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사화』 제60회 ‘이병아(李甁兒)가 우울증으로 병을 앓자 서문경(西門慶)이 바로 비단이불을 깔다’에서 서문경이 여러 사람에게 술자리를 마련하라고 명하자 응백작(應伯爵)이 빙빙 돌려서 말했다. “성급하게 달려오는 남자애, 왼손엔 콩 바구니 들고 오른손엔 면화 마대를 들고 오로지 앞을 향하여 뛰어가다 황백 얼룩개와 부딪쳤다.……어느 손으로 개를 막아야할지, 개는 어느 손을 물어야 할지 몰랐다!” 말을 마치자 서문경이 웃으며 욕했다. “너 이 도둑놈, 헛소리로 창자를 끊어놓으려고. 뒈질 놈! 어느 누가 한 손으로 개와 싸운다는 말이냐? 개에게 한 입에 물릴 텐데?” 응백작이 변명하였다. “누가 몽둥이 들고 다지지 말라 그랬나요! 나는 지금처럼 거지가 성난 개를 막을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지 못했소.” 그때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즐기고 있던 사희대(謝希大)가 말했다. “나리, 화자(花子)를 보세요, 자기 집이 비참한 꼴이 되었잖아요, 그를 거지라 그러잖아요.” 응백작은 ‘응화자’라는 별명이 있었다. ‘화자(花子)’는 물론 거지다. 이 말에 대한 실마리를 찾으려면 청대 ‘몽필생(夢筆生)’이 『금병매』 속작으로 쓴 『금옥몽』을 보면 된다. 당시 서문
빈자(貧者)가 말했다. “응응. 주인에게 쫓겨나게 되니 말이 많아지고 비웃음 사게 됐구려. 마음에 품은 바를 다 말하려 하오. 옛날에 내게도 조상이 있었소. 현명한 덕을 숭상하여 요임금을 보좌할 수 있었고 법칙 준수를 맹세하였소. 흙 계단 초가집, 조각도 장식도 없는 곳에서 살았소. 말세에 방종해지고 혼미하게 되었소. 탐욕스러운 무리가 많아지고 가난한 자가 부귀를 쉽게 얻게 되었소. 우리 조상을 경시하며 오만하고 방자하게 굴었소. 으리으리한 누각, 화려한 집을 드높이고 술이 흐르는 연못에서 고기를 쌓아 안주 하였소. 홍곡과 같이 높이 날아 멀리 떠나서 그 조정에 처하지 않았소. 내 몸을 세 번 반성하기에 나는 잘못이 없다 말할 수 있소. 당신의 집에 살았던 게 태산 같은 복이었소. 내 큰 덕은 잊고 내 작은 빈한함만 생각하는 게요. 추위와 더위를 이겨낼 수 있는 습관을 만들 수 있었고, 추위와 더위에 잘못되지 않으니 신선처럼 장수할 수 있었소. 하걸, 도척이 주의하지 않고 무뢰배들이 무례한 짓을 하지 않았소. 모든 사람이 층층이 쌓인 곳에서 살았지만 당신은 홀로 탁 트인 곳에서 살 수 있었소. 모든 사람이 근심걱정 했지만 당신 홀로 우려하지 않았소.” 말을
요 몇 년 사이에 민속학이 중국 인문과학계에 새로 각광을 받고 있다. “문학은 사실과 영혼이 서로 부합한 이후의 재현이다”(Honoré de Balzac)라고 하기도 한다. 중국 대륙의 당대 거지 조사 중에 당대 거지의 구걸, 축하, 욕, 오락에 대한 가요(歌謠)를 주의해 수집하면서 “거지 가요는 인류사에서 거지가 생긴 이래 존재하고 전해져 내려오며 발전한 것이다”1) 라고 생각한다. 거지 노래는 이렇다. “선의는 복을 받고 악의는 귀신이 용서하지 않는다네. 부처를 믿으면 착한 일하고, 내가 가난뱅이라는 것을 불쌍히 여기네. 많은 돈을 바라지 않소, 오 푼이면 되오. 당신이 내게 돈을 주면 하늘이 평안하게 보우할 것이외다.” 이것은 남경 계명사(雞鳴寺) 부근에서 ‘무릎 꿇고 앉아서 구걸하는’ 거지들의 노래다. 기도하러 사찰에 가는 사람의 감사를 드리는 마음에 맞추면서 부처를 빌어 구걸하고 있다. “대나무 판을 치면서 거리에 왔네요, 한 길 두 곁채 장사 잘 되네요. 황금 글씨 은 간판, 동쪽에서 줍고 서쪽에서 당기 듯 걸려있네요. 요 며칠 내가 오지 않으니, 상점 주인이 부자 됐다 하네요. 주인이 부자 되면 나도 덕을 보고, 당신은 교자를 먹고 나는 탕을 마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중국 대륙의 연해 도시에 외국인 거지가 등장한 적이 있었다. 역사 기록은 이렇다. “상해에는 거지가 많다. 여러 성에서 온 거지다. 빈곤한 집안 자식들이 생계를 유지하려고 상해에 왔으나 생계를 이루지 못하여 거지로 전락하였다. 외국인 거지도 있다. 모두 상해로 모여들었다. 능력이 박약한 자나 행동거지가 단정치 못한 자가 결국 그런 지경에 빠진 것이다. 서양인에게 구걸할 뿐만 아니라 화려한 저택을 가진 중국인에게도 다가가 구걸한다. 오랫동안 꿇어앉아 구걸하였다. 외국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습성이 된 나는 파란 눈동자에 금색 머리를 한 거지를 보기만 하면 아무런 인색함 없이 은화를 던져주었다. 보통 거지에게 한 푼 주는 것이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보산로(寶山路)에 성모 예배소가 세운 여학교가 있다. 작은 키에 둥글고 납작한 얼굴, 높은 코, 파란 눈의 여학생이 있다. 서양 옷을 입어도 밉지가 않다. 아침저녁으로 책을 끼고 왔다 갔다 하는데 그 부모는 보흥로 거리에 있는 집에 산다. 여학생의 얼굴과 무척 닮은 거지 부친은 영국인으로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중국에 오래 살았다. 함풍, 동치시기에 미국인 워드(Frederick T
역사학자 여영시(余英時)는 8편의 논문을 종합하여 『사(士)와 중국문화』를 편찬하였다. 비교적 계통적이며 깊이 있게 역사상 ‘사(士)’ 계층과 중국문화의 관계를 해부하였다. 중국역사상 ‘거지’는 사회단체다. 하층사회 중에서도 작은 층면에 불과하다. ‘사(士)’처럼 중국민족문화 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더라도 거지 현상은 난감한 사회문제 중 하나다. ‘거지문화’는 비정상적인 변태문화이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다. 이 ‘거지’ 문제는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그리 주의를 받지 못했다. 당대에 와서 거지의 직업화가 갈수록 현저해지고 거지 현상이 사회 치안에 해를 끼치면서 관련된 분야와 언론계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다음 몇 가지 보도를 먼저 보자. 1985년, 광주(廣州)시에 거지 12,662명이 있다. 1987년, 광동(廣東)성에서 유랑하며 걸식하는 사람 29,600명을 수용하고 심사 후 783명이 살인, 강도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색출해 냈다. 1986년, 주해(珠海)시가 유랑하며 걸식하는 사람을 수용한 숫자가 1979년보다 10배나 많아졌다. 1986년, 하얼빈(哈尔滨) 철도 공안부에서 적발해 체포한 각종 형사사건 범죄자 중 30%
민간전설 중에 사람들은 현실생활에서 먹기만 하고 일은 하지 않는 거지와 ‘신선 거지 철괴리’를 연결시켜 ‘신선 거지’가 ‘사람 거지’를 교육했다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전하는 바는 이렇다 : 옛날에 젊은 거지가 한 명 있었다. 먹기만 하고 일은 하지 않았고 도박에 빠져 있었다. 조부가 남겨준 재산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탕진하여 돌아갈 집이 없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밤에는 철괴리의 사당에서 잠을 잤다. 젊은 거지가 먹을 것이 없어 아사하기 직전에 철괴리에게 보우를 기도하자 철괴리의 신력에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도 젊은 거지는 나쁜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던가, 욕망은 한이 없었다. 신선이 되어 한가롭게 노닐 꿈만 꾸었다. 결국 철괴리는 시 네 구절을 읊어주며 가르침을 주었다. “네게 원보를 준들 긁어모으는 데에 게으르고, 관리가 되게 한들 조정에 나가는 데에 나태하구나. 사지를 쓸 노력은 하지 않고 공상에 빠져 있으니, 그저 걸식하면서 쪽박이나 품고 있는 게지.” 나무 우리에 앉아 동냥하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행각도사와 의술을 행하고 약을 팔거나 길흉을 점치며 돌아다니는 도사 이외에 이른바 ‘좌관(坐罐)’하며 동냥하는 도
이제, 도교에 대하여 알아보자. 고대 무술(巫術), 진한(秦漢)시대 신선방술에서 기원하고 있는 도교는 중국 본토에서 생겨난 고유의 종교다. 재미있는 것은 도교도 수행하고 고행하면서 도를 얻는 방법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탁발과 유사한 구걸을 중히 여긴다. 민간문화 중 도교 전설 속 신비로운 인물의 형상은 대부분 청빈하고 걸식하는 거지 형상을 갖추고 있다. 심지어 거지인 채로 직접 출현하기도 한다. 구처기(丘處機)와 증구절(蒸九節) 금(金)대의 유명한 도사, 도교 전진교 북칠전(北七傳) 중의 한 명이 구처기(丘處機)이다. 19세 때에 영해(寧海) 곤유산(昆崳山, 현재 산동 모평(牟平) 동남쪽)에서 출가해 왕중양을 스승으로 모셨다. 금대 세종 대정(大定) 14년(1174)에 걸식하며 살았고 도롱이 하나만 걸치고 다녀 ‘사의(蓑衣)선생’이라 불렸다. 나중에 농주(隴州) 용문(龍門)산에 은거하며 수도하여 용문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원 왕조가 들어선 후 원 태조가 구처기에게 ‘나라를 다스릴 방도’를 묻자 경천애인을 근본으로 삼으라 하였고 ‘장수하는 도리’를 묻자 청심과욕이 요체라고 말했다. 원 태조는 그 말을 깊이 믿어 ‘신선’이라는 호를 내리는 한편 ‘대종사’의 작위
종교는 대부분 민간 신앙 습속에서 기원한다. 역으로 여러 가지 민속 형태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중국 전통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유교, 도교, 불교다. 재미있는 것은, 이 세 종교 모두 사회의 비정상적인 문화인 거지와 역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공자(孔子)는 진나라에서 식량이 다 떨어져 굶게 되었을 때 범염(范冉)에게 먹을 것을 빌렸다고 한다. ‘궁가항(窮家行)’이라는 별칭을 가진 거지는 이런 밑도 끝도 없는, 황당무계한 말을 가지고 부잣집에서 구걸하였다. 유교주의 사회에서 거지가 자신들이 구걸하는 행위에 정당성이 있다는 무형의 근거로 삼았다. 그래서 거지들은 범염을 자신들의 조사로 삼았다. 공자와 범염의 생애를 보면, 몇 백 년이라는 거리가 있어 결코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없지만 유교의 교주를 거지의 조사와 억지로 연결시킨 것이다. 도사와 승려는 어떤가? 실제 몸을 낮추어 동냥하면서 수행하지 않던가. 직접 걸식하면서 징을 울려 길을 열어주 듯 닥쳐올 일에 대비해 길을 알려주면서 사회 풍조에 잠재적인 영향과 효과를 자아내지 않던가. 먼저 불교를 보자. 묻혀있던 부처가 나타나다 모든 세상 사람이 불교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불교를 믿는 사
중국 전통문화 중 충효 윤리 관념은 일찍이 주(周)대, 진(秦)대 이래로 유가 등 사상가들이 종족 가정의 범주를 뛰어넘어 ‘나라를 안정시키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정치 도덕으로 승화시켰다. 충효는 중국 민족문화 전통의 핵심이다. 우순(虞舜), 한문제에서 맹종(孟宗), 황정견(黃庭堅) 등 24명의 효행에 대하여 서를 달고 시를 읊어 아동을 훈몽하는 『이십사효(二十四孝)』, 『이십사효도시(二十四孝圖詩)』를 편찬하였다. 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행하였고 경전과 같이 영향력도 대단했다. 효도를 위하여 자살한다거나 살을 베어낸다는 등의 극한 사례 이외에 충성을 다하고 효도를 다하기 위하여 기꺼이 거지가 되어 구걸하는 사례도 있다. 바로 역대로 세상 사람들이 표창하고 영광으로 여기는 ‘효개(孝丐)’다. 효행한 거지의 사례는 역대 필기잡저에 많이 기재되어 찬탄 받고 사회 풍습이 되었다. 역대 ‘효개’ 중에는 명나라 때 사람이 많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효행한 거지 : 효개(孝丐) 명대 경초동(耿楚侗)의 『이효자전(二孝子傳)』 기록이다 : 오문(吳門)에 귀인 한 명이 달밤에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다리 아래에서 노랫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거지가 구걸해온 술을 들고 무릎
거지닭이라는 의미의 ‘규화자계(叫化子鷄)’는 강소 상숙(常熟)의 유명한 요리다. 특수한 가마에 넣어 굽는 방식과 독특한 풍미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대체적인 요리법은 이렇다 : 크고 살진 암탉을 골라 내장을 빼내고 털을 말끔히 뽑은 후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는다. 닭의 배안에 여러 가지 원료를 넣는다. 신선한 고기, 생새우살, 소시지, 표고버섯, 닭내장, 정향 등의 원료와 파, 생강, 소금, 간장 등의 양념을 버무려 채워 넣는다. 돼지기름으로 닭을 한 겹 싸고 다시 연잎으로 싼 후 밖에 황토 진흙을 바른다. 숯불 위에 올려놓고 약 4시간에서 6시간을 불에 구운 후 진흙껍질을 벗겨내면 된다. 그렇게 요리한 닭은 바삭바삭하고 부드러워 입에 맞는다. 특별히 맑고 향기로우며 맛도 유별나다. 상주 우산(虞山)진의 셀 수도 없이 많은 음식점에서 규화자계를 요리해 판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명성을 듣고 끊임없이 모여든다 청대 광서 8년(1882)에 문을 연 우산 산경원(山景園) 찻집이 처음 규화자계를 만들었다고 전해온다. 벌써 백년이 넘었다. 이처럼 맛있고 좋은 미식이 어떻게 ‘규화자’ 즉 ‘거지’라는 이름이 붙었는가? 닭을 가마에 넣어 굽는 요리 방법은 명대 상숙
사람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먹을 것은 삶의 근본이다. 본래 의미에서 말하면 거지가 구걸하는 것은 먼저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다. 그렇게 거지와 음식 습속 사이에 관계가 발생한다. ▲교자(餃子)피 전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전에 큰 부자가 있었다. 별명이 ‘만대야(萬大爺)’였다. ‘노래향(老來香)’ 교자관의 교자가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하자 맛보고 싶어 찾아갔다. 점원이 대접을 소홀이 할 수 없어 곧바로 교자를 가져다주었다. 만대야가 한 입을 깨물고는 입을 쩝쩝 다시면서 말했다. “이 교자는 재미가 좀 있구먼. 피는 크고 소는 작아.” 그러고서는 교자 소만 먹고 피는 바닥에 뱉어냈다. 탁자 주위가 교자피로 가득할 때까지 먹었다. 어느 날, 만대야가 그곳에서 교자를 먹고 있는데 때마침 늙은 거지가 교자관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널려져 있는 교자피를 보자 허리를 굽혀 두 조각을 주워 입에 넣었다. 그때 만대야가 거지의 손을 발로 차면서 욕을 해댔다. “이 죽지도 않는 늙은이. 눈깔 삐었어? 그건 내가 내 돈으로 산 건데. 네가 줍긴 왜 주워. 꺼져!” 점원은 문제를 일으킬까 염려되어 급하게 늙은 거지를 밖으로 내보냈다. 만대야는 매일 교자관에서 교자를
심한 경우도 있었다. 거지 단체가 그걸 기회로 함부로 협박해 재물을 강요하였다. 진우문(陳雨門)의 『개봉춘절구침(開封春節鉤沉)』에 한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설 전후 연말연시 때에 거지가 많았다.” 『개봉기구전불진노인담(開封耆舊傳拂塵老人談)』 기록을 보자 :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음력 섣달부터 음력 섣달 그믐날까지 상국사(相國寺)의 속인들과 잡팔제(雜八弟, 강호에서 상하구류의 한 분파를 말하는데 소매치기, 유괴범, 사기꾼 등을 포함한다)가 결합하여 귀신, 부녀자로 분장해 북을 치고 휘파람을 불면서 매일 저녁 상점이 문 닫을 즈음에 길을 따라서 사기치고 강탈하였다. 섣달 그믐날이 가까워지면 더 심해졌다. 그러면 상국사 두목 노요(魯耀)가 친히 나서서 중재하였다. 연말마다 거상들이 대표를 선발하여 약간씩 갹출하여서 거지 두목에게 전달했는데 ‘송년(送年)’이라 불렀다. 민국 8년 이후에서야 처음으로 단속되었다. 중일전쟁 이전에 연화락을 실연하며 다니는 거지들이 있었다. 어린아이 머리에 부들로 엮어 만든 꾸러미를 씌우고 코와 입만 보이게 구멍을 낸 후 그 위에다 석회로 자라 모양을 그리고 가운데에 ‘왕팔(王八)’ 두 글자를 써서는 목에다 삼밧줄을 묶어서 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