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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47)

재능이 있으면서도 펼 기회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첫째,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까닭에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다. 둘째, 큰 뜻을 가지고 문도무략(文韜武略)¹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좋은 때를 타고 나지 못하는 경우다. 강태공(姜太公)과 같은 경우라 할 것이다.

 

강태공은 자신의 총명함과 가진 재능과 지혜를 포악한 군주 주왕(紂王)을 돕는 데에 쓰지 않고 끝끝내 자신을 알아줄 현명한 군주를 기다렸다. 새가 나무를 골라 앉는 것처럼 시기와 형세를 판단하고 옳은 주군을 택하여 섬겼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때의 빈궁과 고통을 감내하여야 했다. 자신이 뜻을 이루지 못한 울분을 참아내야 했다. 목전의 공명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큰 뜻을 품은 사람은 평생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더라도 청렴결백하고 자기 자신을 아껴야 한다. 강직하고 아첨하지 않아야 한다.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자에게 빌붙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간사한 자와는 한 패거리가 되어 나쁜 짓을 저지르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타인이 조롱할까 염려해서도 안 된다. 굳은 의지로 자신이 지닌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능히 모든 불공정한 대우를 참아내야 한다. 타인이 견뎌내지 못하는 고통과 육체적 창상을 감내하면서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시기가 옳지 않고 좋지 않을 때에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인내하여야 한다. 천천히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환경을 찾아야 한다. 결코 조급해서는 안 된다.

 

왕맹(王猛)²은 주군을 식별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 군주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다. 인내심을 가지고 분석해 자신에게 적합한 상사를 선택하였다. 재능이 있으면서도 펼 기회를 만나지 못하는 불우함을 감내한 결과다.

 

왕맹은 본래 한족 출신 지식인이었다. 청주(靑州) 북해군(北海郡) 극현(劇縣) 출신이다. 어릴 적에 잦은 전쟁으로 부모를 따라 위군(魏郡)으로 몸을 피했다. 부견(符堅)은 저족(氐族)으로 장안에 진(秦)을 건립한 후 군왕이 됐다. 당시 한족이 중심이 된 동진(東晉) 정권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는데도 왕맹은 어째서 저족인 부견의 수하로 들어갔을까?

 

그것은 맹가가 자기 갈 길에 대하여 숙고한 결과에 따른 선택이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능력 있고 지혜로운 상사를 만나지 못하면 재능을 발휘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사를 정확하게 선택하여야 개인의 재능과 지혜를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왕맹이 젊었을 때 후조(後趙)³의 도성 ― 업성(鄴城)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의 고관과 귀족 중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유일하게 서통(徐統)이 그를 보고는 무척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를 대단한 인물이라 여겨 공조(功曹)⁴에 모시고자 했으나 왕맹은 서통의 소집에 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서악 화산(華山)으로 도망쳐 은거하였다. 자기 재능이 공조 같은 일을 하는 데에 그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일국의 군왕이 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이 자기 재능에 합당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잠시 산중에 은거해 사회 풍운의 변화를 관찰하면서 기회를 기다렸다.

 

351년, 저족 부건(符健)이 장안에 전진(前秦) 왕조를 세운 후 힘이 나날이 강성해지기 시작하였다. 354년, 동진(東晉)의 대장군 환온(桓溫)이 군대를 인솔하고 북벌해 부건의 군대를 격파하고 부대를 파상(灞上)5에 주둔시켰다. 왕맹은 짧은 베옷을 입고 환온의 정청으로 가서 뵙기를 청했다. 환온은 그에게 당시 사회 형세에 대한 관점을 말해달라고 청했다. 황맹은 정청 안 무리 속에서 옷섶에 있는 이를 맨손으로 잡으면서 천하 대사를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청산유수였다.

 

환온이 그 상황은 보고는 기묘함에 감탄하였다. 왕맹에게 물었다.

 

“나는 황제의 명령을 받아 10만 정병을 이끌고, 정의에 근거해 만백성의 해악을 제거하고 역적을 토벌하러 왔소. 그런데 여기로 달려와 충성을 다하는 관중(關中) 호걸이 한 명도 없소. 어떻게 된 일이오?”

 

왕맹은 기탄없이 말했다.

 

“장군께서 천리를 멀다하지 않으시고 적들을 토벌하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장안성이 목전에 있는데도 곧바로 패수를 건너 입성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장군의 심사를 헤아릴 길이 없어 달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환온은 대답 없이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암암리에 왕맹의 말이 그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환온의 실제 생각은 이랬다 : 자신은 관중을 평정했다는 허명만 얻으면 된다. 근거지는 어차피 조정에 귀속될 게 아닌가. 힘을 소모해 남을 위하여 헛수고 하느니 군대를 거느리고 내 자신의 지위를 강화해서, 내가 장래에 조정 대권을 장악하기 위한 힘을 유지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환온의 생각은 그랬다.

 

환온은 왕맹의 말을 듣고는 눈앞에 있는 이 가난한 서생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랫동안 골몰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말했다.

 

“강동(江東)에는 당신과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이 없소이다.”

 

나중에 환온이 군사를 퇴각하면서 행군하기 전에 왕맹에게 화려한 수레와 뛰어난 말을 선물로 주는 한편 높은 관직인 ‘도호(都護)’를 수여하면서 함께 남하하자고 청했다. 왕맹이 화산에 가서 스승에게 의견을 물은 후 환온의 요청을 거절하고는 계속 화산에 은거하였다.

 

 

왕맹이 당시에 환온을 배알한 목적은 자신의 재능을 노출해 큰일을 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생각을 버렸다. 환온을 살피고 동진의 형세를 분석해보니, 환온은 조정에 불충을 넘어 정권을 탈취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기는 했지만, 성공하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런 환온에게 의탁한다면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기회를 얻기 힘들겠다고 판단하였다. 이것이 타인의 요청과 발탁을 거절한 두 번째 사건이다.

 

환온이 철군하고 이듬해에 전진의 부건이 죽었다. 왕위를 계승한 인물은 중국역사상 유명한 폭군 부생(符生)이었다. 우매하였고 잔악하였다. 사람을 삼대 베듯 수도 없이 죽였다. 부건의 조카 부견(符堅)은 폭군을 제거하려고 현량과 인재를 대대적으로 모집, 자신의 힘을 기르기 시작하였다. 부견은 왕맹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 상서 여파루(呂婆樓)를 보내어 왕맹에게 하산하기를 청했다.

 

부견과 왕맹은 만나자마자 마음을 아는 오랜 친구인양 천하대사를 서슴없이 논했다. 서로의 의견이 약속이나 한 듯 일치하였다. 부견은 삼국시대에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것처럼 자신은 왕맹을 만났다고 생각하였다. 왕맹은 눈앞의 부견이 자신이 평생토록 충성을 다할 대상이라 느꼈다. 그래서 흔쾌히 부견 곁에 남기로 결정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계책을 내보였다.

 

357년, 부견은 일거에 폭군 부생을 소멸시키고 스스로 전진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왕맹은 중서시랑이 되어 국가 기밀을 장악하고 조정 대사에 참여하였다. 왕맹이 36세 때에 재능이 특출할 뿐 아니라 영민하고 일솜씨가 뛰어나 1년 사이에 5급이나 진급하였다. 전진의 상서좌복사보국장군, 사예교위가 되어 부견이 천하를 통치하는 데에 계책을 제공하였다. 기세 높이 큰일을 하면서 고대 중국의 걸출할 정치가가 됐다.

 

375년, 왕맹은 병으로 죽는다. 51세였다. 부견은 그때 38세에 불과하였다. 부견은 유능한 조력자를 잃은 데에 가슴이 아팠다. 슬픔에 자주 눈물을 흘리다 반년도 되지 않아 반백이 됐다고 한다.

 

『삼국지』는 말한다.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 둥지를 틀고 현명한 신하는 주군을 가려 섬긴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주인을 잘못만나 천추의 한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던가. 왕맹은 제갈량처럼 요동치는 불안정한 시대에 자신이 갈 길을 정확히 선택했기에 자신의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빛나는 자기 일생을 보낼 수 있었다. 공명부귀를 급히 얻으려는 마음을 참고 진정한 인물을 확정해서야 관직에 들어섰다. 이것이 그가 성공을 거둔 중요한 경험이다.

 

왕맹은 우리에게 일상 업무 중 마땅히 힘써 자신에게 적합한 상사를 선택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순리대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해주는 인물이다.

 

“너는 재능이 있으면서도 펼 기회를 만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기회를 만나도 펼 재간이 없는 것이다.”

 

왜 이 말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일까?

 

◎ 저족(氐族) :

 

저족은 중국 역사상 주로 3~6세기 사이에 활약한 비교적 큰 고대 민족 중 하나다. 일찍이 오호십육국시기에 전진(前秦)과 후량(後凉) 등 독립 정권을 건립하였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구지국(仇池國)’, ‘무도국(武都國)’, ‘무흥국(武興國)’, ‘양평국(陽平國)’ 등의 반독립 정권을 건립하기도 했다.

 

저족은 일찍이 상주(商周)시기에 지금의 감숙(甘肅), 섬서(陝西), 사천(四川) 등 인접지대에 분포하고 있었다. 대부분 무도(武都, 지금의 감숙 성현成縣 서북)에 집중돼 있었다. 주로 정착생활하면서 농업에 종사하고 목축업과 수공업을 겸했다. 흙담으로 된 판자집에 살았으며 생활풍속은 한족과 비슷하였다.

 

한 무제 원정(元鼎) 6년(111) 저족 지역에 군현(郡縣)을 설치한 후부터 저인들은 직접 한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한말 건안(建安) 연간에 영양군(永陽郡) 원청수현(原淸水縣, 지금의 감숙성 청수淸水) 북쪽 저인들은 우두머리 양구(楊駒)의 통솔을 받으며 구지산(仇池山, 지금의 감숙성 서쪽과 서남쪽)으로 이주했다가 위진남북조 시기에 구지(仇池)를 중심으로 무도(武都)를 지역으로 삼아 ‘구지국(仇池國)’을 세웠다. 그 후에 양(楊) 씨는 무도(武都, 지금의 감숙성 무도 동쪽), 무흥(武興, 지금의 섬서성 약양略陽), 양평(陽平, 지금의 감숙성 문현文縣 동북) 등의 정권을 잇달아 세웠다가 서위 북주시기에 이르러 소멸되었다.

 

 

한말 건안 연간, 양구의 건국부터 양 씨의 여러 정권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는 약 400년에 이른다. 이 기간 동안 양 씨 정권은 때로는 북방과 남방의 속국이 되기도 했지만 줄곧 상대적인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통치 지역이 협소하고 위치가 편벽돼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십육국시기에 약양임위(略陽臨渭, 지금의 감숙성 천수天水 동쪽)의 저인 부견(苻堅)은 장안(長安)에서 진(秦)나라를 세웠다. 역사에서 전진(前秦)이라 칭한다. 전진은 명성이 대단해 중국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전진 정권은 부견이 통치한 28년 동안 국력이 가장 강성해 전연(前燕), 전량(前凉)과 대(代) 등의 정권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북방을 통일하였다.

 

부견은 재위 동안 어진 선비를 등용하고 관치를 정돈하였다.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유학을 제창하며 생산력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전진에는 안정과 번영 국면이 출현하게 됐다. 십육국시기 중 가장 살기 좋았던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견 말기 383년에 자신의 강성함을 과신해 동진을 공격했으나 결국 비수의 전투에서 참패하였다. 부견도 고장(姑藏, 지금의 감숙성 무위武威)에서 강인(羌人)에게 피살됨으로써 한때 강성했던 전진 정권도 와해되었다. 396년 저인 여광(呂光)이 고장에서 대양왕(大凉王)이라 칭하고 정권을 세웠다. 역사에서는 후량(後凉)이라 칭한다. 여광이 죽은 후 후량 정권은 혼란에 빠져 403년 후진에게 멸망하였다.

 

 

저인들은 관중(關中) 하서(河西) 지역에 정권을 세운 것 외에도 여러 차례 걸쳐 비교적 큰 규모로 이주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한말 건안 연간에 조조는 일차적으로 무도의 저인 5만여 명을 부풍(扶風) 천수계(天水界, 지금의 섬서와 감숙 경계의 천수天水 보계寶鷄 일대)로 이주시켰다. 부견 연간에 무도 일대의 저인 15만호를 관동의 여러 마을에 정착시켰다. 고향을 떠나온 저인들은 오랫동안 한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점점 한족화했다. 무도 일대에 남아있던 저인도 일부는 한족과의 빈번한 교류를 가지면서 융화되었다. 당대 초기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청장(靑藏)고원에 자리 잡고 있던 토번(吐蕃) 정권이 흥성해 한차례 무도 일대를 통치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아직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있던 저인은 대부분 오랫동안 토번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토번에 융화됐으며 마지막까지 융화되지 않은 나머지 저인은 중원의 한족에게 ‘번인(番人)’이라 불렸다. 수당 이후에 ‘저’라는 민족의 이름은 사서에서 사라졌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 문도무략(文韜武略) : ‘()’는 고대 병서 육도(六韜)로 내용은 문(), (), (), (), (), () 육도(六韬)로 나누었다 ; ‘()’은 고대 병서 삼략(三略)3권으로 용병의 모략을 논했다. ()은 천지만물의 정보에서 생겨난 현상(現像), 무늬, 궤적 등이요 ; ()는 가죽으로 만든 도, 검의 집, 즉 칼집이고 ; ()는 전쟁, 전투를 멈추는 것이요 ; ()은 핵심을 들어 그 정수를 이용해 힘을 덜 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문도무략이란 문무쌍전’, ‘문무겸비를 뜻한다.

 

2) 왕맹(王猛, 325~375), 16국 시대 전진(前秦) 북해극(北海劇) 사람으로 자는 경략(景略)이다. 어릴 때 빈천했지만 박학했고 병서를 좋아했다. 화산(華山)에 은거했는데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입관하자 갈옷을 입고 찾아가 이()를 잡으면서 당시 일을 논했는데 방약무인이었다. 나중에 부견(苻堅)이 왕위에 오르자 그 밑에서 관료가 됐다.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것같았다. 사도(司徒)와 녹상서사(錄尙書事)를 역임했다. 관리들을 잘 통솔하고 호강(豪强)을 통제하면서 중앙 집권과 농업 생산에 주력해 전진의 통치 기반을 다졌다. 건원(建元) 6(370) 전연(前燕)을 멸했고 업()에 머물면서 지켰다. 얼마 뒤 돌아와 승상(丞相)에 올랐다. 죽을 때 부견에게 진()나라를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며 선비(鮮卑)와 강()을 차츰 멸망시키라고 했지만 부견이 받아들이지 않아 비수(淝水)의 패전을 가져왔다.(중국역대인명사전)

 

3) 후조(後趙), 516(五胡十六國)의 하나(319351). ()라고도 한다. 흉노(匈奴)의 별종 갈() 출신인 석륵(石勒)은 전조(前趙) 유총(劉聰)의 부장으로 활약하다가 319년 전조에서 자립해 대선우 조왕(大單于 趙王 : 고조高祖·명제明帝)이 되어 양국(襄國 : 하북성河北省)을 근거지로 화북 일대를 지배하였다. 329년 전조를 멸하고 그 연고지를 합병하였다. 석륵이 죽은 뒤 334년 석호(石虎 : 태조太祖·무제武帝)가 유업을 이어서 업()으로 천도해 외정(外征)과 토목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349년 석호가 죽자 정변이 잇달아 일어나, 한인(漢人) 염민(冉閔)에게 제위를 빼앗겼다. 그 뒤 양국에서 즉위한 석지(石祗)도 피살돼 멸망하였다. 최대 판도는 장강 이북 대부분이고 서쪽은 감숙(甘肅) 동부에 이르렀다. 석륵, 석호 모두 불교를 독신하였다. 특히 승려 불도징(佛圖澄)이 정교(政敎) 양면에서 신임을 받았던 일은 유명하다.

 

4) 공조(功曹), ()나라 때 군리(郡吏)의 명칭이다. 군수(郡守)는 본적지 회피 제도에 따라 타군 출신자가 임용됐으나 공조(功曹) 등의 군리는 그 군내에서 임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공조는 군리의 임면(任免), 상벌을 관장하였다. 지방 세력가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히 그 권한이 강해져서 상급 관리로 승진하는 사례도 많았다. 육조(六朝)시대의 군수는 한나라의 공조보다도 권한이 적었다.

 

5) 파상(灞上), 즉 패상(霸上)이다. 현재 서안(西安)시 동쪽에 있다. 패수(霸水) 서쪽 고원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의 백록원(白鹿原)에 해당한다. 한고조 유방(劉邦, 당시에는 패공沛公)이 패상에 주둔해 항우(項羽)의 대군과 대치하면서 홍문연(鴻門宴)의 역사 전고를 만들어냈다. 한나라 문제(文帝) 때 흉노(匈奴)에 대적하려고 유예(劉禮)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패상(霸上)에 주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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