 줄 수 있을 지를 물었다. 일이 성사되면 깊이 보답하겠다고도 말했다.
그러자 사마희는 진(晉)나라로 건너가 중산왕을 만났다. 자기에게 조(趙)나라를 약하게 만들고 중산국을 강대하게 만들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중산왕이 듣고는 대단히 기뻐하며 사마희에게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으나 그는 먼저 출국해 시찰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조나라에 가서 지리와 산천, 백성의 생활과 군신의 어짊과 어질지 않음을 시찰하여야 조나라를 약하게 하고 중산국을 강대하게 만드는 책략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중산왕은 사마희를 조나라에 파견하였다.
사마희는 조나라에 이르러 조왕을 만나자마자 말했다. “신은 조나라가 음악의 나라라고 들었습니다. 미인을 배출한 지역이라고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신이 조나라에 와서 적지 않은 대소 도시를 돌아다녔고 각양각색의 사람을 만났습니다만 미인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우리 중산국의 음희처럼 그렇게 예쁜 미인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조왕이 듣고는 기쁜 마음에 사마희에게 물었다. “그대가 얘기한 그 음희는 얼마나 예쁜가?”
사마희가 답했다. “그 음희의 자색은 경국지색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심지어 보기 드물게도 그 용모는 제후의 상을 지녔습니다. 일반 제후의 비는 비견하지 못합니다.”
조왕은 그때부터 마음이 산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속으로 음희를 취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절세미인을 얻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녀의 복된 용모를 이용해 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곧바로 사마희에게 물었다. “내가 중산왕에게 음희를 비로 보내라고 청하고 싶은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오?”
사마희는 황망하게 대답하였다. “신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신이 미인을 말하면서 음희의 아름다움까지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왔을 뿐입니다. 대왕께서 그녀를 비로 맞을지 말지는 신이 감히 참견할 일이 아닙니다. 대왕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신은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발 중산왕에게 제가 얘기했다는 말을 하지 말아주십시오.”
사마희가 중산국으로 돌아간 후 중산왕에게 말했다.
“조나라 왕은 그리 좋은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호색한에다가 도의도 모르고 힘쓰기만을 좋아하였지 인의라는 것을 모르는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대왕에게 음희를 달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기까지 했습니다.”
중산왕은 듣고는 대노하였다. 사마희는 또 말했다. “지금 조나라는 우리 중산국보다 강대합니다. 조왕이 음희를 달라했는데 대왕께서 만약 거절하시면 국가는 위기에 빠기게 됩니다. 반대로 대왕께서 동의하신다면 제후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입니다.”
중산왕이 말했다. “그렇게 되지!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풀지?”
사마희가 말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대왕께서 급히 음희를 왕후로 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조왕의 마음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세상에 타인의 왕후에게 구혼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조왕이 제멋대로 그런 황당한 일을 벌인다며 다른 나라도 그를 용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중산왕은 곧바로 음희를 왕후에 앉혔다. 그러자 조왕은 구혼하지 않았다.
음희는 처음에는 사마희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가 도와줘 왕후가 된 이후에는 태도가 백팔십도 바뀌었다. 그녀의 베갯머리송사로 사마희는 오래지 않아 상국의 자리에 앉았다.
사마희는 중국 전국시대의 뛰어난 관계마케팅의 고수라 할만하다. 먼저 조나라의 강대한 힘을 빌려 음희를 왕후에 앉혔고 나중에는 왕후의 힘을 빌려 상국의 자리에 앉았으니, 결국 자기가 원하는 바를 성취했다고 할 것이다.
송(宋, 960~1279)나라 초기에 대장 조한(曹翰, 924~992)은 여주(汝州)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궁에서 파견된 사자가 여주로 오자 조한은 그의 면전에서 눈물 흘리며 말했다. “집에 식구가 너무 많은 반면에 먹을 것이 적어 살아갈 수 없소이다. 내가 보따리에 옛 옷들을 싸서 줄 테니 저를 대신해 도성에서 돈으로 좀 바꾸어 주시구려.”
사자가 도성으로 돌아간 후 감히 숨길 수 없어 송 태종에게 그 일을 보고하였다.
송 태종이 보따리를 풀어보니 『하강남도(下江南圖)』라는 화제의 그림 병풍이 들어있었다. 조한이 도지휘사가 되어 선봉에 서서 송 태조의 의도에 따라 송나라가 남당(南唐)의 강남국을 멸하는 그림이었다.
태종은 그림 병풍을 보고 조한이 그해에 이룬 공훈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조한이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를 도성으로 불러들였다.
나중에 정위(丁謂, 966~1037)가 조한의 과거 일에 영감을 얻어 그와 같은 수단으로 황제에게 접근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계책을 꾸몄다.
당시 정위는 애주(涯州)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지만 그의 가족은 낙양(洛陽)에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그는 다시 중용을 받으려고 황제에게 자신의 충성하는 마음을 전달하려 하였지만 황제는 이미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그의 말주변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게다가 그를 대신해 황제에게 사면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는 사람도 없었다.
정위는 오랫동안 노심초사하다가 조한의 옛 이야기가 떠올랐다. 방법이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필치를 발휘해 가족에게 편지를 한 통 써서 사람을 시켜 태수 유엽(劉燁)에게 보내어 자기 가족에게 대신 전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편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에게 특별히 부탁하였다. “유엽이 부하 관리를 접견할 때 그에게 전달해주시게. 꼭 그때 전해야 하네.”
편지를 가지고 간 사람이 유엽의 아문에 도착하니 마침 유엽이 관청에서 공무를 논의하고 있었다. 유엽이 많은 사람이 주시하고 있을 때 정위의 편지를 받았으니 그 일을 감히 숨길 수 없었다. 곧바로 정위가 편지를 보낸 일을 황제에게 보고하고 편지를 궁으로 보냈다.
황제가 편지를 펼쳐 보니 편지 속에는 정위가 자신을 엄하게 책망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황제가 자신에게 얼마나 깊이 은혜를 베풀었는지도 쓰여 있었다. 가족에게 자신이 멀리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고 원망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내용도 있었다. 황제가 읽어보고는 더없는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정위를 조건이 비교적 좋은 뇌주(雷州)로 옮겨주었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이야기는 제삼자를 통하여, 자기 말이나 물건을 이용해 상대방을 감동시켜 일을 잘 되게 만든 사례다. 외부 힘이란 것은 그저 말을 전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래도 결과는 좋았으니.
[인물 소개]
○ 사마희(司馬喜) :
사마희(司馬憙)라고도 한다. 생졸년 미상, 전국시대 중산(中山)국 상국(승상)이다. 중산왕이 가장 총애하였던 대신이다.
○ 조한(曹翰)
924~992, 대명(大名, 현 하북성 대명 동쪽) 사람으로 북송(北宋) 초기의 명장이며 공신이다. 조한은 후주(後周) 세종의 휘하에 있다가 북송으로 전향해 이균(李筠)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공을 세웠다.
○ 정위(丁謂) :
966~1037, 자는 위지(謂之), 나중에 공언(公言)으로 바꿨다. 소주부(蘇州府) 장주(長洲)현(현 강소 소주) 사람으로 북송 때 재상이다. 간신으로 평가받는다. 왕흠약(王欽若) 등과 더불어 오귀(五鬼)라 불린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