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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44)

인생, 순조롭게만 살아갈 수는 있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어떤 일이든 풍파를 겪게 된다. 여러 곤란과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초래하였든 밖에서 밀려왔든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시기의 풍파를 인내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자신이 의지나 웅대한 뜻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른다.

 

지금 큰일을 이루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뜻을 높이 가져야 한다. 한 시점, 한 사건에 순조로우냐 장애가 있느냐에 마음 둬서는 안 된다. 일시적 성패에 골몰해서도 안 된다. 좌절을 겪었거들랑 강해지려 마음먹어야 한다. 어려움을 이기려 분투하면서 자기 이상을 실현하여야 한다. 성공하려면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태도가 있어야 한다. 장애물은 사람의 의지를 연마하는 가장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좌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을 이룰 수 없다.

 

『맹자·고자하(告子下)』에 익숙한 말이 나온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혀 그 근골을 지치게 하며,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하여서 행하는 일이 뜻과 같지 않게 한다. 그 마음을 움직여서 그 성질을 참게 해, 일찍이 할 수 없었던 일도 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하여야만 성공이란 피안으로 갈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좌절해서는 안 된다. 충격, 고난이 다가오거들랑 신중히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것에 억눌려서는 안 된다. 범수(范睢)는 좌절을 겪었으면서도 치욕을 감내하면서도 발분해 강해지기를 도모하였다. 모욕을 감내하며 ‘동산재기’를 준비하였다.

 

범수는 전국시대 때 위(魏)나라 사람으로 유명한 책사다. 변론을 잘했고 계략과 결단력이 뛰어났다. 마음에 큰 뜻을 품고 있어 대업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출신이 빈한해 그를 최고 권력층에 추천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위나라 대부 수가(須賈)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수가가 위왕의 명령을 받아 제(齊)나라에 출사하게 되자 범수는 수행원으로 함께 가게 됐다. 제나라 국군(國君) 양왕(襄王)은 일찍부터 범수가 설득력 갖춘 웅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범수가 제나라에 다다르자 양왕은 사람을 시켜 황금 10근과 미주를 범수에게 보내어 지사(智士)라며 경의를 표했다. 범수는 감사하는 마음을 표했으나 감히 양왕이 보낸 선물을 받지 못했다. 그 와중에 생각지 않게 수가의 의심을 사게 됐다. 수가는 범수가 위나라의 기밀을 팔아넘겼기 때문에 양왕이 선물을 보냈다고 여겼다. 그것이 아님을 여러 차례 알렸으나 고집스레 자기 판단을 바꾸지 않았다.

 

 

“범수가 황금을 받았다.”

 

수가가 귀국한 후 위나라 상국(相國) 위제(魏齊)에게 보고하였다. 위제는 진위를 가리지도 않고 범수에게 중형의 징벌하였다. 범수는 중형을 받아 뼈가 부서졌고 이가 빠졌다. 억울함을 당한 그는 해명하려 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죽은’ 척하며 재앙을 피하려 했다. 범수가 이미 ‘죽자’ 위제는 낡은 거적자리로 그의 ‘시체’를 말아 측간 안에 놓아두도록 명했다. 나중에 연회를 베풀어 손님을 부른 후 계속해서 모욕을 주면서, 모두에게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려 한다면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려는 속셈이었다.

 

정말 불의의 재앙이 날아든 셈이었다. 한 순간에 범수를 황천길로 보낼 수 있는 횡액이었다. 그러한 모욕을 받은 범수는 자신을 보전하려고 참을 수 없는 모욕과 학대를 감내하였다.

 

범수는 낮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육체의 고통과 모욕을 받았다. 온힘을 다하여 위나라에 충성하려는 뜨거운 열정이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나라를 벗어나 공명을 떨칠 곳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위험을 벗어나려고 범수는 측간을 지키면서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놓아주면 나중에 크게 보답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 감시자는 위제가 술에 취하여 정신이 희미해지자 범수를 놓아주었다. 범수는 정안평(鄭安平)이라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기고 장록(張祿)으로 이름을 바꿨다.

 

범수가 모욕을 감내하고 민간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 진(秦)나라에서 왕계(王稽)라는 사자가 위나라에 왔다. 당시에 진나라는 강대한 국력을 자랑하였다. 육국을 병합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정안평은 진나라 사자 왕계가 위나라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관아의 하인으로 분장해 왕계를 시봉하였다. 기회를 틈타 범수를 추천하려는 목적이었다. 어느 날, 왕계가 머물고 있던 관사에서 정안평을 불러 위나라에 자신과 함께 진나라로 가려하는 유능한 가신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정안평은 곧바로 왕계에게 범수의 재능을 이야기했다. 왕계는 곧바로 날이 어두워지면 범수를 관사로 데려오라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정안평은 왕계가 머물고 있는 관사로 범수를 데리고 갔다. 범수는 왕계를 만나자마자 당당하게 말을 꺼냈다. 한 조목 한 조목 세밀하면서도 조리 있게 분석하며 천하 대사를 이야기했다. 일장 연설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능력과 지혜로 왕계를 설득시킬 수 있었다. 왕계는 범수를 데리고 진나라로 가기로 결정한다.

 

왕계가 사신의 일을 끝내고 위왕에게 고별한 뒤 개인적으로 범수를 데리고 진나라로 돌아갔다. 일행은 급히 서둘러 돌아가다 진나라 국경에 있는 경조(京兆) 호현(湖縣)에 다다랐을 때, 앞쪽에서 먼지가 이는 쪽을 바라보니 일군의 병마가 자기 쪽으로 달려오는 게 아닌가. 범수는 급히 왕계에게 물었다.

 

“앞에서 달려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왕계가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범수에게 진나라 양후(穰侯) 위염(魏冉)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범수가 말했다.

 

“양후는 오랫동안 진나라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른 제후국의 객경(客卿)을 진나라로 초대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를 만나면 제가 모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를 수레에 숨겨주십시오. 그를 만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숨자마자 위염의 병마가 도착하였다. 위염은 왕계에게 인사치레로 사자로 다녀오느라고 고생했다고 위로한 후 범수가 예상한 대로 왕계에게 캐물었다.

 

“사자로 갔다가 진나라로 돌아오면서 다른 제후국의 객경을 데리고 오는 것은 아니겠지요? 객경을 초빙하는 것은 진나라에 전혀 이롭지가 않소. 번거로움만 생길 뿐이오!”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서둘러 대답하면서도 왕계는 범수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였다. 위염은 왕계를 한두 번 쳐다보다가 마부에게 계속해서 가라고 손짓하고는 떠났다.

 

범수가 위염 일행이 떠나는 거마의 소리를 들은 후 수레에서 내려서는, 멀어져가는 위염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위염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들었다. 방금 수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면서도 결정이 늦었을 뿐이다. 수색을 잊어버린 것이니 다시 돌아올 게 분명하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곧바로 왕계에게 말했다.

 

“위염은 수색하지 않고 그냥 간 것을 후회할 것입니다. 다시 사람을 보내 수레를 수색할 것이 분명합니다. 역시 제가 몸을 숨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범수는 도로 옆 좁은 길을 이용해 걸어갔다. 왕계는 수레를 천천히 몰며 걸어가는 범수와 보조를 맞췄다. 10여 리나 갔을까, 뒤편에서 급히 달려오는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위염이 보낸 병졸들이 뒤쫓아 온 것이었다. 왕계의 수레를 포위하고는 급히 수레 안을 수색하였다. 수레에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말을 몰아 되돌아갔다.

 

말소리가 멀어지자 범수가 작은 길에서 나와 왕계를 향하여 미소 지었다. 그제야 말에 올라 채찍질하며 진나라 도성 함양(咸陽) 방향으로 급히 내달렸다.

 

 

범수는 죽은 척하여 위나라에서 도망쳤고 지혜를 발휘해 위염에게서 벗어나 진나라로 갔다. 진나라에 간 후 자신의 말재주를 충분히 이용해 진 소왕(昭王)에게 유세하였다. 결국 소왕의 신임을 얻게 된다. 진 소왕은 범수의 책략을 채용해 내부적으로는 중앙집권을 강화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원교근공’의 패업 방책을 사용해 관동(關東) 열국에게 강하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진 소왕은 나중에 범수를 상국에 임용하고 응후(應侯)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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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수(范睢) : ?~BC255, 자는 숙(叔), 위(魏)나라 예성(芮城, 현 산서山西 예성芮城) 사람으로 유명한 정치가, 군사전문가, 진(秦)나라 재상이다. 봉지가 응성(應城)이라 ‘응후(應侯)’라 부르기도 한다.

 

○ 정안평(鄭安平) : ?~BC255, 『여씨춘추(吕氏春秋)』 卷22에는 정평(鄭平)으로 돼있다.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이다. 정안평은 범수를 도와 진나라도 피신케 하였고 범수가 진나라 상국이 된 후 추천받아 장군이 됐다. 나중에 ‘감단 전투(邯鄲之戰)’에서 조(趙)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자 조나라에 투항해 무양군(武陽君)에 봉해졌다.

 

○ 왕계(王稽) : ?~BC255, 전국시대 진(秦)나라 사람. 진왕에게 명받아 위나라로 출사하였을 때 범수를 도와 진나라로 도망치게 했다. 범수가 국상이 되자 하동군 군수로 추천되었다. 제후와 사통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당하고 기시(棄市)되었다.

 

○ 위염(魏冉) : 위애(魏厓), 위창(魏焻)이라고도 한다. 식읍이 양(穰)에 있어 양후(穰侯)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대신이다. 선(宣)태후의 이부동모 동생으로 소양왕(昭襄王)의 외삼촌이다. 혜왕(惠王) 때부터 임용되었다. 진 무왕(武王) 시절, 23세 때 정(鼎)을 들다가 죽었다. 아들이 없어 여러 형제가 재위를 두고 쟁탈하였다. 위염의 세력이 강하여 소왕(昭王)을 옹립하였고 소왕의 상대 세력을 말소하였다.

 

 

○ 동산재기(東山再起) : “사안(謝安)은 어릴 적부터 명성이 자자해 여러 차례 예를 갖추어 관직을 주려 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하였다. 나이 40을 넘기어 다시 나아가 환온(桓溫)의 사마(司馬)가 되었고 여러 번 중서(中書), 사도(司徒) 등 요직을 옮겼다. 진(晉) 왕실은 (그에) 힘입어 위기에서 안정을 찾았다.”(『진서(晉書)·사안전(謝安傳)』)※동산(東山)은 상우(上虞) 상포(上浦)진에 있다. 절강(浙江)성 소흥(紹興)시 상우(上虞)구 서남쪽이다. 동진의 명재상, 군사전문가인 사안이 머물렀던 곳으로 오호사해에서 사(謝) 씨 후예들이 매년 그곳에 몰려가 제사지낸다. ‘동산재기’의 은거지로, 사안산(謝安山)이라고도 불린다.

 

○ 객경(客卿) : 고대 관명(官名)이다. 춘추전국시대에 본국 출신이 아니면서 본국에서 고급 관직에 있던 사람을 부르는 용어다. 진(秦)나라에 객경(客卿)이라는 관직(좌서장左庶長 작위)이 있었다. 다른 제후국에서 진나라에 초빙해 관직을 하사하고 직위를 경(卿)이라 하여 객의 예로 대하였기에 붙여진 칭호다. 나중에 본국에 살면서 관직에 있는 외국인을 통칭하게 됐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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