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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26)

‘당근과 채찍’의 원리는 자명하다. 인자할 때는 인자하고 엄할 때에는 엄해야 하고 내칠 때는 내치고 당길 때는 당겨야 한다는 말이다. 중국역사에 전형적인 사례가 있다.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은 역사에서 ‘야심과 의심이 많은 군주(雄猜之主)’로 유명하다. 야심이 컸으며 의심도 많았다는 말이다. 그가 황제에 오른 후 중국 천하를 다스릴 때 겸허하고 현인을 받아들이며 현자를 임용하는 기풍은 뒷전으로 밀려두고 아침저녁으로 자신의 절대 권력과 가천하(家天下)를 유지하는 데에 골몰하였다. 주원장은 각종 비열한 수단을 사용해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자는 배척하고 공신을 주살하였다.

 

이선장(李善長, 1314~1390)은 주원장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하였다. 지모가 뛰어나고 판단이 정확한 인물로 유명하다. 개국 초기에 법률제도, 종묘 예의를 제정해 주원장과는 물과 물고기 같은 사이었다.

 

주원장은 이선장을 한나라의 소하(蕭何)와 비교하면서 그를 “공신의 수장”이라고 불렀다. 개국 후 최초로 승상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주원장이 성공해 천자의 자리에 앉자 이선장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선장은 이전에는 주원장에게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한다”고 칭찬받다가 나중에는 “독단적으로 전횡한다”고 비판받았다. 예전에는 주원장이 이선장에게 풀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면서 먼저 일을 처리하고 나중에 보고하도록 해 그를 “짐을 위하여 걱정거리를 덜어준다”고 칭찬하였지만 나중에는 “황제를 안중에 두지 않는다”고 질타하였다.

 

이선장이 공의 크고 권력이 생기기 시작하자 주원장은 의심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러면서도 이선장이 공이 크고 명망이 높으니 경거망동하면 예측하지 못하는 변고가 생길까 두려워 한번은 내치는 방법을 쓰기도 하고 한번은 끌어당기는 방법을 쓰기도 하면서 기회를 봐 철저히 제거하려는 계략을 쓴다.

 

한번은 내쳤다. 주원장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던 이선장은 황제가 자신을 의심하고 싫어한다는 것을 느끼자 병을 핑계 삼아 며칠 동안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기회를 보고 주원장에게 상소를 올려 조정에 나가지 못한다는 것에 유감의 뜻을 전했다.

 

한편으로 벼슬에서 물러나겠다고 전한 후 주원장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를 살폈다. 관례대로 주원장은 어명을 내려 위문하고 만류했지만 역시 바람에 따라 돛을 달 듯 추세에 맞추어 행동하였다. 곧이어 이선장의 희망을 받아들인다면서 힘도 들이지 않고 재상자리에서 쫓아내었다.

 

한번은 당겼다. 이선장의 재상 권한을 빼앗아 위협을 제거해버렸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원장이 박정하고 악랄하다고 암암리에 욕해댔다. 민심을 추스르고 이선장을 위로하려고 주원장은 자기 딸 임안(臨安)공주를 이선장의 아들 본기(本棋)에게 시집보냈다. 주 씨와 이 씨 두 집안이 국척(國戚)이 된 것이다.

 

 

현명한 상사와 부하는 분명히 알아야한다 : 당근과 채찍이란 결국은 책략이요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한다.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야한다. 마지막에 더 뛰어난 사람이 “명료하게 연출해 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연극일 따름이다.

 

[인물]

 

○ 주원장(朱元璋) :

 

명(明)나라 태조(太祖, 1328~1398), 안휘(安徽) 봉양(鳳陽) 사람으로 호주(濠州) 종리(鍾離, 명 왕조 개국 후 봉양으로 바꿨다)에서 태어났다. 자는 국서(國瑞), 원래 이름은 중팔(重八), 나중에 흥종(興宗)으로 바꾸고 곽자흥(郭子興)의 군대에 가입한 후 주원장(朱元璋)으로 바꿨다. 정치가, 전략가, 군사전문가, 명 왕조 개국황제다.

 

○ 이선장(李善長, 1314~1390) :

 

자는 백실(百室), 호주(濠州) 정원(定元, 현 안휘성 정원현) 사람이다. 명 왕조 개국공신이다. 이선장은 어릴 적에 독서를 즐겼고 지모가 있어 나중에 주원장에 의지해 전쟁터에서 많은 군공을 세웠다. 한(漢)나라 승상 소하(蕭何)와 비견된다고 평가받는다. 홍무(洪武) 23년(1390)에 호유용(胡惟庸)의 당파를 추문하면서 주원장(朱元璋)은 이선장을 비롯한 처자와 자녀, 조카 등 70여 명을 한꺼번에 주살하였다. 나이 76세였다.

 

○ 가천하(家天下) :

 

제왕이 국가 정권을 자기가 차지한 것으로 보고 세습한 것을 가리킨다. 제왕이 국가를 자기 일가의 사유재산으로 여겨 자자손손 전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예운(禮運)』에 보면 우(禹) 이전의 사회는 대동(大同)사회였다. 그때에 모든 재산은 공공의 소유[천하위공(天下爲公)]이어서 우두머리는 재능에 따라 선출하는 방식[선현여능(選賢與能)]을 따랐다.

 

우(禹) 이후의 사회는 국가 재산을 일가의 개인 재산[천하위가(天下爲家)]으로 여겼고 사유제가 합법화되었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계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우가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가천하(家天下) 하는” 제도가 정립되었다. 서주(西周)시대에 이르면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게 없고 땅에서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普天之下,莫非王土.率土之濱,莫非王臣)”(『시경(詩經)·소아(小雅)·곡풍지십(谷風之什)·북산(北山)』)”는 구호가 생겨났다. 천하의 토지와 신민은 군왕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여겼다. 동양의 악습, 봉건군주전제제도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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