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4 (수)

  • 흐림동두천 0.4℃
  • 맑음강릉 0.7℃
  • 서울 2.6℃
  • 구름조금대전 0.1℃
  • 구름조금대구 3.4℃
  • 흐림울산 3.9℃
  • 구름많음광주 2.7℃
  • 구름많음부산 5.6℃
  • 맑음고창 -1.0℃
  • 맑음제주 7.8℃
  • 흐림강화 1.0℃
  • 맑음보은 -3.0℃
  • 흐림금산 -2.0℃
  • 구름많음강진군 3.5℃
  • 구름많음경주시 3.2℃
  • 구름많음거제 6.3℃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14)

『손자병법(孫子兵法)』「군사(軍事)」는 말한다. “가까운 곳에서 먼 길을 오는 적을 기다리고, 편안하게 쉬면서 피로해진 적을 기다리며, 배불리 먹고 나서 적이 배고프기를 기다리라. 이것이 힘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무슨 말인가? 편안하고 여유롭게 쉬면서 정예부대를 양성해 피로해진 적에게 기회를 틈타 승리를 얻으라는 말이다.

 

어사(御史)가 어떤 현(縣)에 파견돼 공무를 수행하다 그 현의 현령을 화나게 만들었다. 현령은 암암리에 총애하는 첩에게 어사를 시봉하게 하였다. 어사는 그 첩과 다정하게 지내게 되었다. 첩은 기회를 틈타 몰래 어사의 작은 상자에서 인장을 훔쳤다. 오래지 않아 어사가 인장을 찾았는데 상자가 비어있는 게 아닌가. 마음속으로 현령이 한 짓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함부로 발설할 수 없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정사를 처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지연시킬 수만은 없었다. 급한 마음에 방법을 찾던 중 현에 지모가 출중한 교관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교관이 병문안 온 때에 교관을 침대로 불러 교관에서 자기의 사정을 얘기한 후 해결책을 물었다.

 

교관이 다 듣고 나서 어사에게 이러이러하라고 말했다. 그날 밤, 어사는 주방에 불을 놓았다. 불빛이 하늘을 밝히자 현의 관원들이 앞 다퉈 불을 끄러 달려왔다. 어사는 인장을 놓아두었던 상자를 급히 현령에게 건넸다. 다른 관원도 급히 자기 물건을 챙겼다. 불을 끈 후 현령은 인장을 뒀던 상자를 어사에게 건넸다. 인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곳에 놓여있었다.

 

일을 당했을 때 이처럼 태연자약하여야 한다. 이런 계책을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마음속에 분명 원만하고 융통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명(明, 1368~1644)나라 때 매국정(梅國楨)〔1542~1605, 자는 극생(克生), 호는 형상(衡湘), 호북 마성(麻城) 사람〕이 소사마(小司馬, 병부시랑)를 역임할 때에 3진 총독(總督)을 맡았다. 외족(外族)〔한족 이외의 민족, 중국인은 일반적으로 호족(胡族)이라 부른다〕의 추장이 변방을 두드릴 때마다 복종을 표시하면서 냉정하게 상대방의 군심을 안정시켰다. 한족이 외족의 물건을 훔쳤을 때는 법에 따라 처벌하였고 외족이 상금 이외에 과한 요구를 해올 때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느 날, 외족 추장이 몇 십 량의 철을 가지고 와 진상하면서 말했다. “이것은 우리 사막에서 생산된 것입니다.”

 

매국정은 생각하였다. “만약 사막에서 철이 생산된다면 어찌 우리가 모를 수 있겠는가? 근본적으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우리가 철의 송출을 금지하는 명령〔금철(禁鐵)〕을 느슨하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음이다.” 그는 그 추장을 위로하고 돌려보낸 후 곧바로 그 철을 가지고 검을 주조하였다. 검에는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어느 추장이 선사한 것이라는 문자를 칼자루에 새겼다. 동시에 공문을 각지에 발송하였다. “외족이 이미 철을 생산하고 있으니 다시는 철제 도구를 판매할 필요가 없다.” 외족 지역에서 이미 철을 생산하고 있으니 이후에는 그들에게 가마나 솥을 팔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나중에 외족 지역에 솥이 부족하게 되자 외족은 사신을 보내 철을 판매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매국정은 조용히 말했다. “이미 철을 생산하게 됐는데 당신들 스스로 쇠솥을 만들 수 있잖소.” 외족 사신은 몇 번이고 철이 없다고 말했다. 매국정은 예전에 만들어둔 검을 가지고 나와 보여주자 외족 사신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자신들의 오류를 사과하였다. 이후에 다시는 매국정에게 거짓된 말을 하지 못했다. 매국정의 지모는 여러 번 “가슴에 본래부터 강병 100만을 품고 있다”고 자화자찬하였던 범중암(范仲淹)〔989년~1052년, 자는 희문(希文), 오군오현(吳郡吳縣, 현 강소 소주蘇州) 사람〕과 비교하여도 고하를 견줄 수 없을 정도다.

 

북송(北宋, 960~1127) 신종(神宗, 1563~1620) 원풍(元豐) 연간에 유순경(劉舜卿)〔북송 때 장군, 경력(慶曆) 연간에 아들 요경(堯卿)과 함께 호수(好水)에서 전사〕이 웅주(雄州) 지주를 역임할 때 웅주는 그 당시에 송나라와 요(遼)나라의 접경지대이어서 파괴활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성문을 닫는 열쇠를 훔쳐 요나라로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요나라에 열쇠를 건네주고 상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성문지기는 소식을 퍼뜨리지 않고 조용히 그 일을 유순경에게 보고하였다.

 

유순경은 그 일을 자세하게 캐묻지도 않고 문지기에게 가서 성문을 새로운 커다란 자물쇠로 채우라고 명했다. 며칠 후, 요나라는 열쇠를 훔친 사람을 웅주로 환송하면서 열쇠도 가져다주었다. 유순경에게 모욕 줄 심산이었다. 유순경은 침착하게 상대방에게 말했다. “우리는 자물쇠를 잃어버리지 않았소.” 사람에게 명하여 성문에 가서 살펴보라고 하였다. 자물쇠는 열쇠보다도 몇 갑절이나 컸다. 잠글 수도 열 수도 없었다. 유순경은 열쇠를 훔친 사람과 열쇠를 모두 상대방에게 넘겨주면서 필요 없으니 가지고 가라고 하였다. 요나라 사람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돌아간 후 열쇠를 훔친 사람을 호되게 매질하고는 쫓아내버렸다.

 

 

“쉬면서 힘을 비축했다가 피로한 적군을 맞아 싸우다”는 뜻인 ‘이일대로(以逸待勞)’는 실제로 주도권을 어떻게 장악하느냐에 달려있다. 적을 움직이게 만들고 적에게 조종당하지 않도록 하는 예술이다. 부드러운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기는 것〔이유극강(以柔克剛)〕이요 고요함으로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이정제동(以靜制動)〕이요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천변만화에 대응하는 것이다. 운용의 묘는 어디에 있을까? 복잡하고 번잡하며 순식간에 천변만화하는 정세아래 통제권을 확실히 장악하는 데에 있다. 상황의 변화와 발전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것이다. 조용히 변화를 지켜보면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기회를 봐 주도적으로 출격하는 것을 말한다.

 

이일대로의 묘책은 군사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 경제, 사업, 주식, 투자 모두에 해당하고 심지어 바둑판에서도 유용하다.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적용된다. 간단함으로 번잡함을 제어하고 임기응변할 수 있는 묘수! 이일대로, 이 묘책을 활용할 수 있다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다.

 

① 명(明)나라 진수(鎭戍)제도. 변경(邊境, 변새邊塞), 연해 및 서남 소수민족 지역의 요충지의 모든 지역에 평상시에는 대군이 주둔하는 진수를 설치하였다. 영락(永樂, 1403~1424) 이후에 북경에 도읍을 정하니 가까운 변방 3곳 방어가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당시 변방은 동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에서 서쪽으로 가욕관(嘉峪關)까지 만 리에 걸친 지역을 나누어 방어하였다. 처음에는 요동(遼東), 선부(宣府), 대동(大同), 연수(延綏) 4진(鎭)을 설치하고 ; 계속해 영하(寧夏), 감숙(甘肅), 계주(薊州) 3진을 ; 그리고 산시(山西)진이 돌아가며 3관(關)을 동솔하고 섬서(陝西)진이 고원(固原)을 통제하게 하였는데 이를 2진이라 불렀다. 모두 합쳐 구변(久邊)이라 한다. ※명나라 때에는 안문(雁門), 영무(寧武), 편두(偏頭)를 외삼관(外三關)이라 하였다. 현재 산서성 태원(太原) 북쪽이다 ; 거용(居庸), 자형(紫荆), 도마(倒馬)를 내삼관이라 하였다. 현재 하북성 곡양(曲陽) 북쪽이다.

 

② “가슴에 본래부터 강병 100만을 품고 있다”는 말은 『오조명신언행록(五朝名臣言行錄)』 7권 인용 『명신전(名臣傳)』에 나온다. “연주(延州, 연안)에 뜻을 두지 않는다. 지금 소범노자(小范老子)는 가슴에 본래부터 강병 100만을 품고 있으니 어리숙했던 대범노자(大范老子)와 비길 수 없다.” ‘소범노자’는 범중암(范仲淹)을 가리키고 ‘대범노자’는 범옹(范雍)을 말한다. 송나라 인종(仁宗) 경력(慶曆) 초년에 범중암은 개혁을 주장하고 신정을 추진했으나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쳐 1년 만에 실패로 끝을 맺는다. 그로인해 범중암은 섬서로(陝西路) 안무사(安撫使)에 폄적된다. 당시에 서하(西夏)는 여러 차례 군대를 일으켜 국경을 넘보고 있었다. 범중암이 연안에 도착한 후 힘써 군대를 훈련시키고 정예를 양성하였다. 서하인들이 그 소식을 들은 후 말했다. “다시는 연안을 침범할 생각을 가지지 말아야한다. 저 범중암은 본래부터 백만 강병을 양성할 마음을 품고 있다. 범옹처럼 그렇게 가볍게 볼 수 없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 속담을 가지고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웅재대략(雄才大略)]이 있는 것을 비유한다. 흉중갑병(胸中兵甲), 반흉병갑(蟠胸兵甲)이라하기도 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25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