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때, 무칠은 걸식하며 돌아다니다 관도(館陶)현 설점(薛店)촌에 이르렀다. 장(張)씨 성을 가진 거인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연 6000문(文)을 받는 고용인이 됐다. 3년을 쉬지 않고 일하다가 예전에 자신을 길러준 백모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을 수령해 돌아가 효도하려 했다. 그런데 어찌 생각이나 했을까, 장 거인은 무칠이 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가짜 장부를 들이밀며 다그쳤다. “네 임금은 일찍이 모두 지급하였다. 이게 네 장부이지 않느냐?” 고의로 트집 잡고 있다고 모함하고 하인을 시켜 길거리로 끌고 가 온몸이 멍들도록 타작하도록 했다. 나중에 무칠은 또 수재의 집에서 고용인이 되었다. 어느 날, 그의 누나가 인편에 돈과 편지를 보내왔는데 때마침 무칠이 부재중이라 수재가 대신 받았다. 무칠이 돌아오자 수재가 대신 편지를 읽어주었다. 그가 글을 모른다는 것을 이용해 돈을 보낸다는 말은 빼버렸다. 다른 소식만 알려주고 돈을 몰래 삼켜버렸다. 나중에 누나가 다시 사람을 보내 돈을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에야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재를 찾아가 사실여부를 물으니 욕만 먹었다. 설날 때 수재가 춘련을 써서 무칠에게 붙이라고 하였다. 바람이 불어
장영덕(張永德), 낡은 옷을 입고 때 묻은 얼굴로 분장한 후 도적에게 구걸해 온가족이 소란을 피하다 거지를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며 코웃음 치는 사인도 있지만 긴급한 상황에서 거지 모양으로 분장하여 재앙을 피해간 사인도 있다. 『송사·장영덕전(張永德傳)』의 기록은 이렇다. 장영덕, 자는 포일(抱一), 병주(幷州) 양곡(陽曲) 사람으로 부친 장영(張穎)은 안주(安州) 방어사를 지냈다. 장영덕이 4세 때, 모친 마(馬) 씨가 이혼 당하자 조모가 부양하였다. 계모 유(劉) 씨는 효부로 유명하였다. 시위(侍衛) 관리를 시작한 주조(周祖)는 장영과 가까이 지내며 딸을 장영덕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장영덕이 모친과 함께 송주(宋州)로 처자를 맞이하러 갈 때에는 도적떼가 도처에서 출몰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장영덕은 낡은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흙을 발라서 더럽힌 후 골목길에 머물다가 도적이 나타나면 그들 앞에 나아가 구걸하였다. 상대방은 적선하지도 않고 “이곳은 거지들을 먹여 살리는 비전원(悲田院)이다.”라고 말하며, 소동도 일으키지 않고 떠나갔다. 그렇게 온가족이 재난을 면했다. 기지가 뛰어나다 할 밖에. 당시 상황은 ‘거지와 어울리면 조상의 명성을 더럽힌다’는 모욕에
속담에 한 사람이 높은 벼슬에 오르면 그 딸린 식구도 권세를 얻는다〔계견승천(鷄犬升天)〕라고 하였다. 외척으로 얻은 파벌관계, 종족 관념은 중국문화 전통 속에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고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그런데 신사들은 그 친척과 친우, 벗이 거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가문의 명예를 잃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데에는 방법이 없다. 소자첨〔蘇子瞻, 소식(蘇軾)〕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천하의 현사를 두루 아끼었다고 전한다. 스스로 “위로는 옥황상제를 곁에서 도울 수 있고 아래로는 비전원(悲田院)의 거지도 곁에서 도울 수 있다”라고 자부하였다. 벗이 거지라 할지라도 결국 벗은 벗이다. 상국(相國)의 증손자, 시를 지어 구걸하다 청나라 때에 상국 문공공(文恭公) 왕욱령(王頊齡)의 증손, 즉 왕유문(王幼文) 원외의 손자가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가 구걸할 때에는 연화락(蓮花落)1)을 부르지 않고 시를 지었다. 점포 사람들 모두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늘 그에게 많은 돈을 보시하였다. 그의 부모가 그를 집안에 가둬두기도 하고 묶어두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도망쳐서는 늘 하던 대로 걸식하였다. 밤에는
한희재(韓熙載), 기방에서 구걸하다 한희재(韓熙載), 자는 숙언(叔言), 오대(五代) 때 유주(濰州) 북해(北海) 사람으로 후당 장종 이존욱(李存勖)의 동광(同光, 923~926) 연간에 진사였다. 그의 부친 한광사(韓光嗣)가 명종에게 피살되자 강을 건너 남당에 의탁하였다. 세종 때에 병부상서를 지냈다. 포용력이 있었고 비굴한 바가 없었다. 해고를 당해도 시종 절기를 잃지 않았다. 문장을 잘 써서, 서현(徐鉉)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큰돈을 주고서라도 문장을 사려고 하는 사인과 승려, 도사들이 많았다. 이런 아사도 의외로 기원에 가서 걸식하는 것을 놀이로 삼았다. 가기(歌妓) 100여 명을 한꺼번에 사서 하루 종일 가기와 함께 뒤섞여 놀기도 하였다. 낡은 옷을 입고 짚신을 신어 맹인 예인처럼 분장하고서는 홀로 거문고 타면서, 문아한 문객에게 박자판을 들게 하고는 기방에 가서 걸식하는 것을 즐겁고 유쾌하다고 여겼다. 송나라 때 소동파(蘇東坡)가 친우 보각(寶覺)이 낡은 승복을 주자, 감사의 뜻을 표하며 시를 읊었다. “아픈 몸에는 옥대 걸치기도 벅찬 일인데, 불민하여 화살촉 같은 기봉에 떨어지도다. 기생집에서 술이나 얻어먹을 물건으로, 운산 선승의 옛 가사와
거지 은사 마옹항(馬翁恒) 거지 무리에 은거하였던 아사(雅士)가 있다. 세상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즐기는 유형에 속한다. 청나라 때 봉대(鳳臺)에 마체효(馬體孝)라는 이름의 제생(諸生)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마체효는 성정이 호쾌하고 시원시원하였다. 부부가 모두 시를 읊고 불학을 좋아하였다. 창화하며 즐기다가 참선의 이치를 논하면서 밤새기도 했다. 다년간 강남의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난 다음 이름을 광(曠), 호를 옹항(翁恒)이라 고친 후 행적이 묘연해 졌다. 나중에 숙천(宿遷)현에서 죽은 거지가 발견되었다. 가슴에 시 한 수를 품고 있었다. 말미에 ‘개은(丐隱) 옹항 절필’이라는 서명이 있었다. 현령은 기이하다 느끼고 매장한 후에 그 시를 새기고 창화시까지 써서 비석을 세웠다. ‘개은(丐隱) 옹항 선생의 묘’라 불렀다. 숙천에서 죽은 거지의 절명시가 마체효의 부인 진(晉) 씨에게 전해지자 진 씨가 읽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죽은 사람은 내 남편이다.” 그 시에는 서명이 없었다. 집안사람이 숙천에 가서 대조 확인한 결과 틀림이 없었다. 은사가 아니면 뭐라 할까. 벼슬길에 마음을 두지 않고 배움을 버리고 멀리 유람하며 숨어 지내는 거지가 됐으니. ‘속세의 덧
후작(侯爵)이 구걸에 열중하다, 호적에서 지워지다 청나라 도광(道光) 연간에 북경 해대문(海岱門) 안 영광사(永光寺) 앞에 40살 쯤 먹은 거지가 있었다. 채찍질을 잘했고 해학(諧謔)에 뛰어났다. 아무 때나 속어로 내키는 대로 소곡을 편성해 읊었다. 듣는 사람들이 탄복해 앞 다퉈 돈을 희사하였다. 돈을 구걸한 후 거지는 술을 사서 맘껏 마시고는, 남은 돈은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전부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거지는 훈구 세신으로 이미 후작을 세습하였고 예전에 건청문(乾淸門)을 지켰다고 했다. 30세 이후에 집을 벗어나 거지 행렬을 따라다녔다. 어떤 때에는 몇 개월에 한 번 돌아왔다. 일 년 내내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집안사람들이 여러 번 집에 돌아와 산해진미를 향유하라고 애걸복걸해 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집에 잡혀 들어가도 삼사일이면 집안사람들이 소홀한 틈을 타 옷을 갈아입고 담을 뛰어넘어 숨어버렸다. 조정에서도 그 소식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호적을 지우고 그의 아들에게 작위를 세습하도록 하였다. 기이한가? 속세의 관점일 수 있다. 그 거지는 부귀영화를 버려버리고 거지 행세를 한 은사
진자명(陳子明), 옛 부하에게 사기 치며 구걸하다 역사에는 벼슬하다가 거지로 전락한 후 사람들에게 어떤 동정도 받지 못하는 사인이 있다. 진자명(陳子明)이 바로 그이다. 진감(陳鑑), 자는 자명(子明), 광동(廣東) 사람으로 명(明)나라 말기의 공사(貢士)다. 청(淸)나라 순치(順治) 때에 화정〔華亭, 현 상해 송강(宋江)현〕 현령에 발탁되었다. 진자명은 사람됨이 험악하고 외지어 타인을 비방하기를 즐겼다. 나중에 직권을 이용해 양식을 횡령하니 파직되어 감옥에 갇혔다. 만기 출소 후 생계가 막막해지자, 아무 때나 옛 부하였던 관리들을 찾아가 먹을 것을 요구하였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은밀하게 숨겨진 일이나 단점을 캐내기도 했다. 심지어 관부에 고발까지 하니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입에 풀칠하지도 못하게 되자, 마누라와 함께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80세까지 살다가 결국 얻어먹지 못하여 굶어 죽었다. 평상시에도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거지를 대하는데 진자명 같은 나쁜 자가 궁핍해져서 거지꼴하고 구걸하며 돌아다니니 가련하게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낡은 버릇을 고치지도 않고 계속 사기치고 협박하며 재물을 가로채다가 결국 굶어 죽었으니, 어찌
관중(管仲), 배고파 구걸하니 밥을 무릎 꿇고 먹이다 춘추시대에 유명한 정치가, 『관자(管子)』의 작가라 알려진 관중(管仲)은 관경중(管敬仲)이라고도 불린다. 이름은 이오(夷吾)요, 영상(潁上) 사람이다. 포숙아(鮑叔牙)가 추천하자 제(齊) 환공(桓公)에게 경(卿)에 임용되어 ‘중부(仲父)’라 존칭되었다. 제나라에 관리로 있을 동안 관중은 정치, 군사, 경제 등 일련의 개혁정책을 펼쳤다. 국력을 크게 떨쳐 당시에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다. 제환공도 패주가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혁혁한 공을 세운 사인도 일찍이 노(魯)나라에서 제나라에 의탁하러 가던 중에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기오(綺烏)의 관리에게 구걸하였다. 그 관리는 무릎을 꿇고 관중에게 밥을 건넸다. 기오의 관리는 눈치 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만약 당신이 다행히 죽음을 면하여 제나라에서 중용된다면 내게 어떤 보답을 하려 하시오?” 관중이 답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현인을 뽑고 능력자를 임용할 것이오. 어떻게 당신에게 보답하여야 되겠소?” 기오의 관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 시대의 명사는 곤궁에 빠져 구걸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하여도 지조는 잃지 않았다. 그러니 나중에 대업
팔기(八旗)1) 자제가 거지로 전락하다 진(晉)나라 때 중이(重耳)는 왕공 귀족이었다. 유랑하며 걸식을 경험하는 등의 난관을 뚫고 대업을 이루어 일대 패주, 정치가가 되었다. 명 태조는 구걸했던 경험이 명 왕조를 건립하는 기틀이 되었다. 신사(紳士) 계층도 가난 때문에 걸식하며 생계를 유지한 사례가 많다. 예를 들어 청대 동치(同治) 시기에 상군(湘軍)의 유명한 장군, 나중에 복건(福建)제독이 된, 왕명산(王明山)은 어린 시절 상담(湘潭)에서 걸식하다가 나중에서야 군에 입대하였다.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워 한때 부귀를 누렸다. 인생은 변화무쌍하다. 재미있는 것은 나쁜 일은 계속해 반복하듯이 똑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청대 건륭(乾隆) 시기에 팔기의 제군(制軍) 출신이 있었다. 부유하게 살다가 궁핍해진 후 거지가 되었다. 부귀했을 때에는 시첩, 하인 할 것 없이 복식이나 음식, 노리개 모두 지극히 사치했고 무절제하게 낭비했다고 전한다. 관직에서 쫓겨나 경사로 돌아갔을 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해져 있었다. 얼마 없어 한 집 한 집 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거지가 되었다. 경사의 왕공 귀인 모두 그를 받아주지 않았는데 대흥(大興) 사람 주문정(朱文正)만이 문지기에게
‘옜다’하고 던져 주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 중국에 “‘옜다’하고 던져 주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유명한 전고가 있다. 모욕적인 베풂은 받지 않는다는 말로, 멸시하거나 모욕적인 보시는 결코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전고는 『예기(禮記)·단궁(檀弓)』에 기록돼 있다. 춘추시대 때에 제(齊)나라에 큰 기근이 들었다. 식량이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쓰러졌다. 검오(黔敖)가 길가에 음식을 늘어놓고는 지나가는 배고픈 사람을 기다렸다. 하루는 굶어서 부황이 든 사내 한 명이 찾아왔다. 너덜너덜한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다 해진 짚신을 신고 있었다. 지팡이에 의지한 그의 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본 금오가 왼손에는 밥, 오른손에는 마실 것을 들고 사나이에게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이봐라, 이리 와서 이걸 먹어라.” 그러자 사내는 오히려 굶주림을 잊은 듯 허리를 쭉 펴고 머리를 곧추세운 후 검오를 매섭게 쏘아보면서 자못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이런 차래지식(嗟來之食) 따위를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꼴이 되었다. 가짜 선심은 그만두어라”하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금오는 황급히 그 사나이를 뒤쫓아 가서 자신의 무
‘사(士)’는 오래된 한자다. 한나라 때 허신(許愼)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일하다, 섬기다(事)이다. 숫자는 일(一)에서 시작해 십(十)에서 끝나니 일(一)과 십(十)을 따랐다. 공자는 ‘십(十)을 미루어 일(一)을 합하면 사(士)가 된다’고 하였다.”라고 풀이하였다. 숫자 기록에서 퍼져 나온 ‘일하다, 섬기다(事)’가 본뜻이라 여겼다. 양백준(楊伯竣)의 『논어역주(論語譯注)』 통계에 따르면 『논어』 중에 단독으로 ‘사(士)’자 하나만 사용한 곳은 두 가지 상황이라 한다. 3차례는 일반 인사(人士)를 총괄하여 가리키고 있고 12차례는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수양한 사람을 특별히 지칭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사(士)’자의 갑골문 원형은 뜻밖에도 생식 숭배를 상징하는 생식기로 보는 학자도 있다. 먼저 남자의 통칭으로 발전한 후, 나중에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가지거나 수양한 사람을 가리키는 미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른바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가지거나 수양한 사람은 중국문화전통 중 관직을 근본으로 삼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인 관본위(官本位)의 전형적인 구현이다. 『논어·자장(子張)』에 “벼슬하면서 여력이 있으면 학문하고,
곧바로 두 사람에게 금란전(金鑾殿)에서 배를 올리도록 하였다. 예를 마치자 황제가 말했다. “너처럼 뛰어난 사람은 거지 중에는 물론이고 관리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과인이 그런 훌륭한 점을 보고서 어찌 발탁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지금 곧바로 이부에 명해 네게 청환(淸宦) 요직에 앉히려 한다. 백성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고 거지들에게도 의를 중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보는 풍조를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궁불파’ 고개 숙여 절하며 말했다. “만세이시여, 다른 하사품은 얼마든지 감사히 받겠사옵니다. 단지 이 일만은 명을 받기 어렵나이다. 의관은 조정의 진귀한 기물입니다. 어찌 거지에게 쉽게 하사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거지가 된 후 10년 동안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궁불파’가 유명한 거지임을 모르는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단 관을 쓰고 띠를 둘러 벼슬아치 사이에 서면, 사람들이 관복을 더러운 기물로 보게 되고 봉록을 먹다 남은 찌꺼기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거지 중에 현자와 어리석은 자가 섞이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정에는 귀천의 구분이 없어지게 됩니다. 만일 현인군자가 관직을 그만 두고 숨어버리기 시작하면 만세께서는 누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