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부친의 유산 문제로 증헌재(曾憲梓)는 멀리 태국에 있는 형 증헌개(曾憲槪)가 여러 번 재촉하자 태국으로 건너갔다. 증헌재의 숙부 증도발(曾桃發)은 그 소식을 듣고는 증헌재가 그의 형과 힘을 합쳐 자신과 대적하려고 태국으로 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
새벽 일찍,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객가(客家) 손윗사람 세 명이 증헌개의 작은 점포에 찾아와 고집스레 증헌재를 “차라도 한 잔 하고 식사라도 하자고” 청했다. 증헌재는 정중하게 그들을 따라 증도발의 회사에 갔다. 모든 사람이 자리를 잡자 숙부들이 친근하고 온화하였던 처음 모습을 바꾸어 증헌재를 질책하기 시작하였다.
“네 꼴 좀 봐라! 무슨 모양이 그러냐. 경우도 없이. 태국에 오고 나서 여태까지 숙부나 숙모를 찾아와 인사도 하지 않고. 네가 뭔데? 무례하기가 짝이 없구나.
사실 증헌재는 태국에 도착한 당일 아랫사람의 도리를 다하려고 숙부와 숙모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었다. 숙부들이 면전에서 훈계하는 것은 그야말로 증헌재를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숙부들이 아무 말도 못하는 증헌재의 모습을 보고 정말로 대역무도했다고 생각해 사정을 봐주지 않고 증헌재에게 욕을 심하게 퍼부었다. 원래 자존심이 강하고 혈기왕성하였던 증헌재는 끝내 참지 못하고 검은 얼굴의 막돼먹은 놈처럼 노발대발하였다.
“숙부님들이야말로 정말 말도 되지 않고, 경우도 없습니다, 그려! 나는 본래 숙부님들을 존중하려고 했습니다. 숙부님들은 손윗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욕이나 내뱉고 사기꾼처럼 속이려는 흉계를 꾸미는 것을 보니, 숙부님들은 내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증헌재는 자기 앞을 막 지나가는 아이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나 이놈은,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여태껏 존경을 표해왔습니다. 저 애처럼 나이가 아무리 적다하여도 사람 도리를 알고 사리분별 할 줄 알면 나는 나이를 불문하고 존경을 표해왔습니다. 그런데 숙부님들처럼 나이가 들었으면서도 도리를 알지 못하고 가난한 자를 싫어하고 부유한 자를 좋아하며 양심을 저버리고 돈 있는 사람에게 알랑거리기만 하니. 숙부님들이 그렇게 하면 나는 더더욱 숙부님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들을 존중할 아무런 이유가 내게는 없습니다!”
이치에 맞고 엄하게 내뱉는 증헌재의 말은 기세등등하였던 숙부들을 기죽게 만들었고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불같은 분노를 내뿜고 노기 찬 말을 계속 쏟아내면 수습할 길이 없게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이미 잡은 승기를 순식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을 터였다.
그래서 증헌재는 수습할 방안을 찾아내었다. 이치에 맞고 근거가 있는 사실을 들춰내 순리를 찾아가야 했다. 붉은 얼굴을 한 좋은 사람처럼 할 필요가 있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숙부들에게 빠져나갈 길을 열어주어야 했다. 이제 수습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숙부님은 순수하게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만의 지혜로, 이와 같은 거대한 사업을 한 땀 한 땀 이루어놨습니다. 지금 숙부님은 재력도 있고 세력도 있습니다. 그것은 숙부님의 능력이요 숙부님의 수완이십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탄복할 따름입니다. 숙부님은 이제 이 재산을 위하여 더 이상 지혜를 짜낼 필요가 전혀 없으십니다. 어른신은 저의 숙부님이십니다. 숙부님이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아이를 부르듯이 저를 부르시면 될 일입니다. 그러면 저는 달려올 것입니다.”
사람 간의 교제에 있어 적당한 칭송은 상대방에게 친밀한 심리를 가져오게 만든다. 교류하고 소통하는 데에 전제이기도 하다. 증헌재의 숙부는 혼자 이국타향에서 분투하며 오늘날의 재부와 명성을 얻었다.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증헌재가 한 숙부를 칭송하는 말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는가? 숙부가 재계에서 수완을 발휘했으며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긍정하고 강조한 게 아닌가. 또 충심으로 자신이 숙부를 존경하고 있다는 뜻을 표현하지 않았는가.
교언도 아니요 아첨도 아닌 말로, 자신의 강직한 심성을 손상시키지도 아부하지도 않으면서 양대의 심리적 거리를 교묘하게 없애지 않았는가. 숙부와 숙모는 감격해 다가오며 말했다. “착한 조카, 착한 조카!” 일촉즉발의 긴장상황이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증헌재가 사람 사이 교제에 있어서나 가족 간의 불화가 생겼을 때 행했던, 자유자재로 조율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보면 그가 상업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명성과 실제가 부합되지 않는가. 붉은 얼굴과 검은 얼굴을 자신의 뜻대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조예가 깊다고 할밖에.
[인물]
○ 증헌재(曾憲梓), 1934년 생, 광동 매주(梅州) 사람으로 홍콩금리래(香港金利來) 그룹 창시자이다. 일찍이 전국공상연 부주석, 전국인민대상위를 역임하였다.
○ 객가(客家, Hakka) :
객가(客家)는 청(清)나라 초기 광동 서쪽[粤西] 사람들이 부르던 혜(惠), 조(潮), 가(嘉)의 이민(당시는 이미 광동성 동부 지역 현지인)에 대한 호칭이었다. 객가 민족은 중국 광동, 복건, 강서, 대만 등 거주민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중국 고대 역사에서 남천(南遷)한 중원민족 집단 중 한 부류로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영향력이 있는 민족이다.
고대 객가의 선민은 진(秦)나라가 영남(嶺南)을 정벌하고 백월(百越)과 융화되는 시기부터 서진(西晉) 영가의 난(永嘉之亂) 동진(東晉) 오호(五胡)의 중원 진출, 당(唐)나라 때 황소의 난(黄巢之亂), 남송의 건국에 따라 중원에 살던 민족이 대대적으로 남쪽으로 이전해 계속적으로 남방의 각 성으로 옮겨 살면서 오랫동안 원주민과 융화되었다. 가장 늦게는 남송 때에 점차 독특한 방언, 풍속, 문화형태를 이룬 중원민족 계열이다.
객가인은 혜주(惠州), 매주(梅州), 심천(深圳), 공주(贛州), 정주(汀州), 하원(河源), 소관(韶關)을 기본 근거지로 하고 있다. 대대적으로 중국 각지(홍콩과 마카오, 대만 포함) 및 남양(현 동남아)와 세계 각지로 이주하였다. 객가 문화는 고대 정통 중원에 거주하였던 민족의 문화를 계승하고 남방(南方, 예를 들어 영남嶺南) 토착문화와 융화한 고대 중원문화의 화석이라는 명예를 가지고 있다. 객가어는 고대 중원에서 살고 있던 민족의 언어가 화석화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